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다음 날.
한동안 세계수에서 머문 진혁과 토벌2팀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정확히는, 검독수리에 올라탄 것은 부팀장인 주연과 망자들뿐이었지만.
“성녀님, 이번 일은 제가 책임지고 교단에 보고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제가 가야 해요.”
성전기사단의 세 단장 중 하나, 제2기사단장 모렌츠의 만류에도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망자의 부활은 교단의 성전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사건이에요. 단장 혼자서 교리의 전문가들인 본단의 주교님들을 설득할 수 있진 않을 거 아니에요.”
생과 사의 균형이 깨진다.
무명교의 성전에 명계에 대한 정보는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진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계 전체가 뒤흔들릴 수 있는 문제.
‘교단의 주교들 그리고 사제들을 움직여야 해.’
이름 없는 신과 가장 가까운 교단의 사제들이야말로 이 일에 가장 적합할 테니까.
“최소한, 제가 함께한다면 본단의 주교님들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거예요.”
“성녀님…….”
두 주먹을 불끈 쥔 성녀.
그녀를 바라보던 모렌츠의 마음속에서 경외심이 타올랐다.
곧, 클레어는 검독수리 앞에 선 진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금방 다녀올게요.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자신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그녀는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굳이 올 필요는 없다.”
“……네?”
예상과 다른 진혁의 답에, 클레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계약 해지를 하려는 건 아니죠? 저 진짜로 금방 돌아올 거거든요! 정말이거든요!”
그녀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성녀를 바라보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본단에 찾아갈 계획이다. 그때 만나면 되겠지.”
“아…… 그래요?”
클레어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진혁을 바라봤다.
“아, 그럼 그때 만나면 되겠네요! 난 또…… 그럼, 그때 봐요…….”
이내,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혁은 성녀에게서 눈을 떼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대장로, 에플리오네를 바라봤다.
“우선은 흑마력에 익숙해져야 할 거다. 요정왕의 몸에 쌓인 흑마력은 적은 양이 아니니까.”
“이미 백 년을 기다렸는데, 백 년을 또 기다리지 못할 리 없지 않느냐. 앞으로의 백 년이 기대되는구나.”
“크릉.”
진혁의 당부를 들은 에플리오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뒤에 있던 늑대인간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보다, 원하는 것은 얻은 게냐?”
그녀의 말에 진혁은 손에 쥔 낡은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보존마법으로도 모두 막아 내지 못할 만큼 기나긴 세월을 이겨 낸 고대의 유산.
“나쁘진 않더군.”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쥔 진혁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진혁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구로에 위치한 세한금속의 공장.
그곳엔, 진혁과 가까운 자들 중 가장 손재주가 좋은 존재가 자리해 있었다.
“허, 참.”
글리펜.
세한금속을 이끄는 난쟁이 사장은 진혁이 내민 낡은 두루마리를 펼쳐 보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꼬맹아, 이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냐? 근 백 년 동안은 본 적도 없는 물건인데…….”
한참 뒤에야 입을 연 난쟁이의 목소리에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혁은 그 말에 짧게 답했다.
“요정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수 뿌리에 있더군요.”
툭!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모르겠군. 세계수라고? 그럼, 이게 고대의 것이란 말이냐?”
“그럴 겁니다.”
“허, 참…… 문휘 놈도 그 귀쟁이네 나무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손에 쥔 두루마리를 떨어트린 채 진혁을 바라보는 글리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꼬맹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요정 외의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던 세계수에 발을 들이고도 모자라, 요정들이 꽁꽁 숨겨 둔 고대의 지식을 밖으로 가져왔단 이야기였으니까.
지구로 피난 온 요정들을 도운 서가의 초대 가주 서문휘조차도, 요정왕에게 선물을 받은 게 고작이지 않았던가.
“그것보다.”
하지만, 진혁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그 말에, 글리펜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트린 두루마리를 주워 펼쳤다.
“뭐, 이 고렘 말이냐?”
“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잊혀진 고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고렘.
녀석이야말로, 진혁이 뿌리도서관을 뒤져 가며 찾아 낸 가능성이었다.
‘생체끼리 결합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고렘에 붙이는 건 가능하겠지.’
사령술에서 사용하는 고렘과는 그 원리가 조금 달랐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외눈박이의 왼팔이 가진 힘을 받아 낼 만한 고렘의 동체를 제작하는 것.
이제는 잊혀진 고대의 마법을 적용한 고렘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고도의 마법과 공학기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연히 어림도 없지!”
글리펜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부분이야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여기에 부여될 고대의 마법들은 나나 우리 회사 마법사들 수준으론 건드리기도 힘들어.”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게 불쾌한 것일까, 말을 마친 난쟁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생각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군요.”
