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백여 년 전, 지구와 에피로나 사이에 게이트가 연결된 날.
세계는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이계의 지성체들과 괴수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졌다.
청나라를 부수고 중국대륙을 장악한 신생공화국, 중화민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불행히도, 중화민국에 나타난 이종족은 요정도, 난쟁이도 아니었다.
용(龍).
만 년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세계의 수호자.
수호의 의무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세계로 도망쳐 나온 용들의 자존심이 박살 날 대로 박살 나 있단 걸 알지 못한 중화민국의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군에 공격령령을 내렸고.
일 주일 뒤.
용과의 전쟁에서 패한 날, 중화민국의 숫자는 아홉 개가 되었다.
“흐음.”
이제는 중원(中原)으로 이름이 바뀐 아홉 중국의 중심에 놓인 공중도시, 천경(天京).
작은 섬을 그대로 들어 올려 만들어 낸 섬의 가장자리에, 금색 옷을 걸친 노인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제의 상징, 곤룡포를 걸친 노인의 눈빛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만 년의 삶 중 절반 이상을 살아온 고룡이자, 중원의 황제로 백 년을 알아 온 광천(光天).
모든 용의 웃어른인 그가 지구에서 하는 일은, 에피로나에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중원의, 나아가 세계를 수호하고 괴수와 마인들을 멸절시키는 것.
한참동안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을 바라보던 용은 조용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지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었다.
마기에 물든 자들, 마인의 흔적.
지상과 수천 미터 떨어져 있는 천경에서도 보일 정도라면, 지상의 사태는 보기보다 심각하리라.
“한동안 잠잠했건만…… 놈들이 또다시 일을 벌이는 것인가.”
그, 광천을 비롯한 아홉 중국의 용들의 힘으로도 중원에 모인 수십억의 사람들 사이에 숨은 마인을 모조리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대로 세계를 좀먹는 것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지.”
이미 에피로나에서 뼈아픈 실패를 맛본 광천이었으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곧, 광천은 이제까지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다.
“……수호룡들을 소집해야겠구나.”
우웅!
생각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황금색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골드 드래곤, 금룡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광천만이 다룰 수 있는 금룡기(金龍氣).
용심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금룡기가 손에 뭉쳐 들었다.
광천은 그대로 모여 있던 기운을 하늘로 힘차게 던졌다.
곧, 금룡기로 이루어진 황금색의 공은 소리없이 하늘 저 멀리로 쏘아져 올라갔다가, 여러 줄기로 갈라져 흩어졌다.
“이번엔 얼마나 걸릴는지…… 흘흘.”
유성처럼 긴 꼬리를 늘어트린 금색 빛줄기를 올려다보며, 노인은 턱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진혁이 두 가문의 후계자, 주소영과 이설화에게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여 준 순간.
‘이건…… 우리 마탑의 기술을 뛰어넘었어.’
‘대체 이런 건 어떻게…….’
두 사람은 진혁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급히 본가로 돌아간 두 사람은 채 하루가 지나기 전 진혁에게 제안을 승낙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고, 진혁의 요청대로 새로운 고렘의 개발을 위한 연구팀을 구성해 세한금속에 보내 왔다.
―덕분에 난리도 아니다, 난리도 아냐. 군식구들을 수십 명이나 데려오면 나보고 어떻게 하란 거야? 밥값 써야 하지, 잘 곳 마련해 줘야지…… 이거 완전 손해 보는 장사잖아?
통신구슬 위에서 툴툴대는 글리펜의 모습에, 진혁은 피식 웃었다.
“표정은 좋아보입니다만.”
투덜거림과 달리, 글리펜의 입꼬리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고대의 기술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수염이 덥수룩한 난쟁이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고렘 때문이고, 저건 저거지! 아무튼, 내 말 무슨 소린지 알겠지? 저 짐덩이들을 데려다 놨으면, 최소한의 비용은 지불하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상혁이에게 연락하시죠. 제 이름을 대면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어…… 그래? 니네가 그렇게 친했었나? 안 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진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글리펜은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통신을 끊었다.
통신이 꺼져 빛을 잃은 통신구슬을 잠시 내려다보며, 진혁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사실, 고렘의 실물을 언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고대의 지식을 전해 줬다고는 하지만, 그 것을 재해석해서 실제로 움직이는 고렘을 만드는 것은 결국 세 가문과 그 가문 소속의 장인, 공학자, 마법사이니까.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시간이 어느정도는 필요했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 말고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놈이 완성되고 외눈박이의 팔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면, 갈 수 있겠지.’
