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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96화 (96/174)

96화

세한보안의 토벌본부장 서상혁.

형인 진혁과 계약을 맺은 이후에도, 그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이후로 진혁을 만나기는커녕, 연락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일.

그럼에도.

“그래 봤자지만.”

본부장실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상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가슴을 매만졌다.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맏형 진혁과 맺은 계약의 차가운 힘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마치, 심장 속에 언제든지 찌를 준비가 된 칼날을 심어 놓은 듯한 기분.

“이래서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잖아.”

그 감옥이 지구 단위로 커졌을 뿐, 할 수 있는 행동이 제한된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상대는 그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으니 어찌 보면 감옥보다 더 끔찍한 곳일지도.

“반격은 무슨, 그냥 사는 것도 벅차구만.”

괜히 진혁의 제안을 승낙했나,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옥죄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준비하는 수밖에. 이 생각도 다 읽고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자신을 들여보고 있을 맏형을 떠올리자, 그는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상혁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마디의 의지가 솟아나 그에게로 향한 것은.

누구의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맏형의 것.

‘...…형님?’

네가 할 일이 있다.

당황한 그와 달리, 진혁의 의지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할 일이라면, 뭐 말입니까?’

무혁이에게 연락해라.

‘무혁…… 형님말입니까? 무혁 형님은 무슨 일로…….’

진혁의 말에 상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일도 있었지만,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죄송한 말씀이지만, 무혁 형님과는 지금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중원 쪽으로 떠났다는 말만 들었는데…….’

물론,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으려 한 쪽에 가깝다.

지난번, 진혁을 후계자 자리에서 몰아내려던 일이 실패한 뒤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그에 대한 진혁의 답은 짧았다.

그러면, 찾아라.

‘……찾으라고요? 그 중원을 다 뒤져서요?’

중원은 드넓다.

황룡(皇龍)이 자리한 중경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나라가 제각기 경쟁을 벌이는 드넓은 대륙.

사람의 숫자만 이십억이 넘어가는 땅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일 리 없다.

찾아라, 반드시.

하지만, 진혁이 거기까지 걱정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특수부와 함께 이쪽으로 오라고 전하도록.

‘이쪽이라면.’

도쿄, 사흘 안에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라.

‘사, 사흘은 무리…….’

형의 요구사항을 듣고 놀란 상혁이 말을 더듬으며 거절하려 했지만.

진혁으로부터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한동안 죽어 나가겠네.”

얼굴을 일그러트린 상혁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특수부라면, 도움은 되겠지.’

상혁과의 통신을 마친 진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마인들을 상대하는 것뿐이라면 진혁 자신과 그의 망자들만으로도 충분한 일이겠지만.

‘장소가 문제지.’

도쿄.

일본제국의 심장.

지금은 제국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약소국이었지만, 한 국가의 수도인 것은 사실이다.

온갖 방어술법과 함정으로 가득 차 있을 게 뻔하니, 최악의 경우를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팀장님.”

주연이 좌석에 앉아 있던 진혁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그가 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주연은 손에 든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도쿄와 관동지방의 주요 엽사들에 대한 정보입니다.”

“고맙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역시, 이런 부분에선 강하단 말이지.’

그렇기에, 진혁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건네준 서류 뭉치는 제법 두터웠다.

도쿄와 관동지방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부터, 관동의 던전을 관리하는 주요 엽사들과 그들의 세력에 대한 요약.

그리고 최근 일본 왕실의 동향까지.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나가던 진혁의 눈이 멈춘 것은, 엽사들을 소개한 파트 중 어느 한 페이지였다.

‘이건 좀…… 독특하군.’

흥미를 느낀 진혁이 그 부분을 자세히 읽어 나가려던 순간.

“팀장님, 곧 도쿄역에 도착합니다.”

주연의 말이 또다시 그의 상념을 깨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일행들은 이미 준비를 끝낸 모양.

“와, 진짜 빠르다…….”

“마력부양열차는 프랑스에서도 한 번 타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탈 때마다 얼마나 신기한데…….”

그중에서도 클레어는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고작 이런 것으로 놀라다니, 하늘을 날기라도 하면 기절하겠구나.”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청명이 무심한 듯 툭 내던졌다.

그러나.

“하, 한 번밖에 안 그랬거든요?”

그 말에 클레어는 당황해 소리쳤다.

“원래 처음 해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로 성녀가 황급히 변명하던 그때.

본 열차는 곧 목적지인 도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열차의 스피커에서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한국어로 흘러나왔다.

이내, 수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던 열차가 흔들림 하나 없이 멈춰 섰다.

“그러면, 내리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진혁은 곧장 열차의 출구로 향했다.

그가 열차 밖으로 나와 플랫폼에 내려섰을 때.

‘관동의 엽사들인가.’

바깥에 도열해 있는 자들을 본 진혁은 눈을 빛냈다.

자유분방한 관서와는 달리, 하나같이 검은색 계통의 제복을 입은 자들이 절도있는 모습으로 일본도를 뽑아 든 채 줄지어 늘어선 광경은 제법 봐줄 만했다.