“이 정도면 평범한 고렘이 아니라 보구에 가까우니까. 최소한 을 급 이상이야. 어쩌면 갑 급에 이를지도 모르지.”
갑 급.
다시 말해, 두루마리 속 고렘은 진혁이 지닌 독립검 아스칼론과 동급의 존재란 의미.
어지간한 수준의 마법사는 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정 만들고 싶으면, 강철마탑이나 이가 둘 중 하나는 데려올 생각을 해야 할 게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긴 하다만.”
당장 진혁이 타고 온 검독수리만 해도 이가와 강철마탑의 도움으로 개발한 물건이지 않은가.
글리펜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이만한 고렘에 들어가는 마법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닐 텐데?”
“그렇긴 하겠지만.”
의아해하는 글리펜을 향해, 진혁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인천의 하늘을, 한 대의 강철 거인이 가로질렀다.
두정갑.
옛 황가였던 이가의 정예, 착호갑사대만이 사용하는 기동형 갑주.
병 급 괴수쯤은 일격에 격살시킬 수 있는 화력을 지닌 보구에 탑승한 것은, 착호갑사대의 대장인 이설화였다.
“서울에서 만나면 될 걸, 굳이 강화도까지 부르다니.”
동그란 안경 뒤로, 가늘고 길쭉한 곰방대를 문 그녀의 눈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물론, 그것이 불만의 전부는 아니었다.
‘서진혁…….’
설화를 강화도까지 불러 낸 장본인.
그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머릿속이 엉키는 것 같았다.
‘그 자식, 강해져도 너무 강해진 거 아냐?’
요정과 세계수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진혁이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갑 급의 괴수와 일 품의 격에 도달한 일본의 엽사 그리고 마인까지.
성전기사단과 세한보안 특수부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진혁이 일본의 일을 해결하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조만간 일 품에 오를지도 모르지.’
그 말은 곧, 이가와 서가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두 가문이 오랜 앙금을 씻고 다시 협력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협력이란 건 둘의 수준이 비슷할 때 성립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쩌면, 오대가문의 시대가 끝날지도 모르지.’
일 품의 엽사를 둘이나 보유한 가문.
백 년 가까이 유지되어 온 힘의 균형을 한순간에 무너트리기엔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아바마마께서 계속 혼약을 권하는 거겠지만.’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당사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라버니가 괜한 말만 하지 않았어도.’
요즘 들어 가주의 곁에서 약혼을 부추기는 오라비, 이한을 떠올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조종석에 앉은 그녀의 앞을 뒤덮은 스크린에, 목적지인 강화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일단은, 이야기 정돈 들어 봐야겠지.’
용무도 없이 부를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다.
분명, 무언가 제안할 것이 있어 그녀를 부른 것이리라.
슈우우!
그녀가 탄 두정갑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인은 목적지인 강화도의 지면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종석의 해치를 연 설화는 한달음에 아래로 뛰어내린 다음, 곧장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서진혁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 말고도 손님이 한 명 더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설화는 이내 진혁의 옆에 선 사람을 보고 눈을 슬쩍 찌푸렸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강철마탑의 상징인 은색 로브를 걸친 여인.
주가의 후계자이자 강철마탑의 부탑주, 주소영이었다.
“그러게요. 저희 둘 모두를 부를 줄은 몰랐는데.”
“양다리가 취미였던 거야?”
그녀 역시 설화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
두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진혁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보여 줄 게 있다.”
곧, 그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제법 오래되었는지, 원래 색을 잃고 갈색이 된 두루마리는 두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루마리 형태…… 게다가 보존마법을 걸었는데도 변색된 종이…….”
두루마리의 정체를 먼저 눈치챈 것은 주소영이었다.
“요정들이 보관하고 있다는, 고대의 지식인가요?”
“고대의…… 지식?”
부탑주의 말에 설화는 눈을 부릅떴다.
요정들이 오래전부터 모아 둔 수 많은 지식들 중에서도, 세계수 밖으로는 절대로 나가지 않는다는 수천 년 전의 비술들.
“아니, 세계수를 털어 오기라도 한 거야? 대체 그걸 어디서…….”
“받았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설화를 향해 짧게 대답한 진혁은, 두루마리를 묶어 둔 낡은 매듭을 풀었다.
동시에, 돌돌 말려 있던 두루마리가 아래로 풀리면서 안의 내용이 드러났다.
“이건…….”
“고렘?”
그것도, 고대의 기술로 제작된 물건.
두루마리 속 내용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소영은 물론이고, 문외한에 가까운 설화조차도 두루마리 속의 복잡한 술식들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의 제작을 의뢰하고 싶다.”
진혁의 제안을 귓등으로 흘려 버릴 만큼.
‘거절하진 않겠군.’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두루마리를 들여다보는 둘을 바라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