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망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다.
그 미련이 너무나 깊고 큰 업이 되어 스스로를 현계에 속박해 버린 영혼들.
진혁이 홍콩의 은신처에서 마주한 것은, 그 중에서도 아주 진한 업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흥미롭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한 망령의 기운을 느낀 진혁의 눈이 빛났다.
거대한 업을 갖고도 타락하지 않은 영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으니까.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진혁은 거대한 강철문을 마주한 채 미소를 지었다.
본래는 벙커의 입구로 쓰였을 거대한 철문은 오랫동안 방치된 듯 시뻘겋게 녹슬어 있었다.
“망령이여.”
두근!
진혁이 사령술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의 검은 심장이 고동쳤다.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싸는 흑색의 기운.
“명계의 율법에 따라, 그 모습을 보여라.”
스으으!
진혁의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몸을 감싼 흑마력이 수십 발의 화살처럼 변해 철문 너머로 쏘아져 나갔다.
두꺼운 철문을 가볍게 뚫고 사라진 흑마력의 화살들이 영혼 하나를 묶은 채 돌아온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이런.’
벽 너머에서 끌려온 영혼을 영안으로 살핀 진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짙은 회색을 넘어 시커멓게 물들어 있는 영혼.
놈은 자신을 묶은 흑마력의 밧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진혁은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악령이다.’
카르마를 너무 많이 쌓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질되어 버린 영혼.
명계의 순환시스템에도 들어갈 수 없는 악령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카르마에 짓눌려 자신을 잃어버린 악령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것.
스으으!
‘카르마만 가져가야겠군.’
생각을 마친 진혁은 악령을 소멸시킬 생각으로 흑마력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와 함께, 악령을 묶고 있던 흑마력의 사슬이 점차 굵어졌다.
곧, 진혁이 한 줄기의 의지를 움직인다면 놈은 단숨에 소멸되리라.
‘빨리 끝내야겠어.’
이미 이지를 잃어버린 주제에 너무 많은 힘을 가진 것이 악령이다.
우연히 바깥으로 풀려나게 된다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으니, 그전에 소멸시켜야 한다.
“망령이여.”
진혁은 흑마력의 감옥에 완전히 갇혀 버린 악령을 소멸시키기 위해 사령술을 움직이려 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검게 물든 채 발버둥치던 악령이, 갑자기 입을 열기 전까지는.
―자, 잘못했습니다! 부디 소멸만은…….
말을 할 수 있는 악령이라니.
망령군주 파슬란의 기억 속에서도 본 적 없는 존재다.
“재밌군.”
소멸의 주문을 외우려던 진혁은, 주문을 멈추고는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망령을 향해 눈을 빛냈다.
판웨이.
홍콩에 괴수들을 풀고, 수호룡의 레어를 불 지른 범인.
놈을 붙잡자마자, 청명은 판웨이와 함께 그녀의 레어로 돌아왔다.
“우웨엑!”
예고 없이 벌어진 공간이동.
판웨이는 극심한 멀미를 견디지 못하고 속을 비워 냈다.
하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청명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내 레어와 팔국을 건드린 것으로도 모자라 천경까지 노리려 하다니. 간도 크구나. 괴수라고 해도 믿겠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살기가 판웨이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으…… 으……!”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사로잡자, 판웨이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벌벌 떨었다.
“입은 열지 않아도 괜찮다. 직접 네 머릿속을 확인할 것이니.”
말 그대로, 두개골을 열어 그 안에 자리 잡은 두뇌를 분석해 기억을 뽑아 내는 마법의 일종.
그걸 당한 인간은 당연히 죽겠지만, 청명이 굳이 자신의 레어와 나라를 공격한 놈의 생명을 걱정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히, 히익……!”
자신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판웨이의 눈이 떨려 왔다.
청명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심장이 멎어 버릴 듯 아파 왔다.
하지만, 심장이 멎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더욱 끔찍한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뿌득! 우드득!
마법의 힘에 묶여있던 판웨이의 사지가 움직일 수 없는 각도로 뒤틀렸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몸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청명이 한 것이 아니었다.
“막아라.”
이상함을 느낀 청명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며 언령을 발동했다.
우웅!
그러자, 부풀어오르는 판웨이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장벽이 솟아났다.
돔처럼 남자의 주변을 완전히 감싸 버린 마나의 장벽 안에서, 판웨이의 몸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랐다.
곧.
콰아앙!
“……여기까지 준비해 둔 것이냐.”
장벽 안을 가득 채운 붉은 화염을 바라보며, 청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인들의 수법이 지저분한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정도가 더욱 심했다.
