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천경.
아홉으로 찢어진 중원을 다스리는 용들의 도시.
그 별명에 걸맞게, 천경의 중앙에 자리한 광천의 둥지엔 여덟의 용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채 모여 있었다.
성별도 피부색도 옷차림도 제각각이었지만, 동공 깊은 곳에 숨은 특유의 광기는 이들이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고 있었다.
하지만.
“늦는데.”
“장로의 소집령에 지각이라니, 이 녀석은 하여튼…….”
“한두 번도 아니고, 참.”
용족의 장로인 광천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소집령을 받은 지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지껏 나타나지 않은 용이 있었기 때문.
“그러게, 막내라고 오냐오냐 해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찡그렸다.
“지구에 왔을 때 버릇을 고쳐 놨어야 했는데, 이게 다 말리아 장로님께서 너무 무르게 대하셔서 벌어진 일 아닙니까.”
그전부터 지각한 용에게 악감정이 쌓여 있었던 것인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광천…… 아니, 말리아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나. 불카누스 자네도 알다시피, 녀석은 일족의 유일한 희망이라네.”
말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천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야. 그러면서도 감당하기 힘든 힘을 지니고 있지. 혹여나 잘못해서 엇나가기라도 하면, 일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말을 마친 장로의 표정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장로님께서 계속 그렇게 감싸고 도시니까 녀석이 점점…….”
그 말에 발끈한 남자, 불카누스가 장로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번쩍!
여덟 용이 모여있던 레어의 중앙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것은, 하얀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년.
딸깍. 딸깍.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년의 시선은 손에 쥔 게임기의 화면을 향해 있었다.
“저, 잠깐만요. 이제 한타 타이밍이라.”
순간, 레어는 침묵에 빠졌다.
여덟 용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시선이 쏟아졌지만, 소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게임 속 화면에 집중했다.
한참 뒤에야, 장로인 광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늦었느냐. 소집령에 응하는 것은 세계의 수호자인 용의 의무라 하지 않았더냐.”
“자느라고요. 랭겜 잡히는 소리 듣고 깨서야 알아차렸지 뭐예요? 근데 닷지는 할 수 없으니까…… 나이스!”
씨알도 먹히지 않는 변명을 주워 섬기면서도 온 신경을 게임기 속 작은 화면에 집중하는 모습 그 어디에도, 세계의 수호자인 용의 위엄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승리하셨습니다.
“캐뤼.”
게임의 승리 메시지와 함께 알 수 없는 손동작을 짓는 소년.
“아피루스 너 이 자식, 장로님의 소집령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거야?”
불카누스는 더 이상 눈앞의 버르장머리없는 용의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장로님께서 그동안 봐주셨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화가 끝까지 차오른 용의 어두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알아요.”
소년, 아피루스는 그 말과 함께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보여라.”
소년의 입에서 나온 언령.
그와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손을 휘저은 곳으로 모여들었다.
파앗!
이내, 모여든 마나의 응집체는 동그란 구체가 되어 무언가를 비춰 보였다.
“이건…….”
“우주인가?”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의 세계.
감각이 초월적으로 발달한 용들이 아니었다면 검은 배경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만큼, 구체 속의 세상은 온통 새까맸다.
“아뇨? 심핸데요?”
용들의 반응을 보며, 아피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저기가 본거지고요.”
“본거지라면…….”
“마인이요.”
“마, 마인들의 본거지를 찾았단 말이냐?”
대수롭지 않아 하는 아피루스의 말에, 말리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차분하면서도 위엄 어린 황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가 이렇게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찾을 수만 있었다면, 말리아는 곧장 모든 용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고작 아홉뿐인, 멸족의 위기에 봉착한 일족이라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압도적인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지 못했던 것은, 마인들의 이동방식이 차원의 틈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
지상에 나타나고 나서야 마인들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본거지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꿈에서 봤어요.”
아피루스.
그가 가진 예지의 능력을 제외하고는.
“이런 풍경이 어디에 나오는지 인터넷으로 뒤져 보니까, 심해 어딘가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고요.”