에피로나.
그 드넓은 행성 어딘가에 있을 외눈박이를 찾아내고, 토벌하는 것.
진혁의 숙원 중 하나를 이루게 될 날이, 이제 그리 멀지 않았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팔이 잘린 채 도주한 외눈박이를 떠올린 진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음.”
그의 옆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던 용, 청명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그때였다.
“잠시 천경에 다녀오겠다.”
“무슨 일이지?”
“장로가 소집령을 내렸다.”
청명이 답하자, 진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아남은 용들을 이끄는 장로.
그 말은 곧, 중원을 지배하는 제국의 우두머리, 황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장로의 소집령이라……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보통은 중원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마인들을 정리하는 일이지. 길어야 일주일이면 될 테니, 금방 돌아오겠다.”
팟!
그 말과 함께, 청명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용들의 권능, 언령을 이용한 공간이동마법.
‘중원이라…… 조금은 주의해야겠어.’
중원은 한국과 가장 가까운 장소 중 하나다.
진혁의 영지가 자리한 강화도에서 서해를 넘어가면 바로 중원의 영역이었으니, 만일 중원에 변고가 터진다면 그에게도 위협이 될지 모르는 일.
당장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 해도,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 둬야 하리라.
투투투투!
머리 위에서 시끄러운 엔진과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진혁의 시선에, 한 대의 헬리콥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것이 보였다.
하얗게 칠해진 헬리콥터의 동체 밑바닥에 새겨진 것은, 서가와 세한그룹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모양.
곧, 영지에 착륙한 헬리콥터에서 한 사람이 금속가방을 들고 내렸다.
세한보안의 토벌본부장이자 진혁의 막냇동생, 서상혁.
“늦었구나.”
“어르신께서 갑자기 연락을 주신 바람에. 이건 형님 탓이니 이해하십쇼.”
진혁이 핀잔을 주자, 상혁은 준비했다는 듯 변명을 주워 섬기고는 손에 쥔 금속 가방을 내밀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운 좋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한 달은 더 걸렸을 거요.”
해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은 동생에게서 가방을 건네받은 진혁은 곧장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크흠. 수고하긴 했죠. 그보다…….”
담담한 진혁의 말에 상혁은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진혁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형님, 그……분은 어딨습니까?”
“그분?”
“그, 그…… 저번에 회장실 앞에서 만났을 때, 옆에 있던 그분이요.”
“아.”
동생이 말하는 그분의 정체가 청명이란 것을 이해한 순간, 진혁은 상혁이 직접 강화도까지 찾아온 이유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라면, 떠났다.”
“떠나……다니요?”
“일주일 정도 떠나 있을 거라더군.”
“이, 이, 일주일…….”
형의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상혁은 그 말을 듣고 충격받은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진혁과는 상관없는 일.
그의 관심은 금속 가방 속에 든 물건에 쏠려 있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쓸 만하겠지.’
금속 가방에 든 물건을 바라보던 진혁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일국(一國)부터 구국(九國)까지, 중원을 이루는 아홉의 제후국들은 성의 없는 이름과 달리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중, 대륙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팔국(八國)은 국가 수입의 대부분을 수출과 해외투자를 통해 벌어들이는 상업 국가.
중원의 관문이란 별명처럼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은 나라였지만, 동시에 수많은 범죄조직으로 몸살을 겪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배후가 단 한 명의 여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우린 총력을 다해서 한국으로 진출할 거야.”
백묘.
하얀색 치파오를 차려입은 그녀의 앞에,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각기 팔국에서 크고 작은 조직을 운영하는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들.
평소에는 자기 구역에서 왕처럼 살아가던 자들이었지만, 여자 앞에 선 우두머리들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하…… 한국 말입니까?”
“그래. 뭐, 불만이라도 있나 봐?”
그중, 눈치 없이 입을 연 남자를 향해 백묘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불만이라니, 당치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서걱!
백묘가 손가락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르자, 겁에 질려 있는 남자의 머리가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혹시, 더 불만 있는 사람 있어?”
바닥을 구르는 머리와 피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남자의 몸.
눈 깜짝할 새 살인을 저지른 여자 앞에서 한 번 더 실수를 저지를 만큼 멍청한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다시 얘기해 볼까?”
언제 사람을 죽였냐는 듯 실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