122화
용은 홀로 완전한 존재다.
음식도, 물도, 공기도 없이 수천 년의 수명을 살아가는 존재들.
그렇기에 이들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을 필요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생명체가 가진 대부분의 제약을 벗어난 이들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초주가 그들에게 내려 준 권능, 언령 뿐.
그렇기에.
“저, 아피루스는 인간 서진혁의 일생이 끝날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죄를 뉘우치겠습니다.”
진혁은 자신을 찾아온 어린 용, 아피루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배받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종족이 스스로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운 꼴이었으니까.
“……무슨 꿍꿍이지?”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말에, 아피루스는 진혁을 올려다봤다.
“이게 용이 사과하는 방식이에요. 조금 전의 언령은 그 사과를 이행하기 위해 건 제약이고요.”
“사죄의 의미로 자유를 바친다는 건가?”
“뭐…… 그런 셈이죠. 앞으로 수십 년은 볼 테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여전히 억울함이 가시지 않은 듯 꼬마의 볼은 살짝 부풀어있었지만, 표정과 달리 진혁을 대하는 아피루스의 행동은 공손했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에요.”
“선물?”
꼬마 용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을 내밀자, 진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아피루스의 손에 들린 검은 색의 보석을 쥔 순간.
우웅!
보석으로부터 퍼져 나온 강력한 마나의 기파가 진혁의 몸을 뒤흔들었다.
곧, 진혁은 꼬마가 건넨 선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용심?”
“흑룡의 용심이에요. 예전에 선조 용이 죽을 때 받았는데, 쓸 데도 없어서.”
아피루스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진혁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용심.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 용이 가진 모든 힘의 근원.
마정석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물이 진혁의 손에 들어왔다.
‘용심이 가진 힘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
가짜 용의 육체를 지닌 멜리나에게 쥐여 준다면, 진짜 용과 같은 힘을 가질 것이다.
성준이나 자이츠에게 쥐여 준다면 단숨에 일 품의 엽사를 뛰어넘을 것이고, 민호라면 최상급 마법을 손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 악령이 가진 카르마를 모두 이용할 수 있을지도.’단순히 많은 에너지를 가졌을 뿐이지만,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세의 보물.
옆에서 꾸물대는 검은 영혼을 잠시 바라보던 진혁은 아피루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잘 쓰도록 하지.”
“뭐, 그러세요…….”
아피루스는 진혁의 손에 들린 검은 용심을 못내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곧 고개를 흔들어 욕심을 털어 버렸다.
‘어차피 수십 년 밖에 안 볼 사이야. 잠깐만 참자.’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가는 용에겐 찰나와도 같은 시간.
괜히 넘겨줬나 하는 생각에 아피루스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아까운가 보군.’
진혁의 눈에는 꼬마 용의 속마음이 그대로 보였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지만.
그때였다.
파앗!
환한 빛이 터지며 호텔 방을 가득 채웠다.
공간이동 마법이 발동할 때 발생하는 특유의 현상.
‘피 냄새다.’
환한 빛 사이로 찔러 들어오는 비릿한 냄새.
밝은 빛에 가려진 상대를 찾으려 진혁은 주변을 살폈다.
곧,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누, 누나!”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발견한 아피루스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놀란 것은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여자는.
다름 아닌 팔국의 수호룡, 청명이었으니까.
“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수호룡의 입에선 끊어질 듯 가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척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
“아피루스…….”
하지만 진혁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
콰아앙!
꺄아아악!
폭음과 함께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그는 호텔 방의 창밖을 바라봤다.
간혈적으로 터지는 폭음과 함께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홍콩의 지하에서 튀어나오는 기괴한 외형의 생명체들.
그리고.
어지간한 빌딩보다 거대한 크기를 지닌 시커먼 눈.
쓰러진 청명의 입에서, 놈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주시……자…….”
에피로나를 지배하는 갑 급 괴수 중 하나.
‘어떻게.’
소리소문없이 등장한 갑 급 괴수를 마주한 진혁은 놀랐지만,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멜리나.’
―네?
‘이곳으로 와라.’
모든 망자들을 데리고.
의아해하는 멜리나를 향해 명령을 전한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도시가 불타올랐다.
중원의 관문인 홍콩이 괴수의 공격을 알아챈 것은, 놈들이 지하의 하수도에서 얼굴을 내밀었을 때였다.
홍콩 역시 용들의 관할구역인 만큼 수많은 탐지마법이 도시 전체를 뒤덮은 상태.
그럼에도, 홍콩 어디에서도 던전 게이트의 출몰을 알리는 경보음은 들리지 않았다.
“역시, 당신을 데려온 건 틀린 선택이 아니었어.”
어지간한 빌딩만큼 거대한 크기를 지닌 검은 색의 눈.
