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과연.’
순식간에 되살아난 갑 급 괴수, 전갈사자를 바라보던 진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놈의 꿰뚫렸던 가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메꿔져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나 있던 상처도 깨끗하게 지워졌다.
“크아아아아!”
다시 살아난 자신의 육체가 만족스럽다는 듯, 거대한 사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인간이었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괴수로 변해 버린 모습.
‘대마법진을 이용한 건가. 독특한 발상이군.’
도시 곳곳에서 솟아나는 마나의 흐름이 한데 모여 저 괴수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죽음에 이른 갑 급 괴수를 재생시킬 수준의 마나를 끊임없이 공급해 줄 수 있다는 건.
‘대마법진을 부수지 않는 한, 놈을 죽일 순 없겠지.’
그가 부리는 망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극복한 존재.
흑마력 없이 마나만으로 불사의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진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허나, 그게 전부다.
‘죽여도 되살아난다면…….’
일어서지 못할 때까지, 몇 번이고 죽여 주마.
콰아아아아아!
되살아난 사자를 향해 쏟아지는 용의 불꽃을 바라보며.
‘계획을 바꾼다.’
진혁은 품속의 통신 구슬을 꺼내 든 다음 흑마력을 불어넣었다.
곧.
네, 팀장님.
“명령이다.”
구슬 위로 떠오른 주연을 바라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
진혁이 갑 급 괴수와 전투를 벌이던 사이.
남은 토벌 2팀의 대원들과 유창 그리고 관서의 엽사 둘은 미리 세워 둔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대마법진을 유지하는 물건이란 말이지?”
성유창.
인도의 보도블럭 아래 숨어 있는 수정을 발견한 그는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곳에 박힌 것은 평범한 수정이 아니라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특수처리된 보구.
보구의 등급으로 친다면 무급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저급한 물건이었지만, 수만 개에 이르는 숫자가 문제였다.
“일본까지 와서 땅이나 팔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땅 깊숙이 박힌 수정을 뽑아내며 유창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수만 개의 수정으로 이루어진 도쿄의 대마법진을 멈추기 위해선 최소한 천 단위의 수정을 제거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삼촌, 지금 노는 거 아니죠? 한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은데.
귀에 찬 통신용 귀걸이에서 주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놀기는 무슨. 지금 막 여든두 개째 처리했다, 욘석아.”
갑 급 괴수와 싸우는 팀장님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요. 지원이 오고 있긴 하지만, 일단은 여기서 살아 나가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알았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손에 쥔 두 개의 창은 어느새 보도블럭과 아스팔트 아래에 박힌 수정을 찾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조카의 말대로, 무한히 부활하는 갑 급 괴수를 쓰러트릴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서진혁, 그자가 얼마나 버텨 주느냐가 문제지만.’
상대는 죽여도 죽지 않는 갑 급의 괴수.
그가 부리는 괴수들이 함께 싸운다지만, 분명 한계는 있을 것이다.
‘서진혁이 무너지기 전에, 마법진을 부숴야 한다.’
푹! 푸푹!
생각을 마친 유창은 양손에 쥔 창을 더욱 빠르게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는 곧 창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스으으으!
도로의 아스팔트 위로 솟아난 푸른색의 인형(人形)들.
연기로 이루어진 듯 흐릿하게 일렁이는 청색의 마네킹들이 순식간에 유창을 둘러쌌다.
놈들의 가슴에 박힌 것은, 대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수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창은 놈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이 정도 규모의 마법진에 가디언 하나 없을 리가 없지.”
동시에, 그는 양손에 든 창을 하나로 합쳤다.
철컥!
짧은 창 두 개가 3미터를 넘는 장창으로 모습을 바꾼 것은 순식간의 일.
“저 수정도 마법진의 일부일 테니…….”
몽땅 부숴 버리면 되겠어.
그가 생각을 마쳤을 때.
우우웅!
유창의 손에 들린 장창이 푸르게 빛났다.
늦은 밤, 도쿄는 때아닌 혼란에 빠졌다.
“뭐, 뭐야 이건?”
도로에서, 공원에서,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도쿄의 시민들에게, 기척도 없이 땅에서 솟아난 푸른색 인형들이 하나둘 숫자를 불려 가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공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 살려……!”
—……!
콰직!
“꺄아아악!”
다가오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듯, 주변의 사람들을 마구 도륙하는 푸른 괴물들.
“헌터, 헌터는 어디 있는 거야!”
“사람 살려!”
삽시간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가자,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사, 살려 주세요!”
푸른 인형들에게 둘러싸인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에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 한들, 대마법진의 가디언 앞에선 시체로 변해 버렸겠지만.
—……!
서서히 다가오는 푸른 인형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때였다.
서걱!
하얀 섬광과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푸른 인형들이 가로로 베어진 것은.
쨍그랑!
그들의 신체를 유지하던 수정이 깨짐과 동시에, 푸른 인형들은 모습을 감췄다.
“아, 아…….”
“괜찮으세요?”
