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오사카.
그중 일본헌터성의 본부가 자리한 우메다는 때아닌 축제 분위기로 시끌벅적했다.
“한국 엽사 만세!”
“서진혁 만세!”
“혈마검 만세!”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짖는 대로.
그 사이를, 진혁과 토벌 2팀을 태운 퍼레이드 차량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와…… 이런 건 저희 본단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요.”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던 클레어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호위기사인 렌의 반응은 달랐다.
“조심하십시오, 성녀님. 노출되어 있어 위험합니다.”
혹시라도 수상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쉴 새 없이 살폈다.
“그치만, 저 사람들 전부 신나 있는걸요? 별일 없지 않을까요?”
“별일이 있더라도 제가 막아 낼 겁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 조심할게요. 그러니까 목숨까지는…….”
렌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 하자, 클레어는 울상을 지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둘을 진정시킨 것은 진혁의 한마디였다.
“누가 뭘 어떻게 하건, 그 전에 내 망자들이 움직일 테니까.”
“크으으.”
“키이이!”
딱딱딱!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차량의 앞뒤에서 걷던 식귀와 용, 스켈레톤킹이 포효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오오!”
“멋있다!”
“역시, 갑 급 괴수와 싸울 만해!”
“만세!”
그 모습이 믿음직하게 보였는지, 주변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생전에도 퍼레이드는 해 본 적 없었는데, 이런 기분이었군요.
나를 반겨 주던 영지민들이 생각나는구려. 이제는 다들 죽었겠지만 말이오.
자신들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성준과 자이츠는 과거를 곱씹었다.
키메라의 몸을 차지한 두 영혼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아 몰라, 귀찮아. 빨리 집에나 가요, 주인. 푹 쉬게.
이미 죽은 주제에, 쉬긴 뭘 쉬어? 네 대가리로 마법의 기초부터 다시 배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알아?
아니,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자꾸!
그래서, 최상급 마법은 쓸 줄 알고? 내가 네 마법만 보면 속이 터진다, 터져!
한 몸뚱이 속에서 티격태격 싸우는 두 망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혁은 얼마 남지 않은 퍼레이드의 종점을 바라봤다.
그곳엔, 모리와 시마즈의 당주를 포함한 일본의 주요 엽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할 시간이군.’
나라를 구해 준 대가를 받을 시간.
최소한, 고베에서 잡은 괴수들의 사체 정도는 받아 내야 수지가 맞았다.
‘그 외에, 다른 걸 더 얻어 내야겠지만.’
진혁이 그들을 바라보던 사이.
끼이익!
퍼레이드 구간을 지난 차량이 자리에 멈춰 섰다.
곧이어, 차량에 타고 있던 진혁과 일행은 차량 옆의 계단을 타고 바닥에 내려섰다.
“정말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관서지방은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 진혁이 내리자마자 모리 가이스케가 다가와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관서 전역이 괴수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을 뒤집어놓았으니, 가이스케의 기쁨이 얼마나 클지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럼, 이제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
“마무리라면……?”
상대가 다짜고짜 내뱉은 첫 마디에, 활짝 웃던 가이스케의 입꼬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진혁은 말을 이었다.
“일을 시켰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가이스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협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혁과 토벌 2팀이 고베에서 보여 준 활약은, 일본의 엽사들이 함부로 움직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화려했으니까.
그런 자를 돈 몇 푼 때문에 적으로 돌린다는 건 정말로 멍청한 짓이다.
‘나쁘지 않군.’
그렇기에, 헌터성의 본부를 빠져나온 진혁의 표정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가 얻은 것은 고베에서 죽은 괴수들의 사체 전부와 일본에서 지원해 준 보구들의 소유권.
하나하나는 변변치 않은 것들일지 몰라도, 그 숫자가 수천에 이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침 항구가 있으니, 세한해운에 화물선을 보내 달라 해야겠어.’
망자로 만들어도 좋고, 팔아서 자금을 조달해도 나쁘지 않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일본에서 거둔 수익은 예상치을 넘어섰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진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그는 어느새 숙소인 호텔에 도착했다.
관서헌터성의 본부와 인접해 있는 시마즈 가문 소유의 특급호텔.
오사카로 돌아온 진혁 일행을 위해 시마즈 가문은 한 층 전체를 방으로 사용하는 32층의 펜트하우스를 통째로 내어주었지만.
삑!
엘리베이터에 탄 진혁이 누른 버튼은 숙소와 다른 곳이었다.
―27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진혁은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시마즈 카스미.’
진혁이 숙소가 아닌 이곳에 도착한 이유.
‘할 말이 있어요.’
‘뻔한 이야기겠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을 떠올린 그는 코웃음 치고는 약속한 객실로 향했다.
누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방문은 잠겨 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화이트톤의 깔끔한 스위트룸.
