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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93화 (93/174)

93화

‘강하다.’

검을 부딪친 순간, 성준은 상대의 강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갑 급 괴수, 외눈박이.

생전에도, 사후에도 만나 본 적 없는 괴수의 강함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쾅! 쾅! 콰광!

힘, 스피드, 기술.

둔해 보이는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상대는 셋 중 어느 하나도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콰르르릉!

간혈적으로 하늘의 멜리나가 강력한 번개와 불꽃을 쏘아내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이미 자신과 자이츠는 놈의 곤봉에 산산조각 났으리라.

놈의 뒤에서 쌍창을 쥔 채 빈틈을 노리고 있는 성유창 역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대론…….’

진다.

상대의 압도적인 전투력 앞에서, 그의 마음은 서서히 지쳐 갔다.

영원히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것이 망자라지만, 애당초 낼 수 있는 출력 자체가 다른데 싸움이 성립될 리 없지 않은가.

이대로 가면,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패배하게 되리라.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

―생각보다 만만치 않구먼. 부디 주인의 의도가 먹혀들어야 할 텐데.

채챙!

외눈박이가 휘두르는 곤봉을 힘겹게 막아 낸 자이츠가 중얼댔다.

이미 힘의 우열은 가려졌다지만, 그들에겐 해야 할 임무가 남아 있었다.

그들의 주인, 진혁의 계획이 실행될 때까지 버텨 내는 것.

‘그전에는, 쓰러질 수 없다.’

놈과 검을 마주할 때부터 수백 번이고 새겨 왔던 다짐을 되뇌며, 성준은 다시금 검을 쥐었다.

스으으으!

강력한 흑마력이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이건…….’

등을 돌려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 지구에서 흑마력과 망령을 다룰 줄 아는 사령술사는, 그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진혁 님.’

그의 주인, 서진혁.

―끼히히히히!

―꺄하하하!

그의 명령을 받은 검은 망령들이 귀곡성을 내지르며 외눈박이를 사방에서 감싸 안았다.

―……느려졌군요.

―저게, 주인의 계획인 듯하군.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검은 망령들에게 둘러싸인 외눈박이의 몸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 정도라면.

‘검이, 닿을지도.’

주인의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직감에, 성준은 재빨리 검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받아라.

주인, 진혁의 명령.

그와 동시에.

쐐애애액!

그의 등 뒤로, 무언가가 공기를 찢으며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식귀는 검을 손에서 내려놓고는 날아오는 무언가를 재빨리 낚아챘다.

투구 속에 든 그의 시선이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건.’

그 정체를 마주한 성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스칼론?’

검신과 손잡이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검.

그 모습은 분명 갑 급 보구인 독립검 아스칼론과 같았지만.

‘크기가…… 달라.’

인간 크기에 맞춰져 있던 아스칼론과 달리,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식귀의 몸에 맞추기라도 한 듯 전봇대처럼 거대했다.

물론,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베어라.

뒤이어 진혁의 명령이 보내진 순간.

―네.

타앗!

성준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우우웅!

손에 들린 검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미증유의 힘이 저절로 오러처럼 검신을 감싼다.

등에 부스터라도 달린 듯, 외눈박이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그의 몸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외눈박이의 빌딩처럼 거대한 몸뚱이가 눈앞에 이르렀을 때, 성준은 확신했다.

타아앗!

힘을 주어 바닥을 구른 그의 몸이 높이 떠오른다.

놀란 외눈박이가 뒤로 몸을 빼려 하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느려져 있다.

이내, 성준의 손에 들린 붉은 검이 가볍게 휘둘러진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을 타고 전해지는 서늘한 감각이 그의 영혼을 깨운다.

쿵!

멀어진 거인의 몸과, 바닥에 떨어진 거대한 왼팔.

‘되었다.’

괴수를 저주하던 망령이 마음속 원한의 일부를 지워 내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걱!

낯설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외눈박이는 너무나 생소했다.

어깻죽지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과 고기 자르는 것 같은 서늘한 소리.