그리고.

“도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진혁 님.”

그 사이로 나타난 검은 머리의 미인.

일본의 2인자. 총리대신 시즈노 마사코가 손을 내밀었다.

진혁은 그 손을 맞잡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착각이 아니군.’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기의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도쿄에서의 일정은 오사카에서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환영 행사를 진행하고, 만찬에 참석하고, 휴식을 취하고.

관서와 조금 다른 점이 눈에 띈 것은,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여기가, 황거인가?”

차에서 내린 진혁은 주변을 둘러싼 높은 성벽을 둘러봤다.

황거(皇居).

스스로를 천황이라 칭하는 일본의 왕과 그 일족들이 거주하는 성.

‘영토 대부분을 잃어버린 나라의 왕에게 붙일 칭호라기엔 너무 과하지.’

진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다. 천황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시죠.”

“그러지.”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에 낼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지만.

앞서 내린 마사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황거의 중심인 정전으로 향했다.

“천황께서 계십니다. 무기를 반납해 주시죠.”

정전의 앞을 지키던 궁의 경찰들이 진혁의 등에 걸린 장검, 아스칼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마사코는 손을 내저었다.

“이미 폐하께 허가받은 사항이다. 물러나도록.”

“예, 예.”

서릿발처럼 차가운 그녀의 말투와 기세에 압도된 경찰들이 얼어붙은 몸을 움직여 길을 열었다.

곧, 정전에 들어선 두 사람은 이 궁궐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흰색 정장을 빼 입고, 구시대의 유물인 외알 안경을 한쪽에 낀 중년의 남성.

세기에서 곧장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 고풍스러운 스타일을 입고 있지만, 진혁은 곧장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구로군.’

그것도, 제법 상급의 보구다.

눈에 낀 외알 안경부터 손에 쥔 지팡이와 앉아 있는 의자 그리고 신고 있는 검은색 구두까지.

그가 입고, 신고, 앉아 있는 모든 것에서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한 번 망했다지만, 한때는 제국이었다는 건가.’

생각만으로 망령과 망자들을 불러낼 수 있는 진혁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위기상황에 한 몸 지키기엔 충분한 수준이리라.

“서진혁입니다.”

“그대의 이름은 이미 들어 알고 있소. 관서의 역도들을 도와줬다지.”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외알 안경 뒤로 보이는 남자의 눈은 웃지 않았다.

“뭐, 그건 상관없는 일이지. 어찌 되었건 지금은 우리의 손님이니.”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는 표정을 풀고는 미소를 지었다.

진혁은 입을 열었다.

“저를 보고 싶어 하셨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실, 그대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이유가 먼저였소. 고베로 몰려드는 괴수들을 홀로 막아 낸 강자라니, 당연히 흥미 있을 수밖에.”

그 말과 함께, 일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진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흠…….”

이내,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나를 도와 관서의 역도들을 토벌해 줄 수 없냐고 부탁하기 위함이었소.”

“어려운 부탁입니다.”

“직설적이군. 무례하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어.”

진혁은 단칼에 거절했지만, 왕은 그런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어려운 일이란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 만약 승낙한다면 그만한 보상을 제공할 생각이오.”

“보상이라면.”

“곧 되찾게 될 큐슈의 개척권과 괴수의 토벌권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소만. 기간은 십 년 정도.”

분명, 거대한 이권이다.

이미 괴수로 뒤덮인 거대한 섬을 개척하고, 그 안의 괴수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는 것.

괴수들에게서 나올 어마어마한 양의 부산물과 되찾은 큐슈를 개발하면서 나올 이익은, 어지간한 국가의 한 해 예산과 맞먹을 것이다.

물론.

“……말만 들으면 이미 토벌을 끝내기라도 한 것 같군요.”

토벌이 실제로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였지만.

“……관서의 역도들을 몰아내고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만 있다면, 어려울 건 아무것도 없소.”

진혁의 비꼬는 듯한 말에 일왕은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대가 조금만 힘을 실어 줄 수 있다면,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하도록 하지. 어떻소?”

남자는 말을 마치고는 또다시 진혁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반짝이는 눈빛.

허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만간 다시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진혁의 대답을 들은 일왕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진혁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자, 잠깐…….”

옆의 마사코가 당황한 말투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진혁은 일왕을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누군가가 안내하기도 전에 궁을 떠났다.

곧, 그는 총리대신이 미리 준비해 둔 황거 근처의 호텔에 들어섰다.

“아, 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마주친 것은 시마즈 가문의 후계자, 시마즈 카스미.

지난밤의 일이 생각난 것인지, 그녀는 뜨거워진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도망치듯 움직였다.

“일왕이 그러더군.”

진혁이 무어라 말하기 전까지는.

“너희를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 달라고.”

순간.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카스미가 뚝, 하고 멈춰 섰다.

“……그게, 무슨 소리죠?”

붉어진 얼굴로 진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공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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