못해도 중간관리자급은 되는 존재를 단순히 폭탄으로 쓸 거라고는 그녀 역시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꼬리를 잡았구나.”
점차 가라앉는 붉은 화염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한 청명은 미소를 지었다.
마정석.
아마도 판웨이의 몸속에 심어져 있었을 보석의 조각에선, 아직도 상당한 양의 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정석 뒤로 연결되어 있는 얇은 선.
누군가가 마정석을 이용해 마기를 전송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쫓아라.”
청명이 마기의 발원점을 찾아내는 데에는, 한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우웅!
그녀의 말에 감응한 주변의 마나가 마기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갔다.
곧, 수호룡은 마기가 시작된 지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홍콩.
그것도, 그녀의 레어가 존재하고 있는 홍콩 섬의 지하 하수도.
마인의 흔적이 이토록 가까이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이제…… 끝을 보자꾸나.”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먹잇감의 위치를 바라보며, 청명은 눈을 빛냈다.
“움직여라.”
그녀의 한마디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악취와 오물로 가득한 홍콩의 하수도 어딘가.
세계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마인이 살아가기에 충분히 어울리는 곳이었다.
빛조차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이었지만, 초월적인 감각을 지닌 용에게는 별 방해도 되지 않을 수준.
장소에 도착한 청명은 어딘가에 숨어 있을 마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안녕?”
그녀는 만날 수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한 명의 여자를.
하얀색 치파오를 입은 채 한 손에 든 부채로 입을 가린 여자의 눈에선, 검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인.
“너로구나.”
청명에게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상대는 세계와 팔국을 어지럽히는 마인.
죽음의 언령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제약도 없는 존재다.
한마디의 말.
상대를 소멸시키는 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리고, 잘 가!”
부채로 입을 가린 상대가 장난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을 때.
스으으으!
‘이건…….’
하수도를 타고 다가오는 지독한 마기.
“고작, 이런 걸 믿는 것이냐?”
자신의 주변을 감싸는 죽음의 기운을 느낀 청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인을 비웃었다.
“아니?”
하지만, 백묘는 여전히 장난스런 말투로 말했다.
“내가 믿는 건, 멍청한 네 머리야.”
그와 함께, 마인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하수도의 한 면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눈.
놈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갑 급의 괴수조차도 능가하는 거대한 마기였다.
‘이건…… 대체…….’
거대한 눈앞에서, 청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악령은 거대한 카르마에 의해 이지가 짓눌려 버린 존재.
당연히, 말을 할 정도의 지성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의 눈앞에 나타난 악령은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카르마를 작은 영혼에 짊어지고 있음에도, 의지가 꺾이지 않은 존재.
망령군주 파슬란의 기억 속에서도 이런 현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혁이 놈을 소멸시키는 대신 지켜보기로 한 이유였다.
‘넌, 뭐지?’
놈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온 진혁은 망령인지 아닐지 모를 존재와 대화를 시작했다.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망령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억은 거의 없었다.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만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외의 대부분은 거대한 카르마에 짓눌린 상태.
기억을 직접 읽어 보려 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영혼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이미 변질된 상태였다.
검은 영혼의 구석에 찍힌 좁쌀만 한 회색 점을 바라보며,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이지를 가진 악령이라…… 쓸모가 없진 않겠지.’
거대한 카르마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지닌다.
약간의 마나를 덧붙여 준다면 곧바로 망자의 원동력인 흑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으니, 악령이 가진 힘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수준.
그 제어가 불가능했기에 파슬란도 소멸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혁의 눈앞에 나타난 악령은 불완전하나마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악령이 가진 거대한 힘을 고스란히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꽤 많은 마나가 필요하겠지만.’
분명,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에피로나로 향해야 할 진혁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악령의 쓰임새를 고민하기 위해 진혁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파앗!
카메라 플래시처럼 하얀빛이 호텔방을 메웠다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나타난 것은, 이제 중학생이나 될까 싶은 어린아이.
등에 검은 가방을 멘 아이의 얼굴엔, 억지로 지은 듯 딱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용?”
아피루스.
그를 죽이려고 했던 용이 눈앞에 다시 등장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사죄……를 하러 왔습니다.”
어린 용은 그 말과 함께 허리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 아피루스는 인간 서진혁의 일생이 끝날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죄를 뉘우치겠습니다.”
우웅!
동시에, 진혁은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진혁과 용의 영혼을 이은 법칙의 선.
“방금 전의 언령에 따라, 저는 당신의 일생 동안 당신을 따를 겁……니다.”
선을 따라간 곳에 보이는 것은, 남자아이의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