이야기를 마친 아피루스의 눈에는, 한 점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겠느냐?”
자신들을 멸족의 위기에 몰아넣은 괴수.
놈들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마인들을 소탕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지난 백 년간 꿈꾸던 목표였으니까.
허나.
“아뇨?”
아피루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해 어딘가인 건 확실한데, 위치까지는 아직 몰라요. 저 정도면 꽤 깊은 곳일 테니까 아예 못 찾을 정돈 아니겠지만…….”
“그렇구나. 수고했다, 아피루스.”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 같은 기분에, 말리아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다른 용들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놈들을 생포해서 알아내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려면, 최소한 우두머리급을 잡아야 할 거야. 헌데 놈들이 순순히 모습을 보이겠나?”
불카누스의 말에 장로는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그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대로, 마인들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카누스의 제안에, 용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중원의 일부를 미끼로 던져 줘서 방심하게 만들면,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게 마인들의 속성이니까요.”
“……자네,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방심하지 않는다면 중원을 그냥 내줄 뿐이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모두 실패했지 않습니까. 이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놈들의 본거지가 지구에 있다는 게 확인된 지금이라면 더더욱요.”
빈틈을 찌른 장로의 말에, 불카누스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말도 안 됩니다, 장로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청명, 벨레룩스였다.
“세계의 수호자라는 용이 수호의 의무를 저버린다니요.”
두 용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벨레룩스, 그러면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야 할 거 아냐.”
불카누스는 벨레룩스의 말에 코웃음 치고는, 말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로님,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써야 할 때입니다.”
중원의 황제, 말리아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미끼는?”
“장로님!”
장로의 물음이 가진 의미를 이해한 벨레룩스가 소리쳤다.
불카누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전통적으로 마인들이 들끓었던 팔국을 내어주는 게 좋겠죠. 밀리는 척 조금씩 내어준다면, 놈들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의무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불카누스와 벨레룩스.
의견이 갈린 두 용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장로는 한숨을 내쉬고는, 남은 여섯 용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 혼자서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자네들의 생각도 들어 보기로 하지.”
해가 진 천경의 하늘이, 점차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혁이 범인의 영혼으로부터 기억을 읽어 낸 순간.
“중원이라.”
진혁은 놈의 배후를 알아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중원.
멸망한 세계의 수호자, 용들이 지배하는 제국.
유일하게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가였기에 최근에서야 교류가 이루어진, 진혁에게는 낯선 나라였다.
그가 읽어 낸 기억 속에는, 중원의 각 나라에서 모인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들이 한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마기의 흔적도.
“용들이 지배하는 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마인이라니, 간도 크군.”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수호하는 것이 의무였던 용들에게, 인간들의 범죄와 같은 사소한 일은 관심 밖이었을 테니까.
중원의 음지를 숨어 다니며 세력을 키우는 것은, 마인의 힘을 가진 존재에겐 손쉬운 일이었으리라.
문제라면.
“중원에 가서 처리하기는 어렵겠어.”
용들이 지배하는 중원에 직접 개입하기엔, 서진혁이라는 이름이 너무 커져 버렸단 것.
아무리 인간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용들이라 한들, 자신의 영토에서 난장을 피우는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 둘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물며, 그것이 괴수를 망자로 부리는 그라면 더더욱.
“놈들이 나타날 때를 기다려야 하겠군.”
결국,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마인이 한국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그때였다.
파앗!
밤하늘을 밝힐 만큼 환한 빛 속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청명.
중원의 아홉 수호룡 중 하나인 그녀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고작 복수심 때문에 의무를 팔아치우다니.”
진혁의 물음에, 청명은 이를 갈며 천경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수호룡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그중 하나가 마인의 본거지를 알아낸 일.
그리고.
결국, 중원의 일부를 미끼로 삼아 마인을 끌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까지도.
“우리 일족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영락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이야기를 마친 청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제안을 하나 하지.”
진혁의 머릿속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제안?”
“날 중원에 보내 다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마인을 찾아 주지.
용을 바라보는 진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