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거대한 그림자가 강화도를 가린 것은 한밤중의 일이었다.
희미한 초승달빛 아래로 새겨진 그림자엔 박쥐의 날개와 뱀 같은 머리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붉은 용, 멜리나.
붉은색의 비늘과는 어울리지 않게 푸른색의 머리를 단 망자의 몸엔 마법으로 강화처리가 된 두꺼운 밧줄이 묶여 있었다.
아우우, 무거워!
죽을 둥 살 둥 날개를 퍼덕이는 그녀의 아래로, 굵은 밧줄들이 바다 아래까지 주욱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
어두운 바다 아래에 잠겨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드러난 실루엣만으로도 놈의 크기를 가늠하기엔 충분했다.
이내.
쿵!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가 강화도의 해안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촉수였다.
문어나 오징어의 것처럼 수 많은 빨판이 달린 촉수는 어지간한 고층빌딩만큼이나 길고 두꺼웠다.
바다 위로 나온 것만 이 정도였으니. 저 아래 가라앉아 있는 갑 급 괴수, 흑창문어의 몸집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게, 그 괴수로구나.”
도착할 것을 미리 알고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용, 청명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놈의 거대한 촉수를 살폈다.
“이십 년 만에 나타난 해양형 괴수라니, 동족들이 보면 나자빠지겠어.”
대토벌에는 그녀를 비롯한 몇몇 용들 또한 참여했었으니, 겨우 이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기다릴 줄은 몰랐는데.”
멜리나의 등에서 내린 진혁은 해변에서 괴수의 촉수를 만지작거리는 청명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내린 잠수복 차림의 여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양형괴수가…… 정말로 나타났다니…….’
거대한 붉은 검이 틀어박힌 채 물속에 잠겨 있는 흑창문어의 사체.
살아움직이는 녀석을 직접 마주쳤음에도, 제니퍼는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악몽이었겠지만.
‘정말로, 이 자식이 애덤을…….’
자신의 남편과 동료들을 먹어치운 괴수의 그림자와, 갈라진 놈의 몸속에서 나온 결혼반지.
푸른색 마정석이 박힌 결혼반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동공은 홀리기라도 한 듯 반쯤 풀려있었다.
“옛 추억이나 떠올려 볼까 해서 와 봤노라. 그럴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만.”
말을 마친 그녀는 모래사장 위에 망부석처럼 굳은 제니퍼를 잠시 바라보고는, 진혁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운이 상했구나. 무리를 했어.”
“……조금 지쳤을 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혁의 상태는 말처럼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스칼론이 가진 힘, 적룡기와 흑마력을 함께 사용한 반동이 그의 몸을 아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아스칼론의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라. 육체뿐만 아니라, 네 영혼에까지 부담이 갈 거다.”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부담이 중첩될수록 진혁의 몸과 영혼은 지치게 되리라.
“……알고 있다.”
그 말에, 진혁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 급 괴수인 외눈박이의 팔이 가진 육체의 힘에 아스칼론이 가진 적룡기 그리고 진혁의 흑마력을 함께 섞어 쏘아 낸 기술.
일격필살의 기술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그 빈틈과 반동이 지나치게 컸다.
장기전을 기본으로 하는 사령술사의 전투와는 전혀 맞지 않는 방법.
갑 급 괴수의 왼팔을 감당할 만할 육체를, 하루빨리 찾아야 했다.
‘세계수에 가 봐야겠군.’
요정들이 에피로나에서 가져온 고대의 지식들이라면, 파슬란의 비술과 엮어 낼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제니퍼 메이슨.”
진혁이 이름을 부르자, 반지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굳어있던 제니퍼가 몸을 움찔했다.
곧, 그녀는 축 쳐진 어깨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그래,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소명 자료를 보내 주면, 협회에 전달하도록 하죠.”
남편의 죽음이 확실하게 밝혀진 순간, 진혁을 향한 그녀의 적의는 사라진 지 오래.
검은색의 푹 젖은 잠수복을 입은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짓었다.
“그보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젓고는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딱딱! 딱딱딱!
“거래를 했으니, 대금은 지불해야겠지.”
해골만 남은 망자, 스켈레톤 하나를 옆에 불러낸 진혁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시간은 지금부터 한 시간이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약속을 잊었나? 애덤 사무엘, 그와 대화할 시간을 준다고 했을텐데.”
“이 해골이, 애덤이라고요?”
놀림당하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분노로 끓어오르려 했다.
“해골은 육체일 뿐이다. 평범한 인간은 영혼을 감지할 수 없으니, 잠깐 몸을 빌려줬을 뿐.”