그 옆에 선 여자, 백묘는 눈을 올려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릿속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눈의 형태를 한 갑 급 괴수, 주시자의 의지.
“물론이지. 이곳의 수호룡을 처리한다면, 네가 원하는 제물은 실컷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주시자의 말에, 백묘는 씨익 웃으며 불타오르는 도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수호룡을 손에 넣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에피로나에서 네가 지배하는 영역도 넓힐 수 있을 거고.”
―방해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걱정 마, 오히려 환영이니까.”
주시자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녀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옮겼다.
“크으으으…….”
“키이이…….”
주시자가 에피로나에서 직접 데려온 괴수 떼가 그녀를 지나 도시의 중심, 홍콩섬으로 향했다.
아마도, 그곳에서 다친 수호룡의 흔적을 찾은 것이리라.
‘그래도, 정말 수호룡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백묘가 주시자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가 바란 것은 고작 해야 수호룡의 발을 묶어 두는 정도.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에는 충분했으니까.
‘이제, 내 계획을 방해할 존재는 없어.’
우웅!
도시 전체에 자신의 권능을 퍼트리는 주시자를 감탄한 눈으로 바라보며, 백묘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도착한 곳은, 홍콩섬의 구석에 버려진 채 방치된 지하벙커.
자연스럽게 벙커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눈에, 녹슬어 있는 거대한 붉은 철문이 들어왔다.
“후후.”
철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웃으면서 철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 너머에 자리한 것은, 그녀가 천경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
판웨이에게 맡긴 공작은 이것을 가리기 위한 연막일 뿐, 진짜는 이것이었다.
스으으!
철문을 향해 내뻗은 손에 끼워진 반지가 검은빛을 내뿜었다.
그와 함께, 반지에 끼워진 보석으로부터 어둡고도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가 철문을 감싸 안았다.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반지라니…… 이게 없었다면 계획 자체가 불가능했겠지.’
그녀가 처음 마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받은 보구.
처음에는 한 줌의 마나도 담기지 않은 쓰레기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전 반지의 진정한 힘을 깨닫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반지가 가진 알 수 없는 힘이 망자나 영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가장 강력한 영혼을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가 철문 뒤에 봉인된 채 잠들어 있을 결과물.
‘이제, 용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줄 때가 됐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백묘는 기대 어린 눈으로 철문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영혼이…… 없어?’
철문 뒤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백묘는 당황했다.
‘분명히, 반지의 힘으로 봉인했을 텐데……!’
철문이 움직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그녀가 봉인해 둔 영혼이 스스로 봉인을 벗고 빠져나왔다는 이야기.
‘찾아야 해.’
수많은 생명을, 수많은 재화를 이 영혼을 완성시키기 위해 쏟아부었다.
이제 와서 다시 준비하기엔 투자한 비용이 너무나 컸다.
스으으!
그녀의 의지에 감응한 반지가, 또다시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이번에는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영혼을 찾기 위한 움직임.
반지에서 피어오른 검은 안개가 벙커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깥으로 퍼져 나갔을 때.
‘이건…….’
백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나가…… 아냐?’
하나, 열, 백…….
반지로부터 느껴지는 망령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대체…….’
확인해야 했다.
그녀는 곧장 벙커 밖으로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이내, 백묘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눈을 크게 떴다.
“용……?”
단순히, 새로운 용이 하늘을 날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용과 용의 몸통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곤돌라에서 느껴지는 수백의 망령들.
“키이이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포효하는 용을 바라보며, 그녀는 순간 말을 잃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괴수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홍콩섬에 위치한 한 호텔이었다.
유명한 호텔이긴 하지만 그 외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특급호텔.
괴수들이 그곳을 첫 목표로 삼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으…….”
“아피루스.”
중상을 입은 채 힘겹게 신음소리를 내뱉는 청명을 내려다보며, 진혁은 놀란 어린 용을 불렀다.
“네.”
“청명을 천경으로 데려가라.”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혁의 감각에 주변의 괴수들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분명, 빈사 상태에 놓인 청명을 노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다른 용들을 불러오도록.”
“네…… 네!”
진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아피루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는 쓰러진 청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곧.
파앗!
환한 빛과 함께 두 용의 모습이 사라졌다.
“흠.”
홀로 남은 진혁은 호텔방의 창밖을 내려다봤다.
등급도, 종류도 제각각인 괴수들이 불타오르는 건물들을 지나 몰려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놈들이 건물에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일 뿐.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놈들이 오기 전에, 모조리 제거해 버리거나.
그리고.
진혁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키이이이!”
푸른 뿔을 지닌 채, 배에는 거대한 곤돌라를 매달고 있는 붉은 비늘의 용.
“늦었군.”
―이게 최대한 빨리 온 거거든요?
멜리나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채, 진혁은 호텔을 향해 달려드는 괴수들을 내려다봤다.
‘오래 걸리진 않겠어.’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