놀라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다가간 것은, 무명교의 사제복을 입은 금발 소녀.
성녀, 클레어였다.
파앗!
주저앉은 여자를 향해 내뻗은 성녀의 손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곧, 신성력이 담긴 환한 빛을 받아들인 여자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곳은 위험하니까, 어서 피하세요.”
“감사,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허리룰 숙인 다음 어디론가 달려가는 여자.
그녀와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의 시신을, 클레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쳤다면 모를까,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낼 수는 없다.
영혼을 관장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그녀가 섬기는 이름 없는 신, 단 하나뿐이었기에.
그렇기에, 클레어는 한 사람이라도 살려 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어다녔다.
“성녀님, 이곳의 수정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녀의 호위기사 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성녀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소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씁쓸했다.
그 말에 클레어는 억지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가죠. 사람들이 더 죽기 전에 이 마법진을 부숴야 돼요.”
말을 마친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해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허나, 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뭔데요?”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기사단이 도착했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성녀에겐,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한마디.
“……이름 없는 신을 대행하는 성녀의 이름으로, 기사단에 전하세요. 지금 당장,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렌을 바라보며, 클레어는 이를 악물었다.
현재, 마법진을 구성하는 수정의 5%가량을 파괴했습니다.
“알겠다.”
통신 구슬로부터 들려온 주연의 보고에, 진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앞을 주시했다.
그의 앞에선 갑 급 괴수와 망자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쾅! 콰광!
빌어먹을, 더럽게 묵직하구먼!
속도도 만만치 않습니다.
전갈사자의 앞발과 꼬리를 성준과 자이츠가 검으로 힘겹게 막아 낸다.
그사이.
좀 죽어라, 제발!
콰르르릉!
빈틈을 노린 멜리나가 마법으로 놈의 정수리를 강타한다.
번개가 지닌 수천 도의 고열이 놈의 피부와 두개골을 손쉽게 뚫고 내부 장기에 전해진다.
직격당한다면 갑 급의 괴수도 무사하기 힘든 최상급의 전격 마법.
쿠웅!
내부가 완전히 익어 버린 전갈사자의 몸이 그대로 깨진 아스팔트 바닥 위에 쓰러진다.
허나.
우우웅!
사방에서 몰려온 마나의 흐름은 죽어 가는 괴수의 육체를 다시 원상태로 복구시킨다.
“크아아아아아!”
벌써 열세 번째.
갑 급의 괴수는 다시금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왔다.
범위를 좀 더 줄이라니까? 집중을 잘 못 해서 위력이 낮아졌잖느냐!
아니, 그러면 영감님이 직접 하라니깐?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다시 살아난 사자를 보며 티격태격대는 멜리나와 민호.
“얼마 남지 않았다. 버텨라.”
하지만, 다시 살아난 괴수를 바라보는 진혁의 표정에선 조급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성전기사단이 도착했다.’
조금 전, 성녀 클레어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
얼마나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지원이 합해진다면 도시 전체를 뒤덮은 대마법진을 무너트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카게들이 시간만 끌어 준다면…… 충분하겠군.’
주모자인 천황은 이미 빈사 상태인 데다, 천황과 협력한 마인은 그가 망자로 부활시킨 카게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승리는 저절로 진혁의 손에 들어오게 되리라.
‘과연, 너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크아아아아!”
다시 한 번 쓰러지는 전갈사자의 몸뚱이.
놈의 거체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젠장, 짜증 나게!”
미령.
여명의 심복인 그녀의 표정은 처음과 달리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휘익!
그녀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누군가 이 장면을 바라본다면, 그녀가 허공에 혼자서 채찍질을 해대는 것처럼 보이리라.
하지만.
퍼퍽!
채찍이 휘둘러진 곳에선 난데없이 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게.
보구의 힘으로 기척과 모습을 숨긴 놈들 중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정전의 바닥 곳곳엔 반투명한 시체들이 전신에 피를 묻힌 채 쓰러져 있는 상황.
허나.
“그으으…….”
“짜증 나게!”
되살아난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자, 미령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다.
‘이놈들만 아니었다면…….’
당장 이곳을 떠나 대주인 여명과 만났을 터.
그러나, 기척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들의 추격을 뿌리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대로면, 명령을 이행할 수 없어.’
미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의 처벌 따위야 알 바 아니었지만, 대주의 명을 수행하지 못했단 사실 자체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다.
“저리, 꺼져!”
촤아악!
짜증스레 휘두른 그녀의 채찍이 다시금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때였다.
―힘들어보이는데, 미령.
머릿속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대주님?’
―꽤나 곤란한 상황에 처했네. 이대로면 계획이 망가지겠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니.
당황한 그녀가 급히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그녀의 말을 단칼에 끊어 버렸다.
그럴 필요는 없어.
스으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열린 차원의 틈.
그 사이로 비집고 나온 것은,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이제, 내가 도와줄 거니까.”
여명.
검은 악귀들, 흑룡대의 주인.
척! 처척!
그를 따라 나온 검은 그림자들의 앞에 서서, 여명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