말을 마친 진혁은 스켈레톤을 향해 손짓했다.
스으으!
해골과 그 안의 망령을 속박하고 있던 흑마력의 일부가 진혁에게로 돌아왔다.
곧.
딱딱딱!
최대한의 자유의지를 허락받은 스켈레톤의 두 눈구멍에, 푸른색의 안광이 피어올랐다.
“그럼, 한 시간 뒤에 돌아오지.”
그 말을 끝으로, 진혁과 청명은 멜리나의 등에 타고 자리를 벗어났다.
해변에 남은 것은 제니퍼와 죽은 괴수.
딱딱딱딱!
그리고,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한 구의 해골뿐.
“……애덤, 정말 당신이야?”
제니퍼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해골을 바라봤다.
죽은 괴수를 움직인다는 서진혁의 능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것이 사람에게도 해당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혹시라도, 이게 장난이라면……!’
국제법이건 뭐건, 당장 서진혁에게 달려가 산 채로 놈을 얼려 버리리라.
하지만.
딱! 딱딱! 딱딱딱딱!
그녀의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춰선 해골이 일정한 리듬으로 턱뼈를 부딪쳤을 때.
“어……?”
제니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의 리듬.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뿐이었다.
“……애덤?”
딱딱딱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니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해골이 두 팔을 활짝 벌렸을 때.
그녀는 해골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편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음 날.
“해양형 괴수가 나타났다니, 이러면 곤란한데.”
세한빌딩의 회장실을 찾아온 장남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강진은 사진 속 거대한 문어의 사체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지?”
“저와 S급 헌터 미국의 제니퍼 메이슨, 그리고 이쪽의 용뿐입니다.”
진혁은 구경삼아 따라온 청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응, 취향이 제법 고루한 편이로구나.”
하지만 그녀는 이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둘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회장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살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진은 용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보안에 신경 쓰거라. 이 정보가 외부에 노출되면, 주식시장이 그날로 박살 날 거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미국의 헌터들도 대공황을 바라진 않을 테니까요.”
이미 미국으로 떠난 제니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만일 그녀가 모른다 해도, 미국의 헌터협회장이라면 분명히 알 것이다.
“일단은…… 해양 조사 명목으로 세한해운 소속 탐사선을 움직여야겠구나. 특수부 소속 직원들도 조금 써야겠어. 재발하기 전에 미리 놈들을 찾아내야 돼.”
순식간에 수습할 대책을 마련한 강진은 진혁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더 할 말이라도 있느냐?”
“세계수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세계수?”
진혁의 말에 회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장로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어진 그의 말에, 강진의 표정은 놀람으로 바뀌었다.
“호오, 그렇다면 다녀와야겠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정기적인 방문 행사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요정들이 가진 차원에 대한 지식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귀중하다.
세계수 밖으로 나온 극소수의 요정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은 요정족과 서가가 정기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
그 과정에서 요정들이 가진 지식의 한 조각이라도 얻어 낼 수 있다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가치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숫자이리라.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거라. 충분히 챙겨 줄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진혁은 기대감에 찬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다음, 청명과 함께 회장실을 나섰다.
“요정족이 인간을 세계수에 초청했다니, 이례적인 일이군.”
“그럴 만한 일이 있었지.”
흥미를 보이는 청명을 향해 진혁은 어깰 한 번 으쓱한 다음, 승강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내린 것은 그때였다.
“진혁 형님?”
서상혁.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마침 가던 참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예, 형님. 저도 지금 급히 아버지를 뵈어야 해서. 그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상혁이 재빨리 큰형을 지나치려던 순간.
그의 눈이, 뒤에서 따라오던 청명과 마주쳤다.
“헙.”
순간, 청명을 처음 본 상혁의 사고가 정지했다.
긴 백발을 허리 아래로 늘어트린 차가운 인상의 미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과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심장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인간.”
얼굴이 붉어진 채 석상처럼 굳어 버린 상혁.
그의 몸 속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에, 청명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상혁은 고개를 숙이고는 회장실을 향해 도망치듯 사라졌다.
“동생인가?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심장이 이토록 빠르게 뛰는 인간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순식간에 사라진 상혁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진혁은 짐작가는 부분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몸의 문제가 아닐거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정신의 문제란 게냐?”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그 말을 끝으로, 진혁은 승강기에 몸을 옮겼다.
“수수께끼를 풀기도 전에 새로운 수수께끼를 던져 주다니… 정말이지, 그대를 따라온 보람이 있구나.”
“글쎄.”
따라들어온 청명의 묘하게 신나 보이는 목소리에, 진혁은 짧게 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