특급호텔답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자재들로 만들어진 가구와 소파, 작은 탁자가 스위트룸의 거실을 채우고 있다.
‘저건…… 향초인가.’
탁자 위 불붙은 향초에서 나는 기묘한 향.
거기에, 방 전체에서 풍기는 마나의 향기.
‘함정인가.’
위험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진혁은 슬며시 흑마력을 끌어 올리면서, 자신을 초대한 시마즈의 후계자를 찾았다.
“오셨군요.”
기다렸다는 듯, 카스미가 옆의 침실에서 걸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
새하얀 가운을 몸에 걸친 그녀의 얼굴은 옅게 붉어져 있었다.
카스미의 입에서 풍기는, 포도와 알코올이 뒤엉킨 향기.
진혁은 곧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취했군,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진 사람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진혁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하지만.
“할 말이 있긴 하지만…… 그 전에.”
정말로 당황스러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스르륵!
카스미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묶인 가운의 벨트를 당겼다.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린 가운 아래로 가녀린 육체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런 거였나.’
카스미의 의도를 읽은 진혁은 순간 한심한 눈빛으로 눈 풀린 그녀를 바라봤다.
탁자 위에서 오묘한 향을 풍기는 향초도, 방에 가득 찬 마나도 욕망을 자극시키는 술법의 일종일 터.
아마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의도에 쉽게 걸려들었으리라.
그 상대가, 진혁이 아니었다면.
“다음엔 제정신으로 만났으면 좋겠군.”
쾅!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진혁은 몸을 돌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
털썩!
취한 카스미는 말없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숙소로 돌아온 진혁을 가장 처음 맞이한 것은 청명이었다.
“재미있어 보이더구나.”
진혁의 무심한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미소는 장난기로 가득했다.
“보고 있었나?”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고,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리는 걸 어찌 하겠느냐.”
말을 마친 그녀는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찾은 듯 작게 키득거렸다.
“팀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용과 진혁의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챈 주연이 다가와 물었다.
소파에 앉아 야키소바 빵을 뜯고 있던 클레어와 렌 역시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봤다.
그 말에, 청명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건물의 후계자가 생식 행위를 시도하더구나.”
순간.
“콜록! 콜록!”
“성녀님!”
놀란 클레어가 사레라도 들린 듯 연거푸 기침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야키소바 빵이 소파 아래 카펫에 떨어졌다.
“생식…… 행위?”
다른 두 명도 당황해 얼음처럼 굳은 것은 마찬가지.
“제법 지독한 술법이라 거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더 의지력이 강한 모양이야. 과연.”
쿵.
말을 마친 청명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네 사람의 표정을 살핀 다음,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급히 물을 들이켜는 클레어와 석상처럼 얼어붙은 두 사람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진혁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주연이었다.
“……팀장님, 혹시.”
“아무 일도 없었다. 가서 쉬도록.”
그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주연의 말을 단칼에 쳐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역시, 서가의 핏줄은 달라도 뭔가 다르단 말야.”
거실 옆 복도에서 등을 기댄 채 엿듣고 있던 유창이 진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
그 말과 함께 진혁은 그를 본체만체하며 스쳐 지나갔다.
“물론, 할 말이야 많지.”
하지만.
“예를 들자면…… 도망친 외눈박이의 위치를 찾는 방법이라든가.”
유창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혁이 몸을 돌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창은 씨익 웃었다.
“그럼, 얘기를 계속해 볼까?”
곧.
그의 입에서,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하나둘씩 풀려났다.
시모노세키.
파괴되고 버려진 도시의 빌딩 사이로 을씨년한 바람이 불었다.
새로운 주인이었던 괴수들도, 전 주인인 인간들도 보이지 않는 고요한 도시에 존재하는 자는, 단 하나였다.
“외눈박이 놈, 생각보다 너무 빨리 물러났어.”
여명.
마기를 몸에 받아들인 인간, 마인 중에서도 강자에 속하는 존재.
파괴된 성벽에 걸터앉은 그의 시선은, 버려진 도시와 그 너머의 평야로 향해 있었다.
얼마 전까지 괴수들로 가득했지만, 곧 인간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터.
제법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관서지방을, 나아가 일본 전체를 서진혁과 함께 지워 버리겠다는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스으으!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의 잔해가 타원형으로 뭉쳐졌다.
마치 거울처럼 생긴 마기 덩어리의 한쪽 면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대주님.
여명의 심복, 미령.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그녀의 옷차림은 이전과 달리 화려했다.
얼굴 또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어떻게 되고 있어?”
일왕(日王)이 참여 의사를 밝혔습니다.
“좋아, 좋아. 아주 잘했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대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어디…… 인간 상대로는 얼만큼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진혁아.”
서진혁을 떠올린 그의 한쪽 입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