그리고 왼팔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허전함.

생소한 감각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거대한 팔을 발견했을 때였다.

‘아.’

이게.

팔이 잘리는 느낌이구나.

외눈박이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푸학!

그의 잘려 나간 왼팔에서 검은 피가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몰려오는, 생살을 찢어내는 극통.

“피해 내진…… 못했군.”

빈혈로 가물가물한 시야 속 왼팔을 내려다보며.

“크흐흐…… 크흐흐흐…….”

외눈박이는 웃었다.

“크하하, 크하하하하하하!”

슬픔이나 두려움 따위는 한오라기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기쁨의 광소(狂笑)가 도심을 쩌렁쩌렁 울렸다.

꺄아아아!

끼이이이이!

웃음소리에 담겨 있는 진한 마기가 순식간에 몸을 붙잡고 있던 망령들을 주변으로 밀쳐 냈다.

자유를 되찾은 외눈박이의 얼굴에 기쁨의 꽃이 피어났다.

“정말이지…… 이게, 얼마 만인지.”

아니, 처음이다.

수백 년의 삶을 통틀어, 팔은커녕 제대로 된 부상조차 입을 일이 없었던 그에겐 정말로 낯선 경험.

그래서, 기뻤다.

아직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 애송이를 살려 둔 게…… 이런 즐거움으로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렇기에.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한 번 더, 이 짜릿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조금 더, 즐길 준비를 해 둔 다음에.

“다음에 보자, 애송이.”

거인이 남은 왼팔을 휘젓자, 허공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더니 옆으로 벌어졌다.

빌딩 하나쯤은 손쉽게 집어넣을 크기의, 검게 빛나는 차원의 틈.

끼이이이이!

물러났던 망령들이 다시금 외눈박이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차원의 틈을 통과하고 있었다.

“부디, 강해지거라.”

내 마지막 즐거움을 위해서.

틈 사이로 보이는 진혁의 모습을 보며, 외팔의 거인은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고베를 향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던 괴수의 물결은, 썰물처럼 도시와 항구를 빠져나갔다.

“키이이이이!”

“크아아아!”

명령을 내리던 갑 급의 괴수가 모습을 감춘 순간, 그들 또한 명령을 지킬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

‘우선은…… 끝났군.’

달려들 때와 달리 허둥지둥 등을 돌려 달아나는 괴수 무리를 바라보며, 진혁은 비틀거리는 육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확실히…… 효율은 좋지 않아.’

영지의 사령수들로부터 많은 양의 흑마력을 꾸준히 공급받고 있던 그였지만, 수많은 망령을 이용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저주의 술법은 어마어마한 양의 흑마력을 단번에 소모시켰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데다, 즉각적으로 분명한 효과를 내는 술법을 부리기 위한 대가.

‘이 정도면…… 두 시간은 필요하겠어.’

그나마, 며칠씩 앓아누웠던 과거에 비해선 회복이 빨라졌단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직은 실전에서 한 번 이상 사용할 수 없겠어.’

영지가 커지고 사령수의 숫자가 늘어나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전까지는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끄, 끝난 거예요?

통신 구슬에서 반쯤 죽어 가는 클레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기절해 버릴 듯,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왔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들이 물러나고 있다. 일단은 상황이 끝난 것 같군.”

―그럼…… 저…… 좀…… 쉬어도 되죠……?

털썩!

―……성녀님께선 깊은 피로 때문에 잠에 드셨습니다. 일단은 그곳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에 이어, 그녀의 호위기사인 렌 슈미트가 통신을 이어 받았다.

“그러도록. 부팀장과 아라길드장도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후, 정말이지 죽을 뻔했군. 지난번 상대했던 놈과는 힘 자체가 달라. 일단 그쪽으로 가지.

두 남녀의 눈에 띄게 지친 목소리를 끝으로, 앞주머니에 걸어 둔 통신 구슬의 찬란한 빛이 모습을 감췄다.

“놀랍구나.”

가만히 서서 흑마력을 회복하던 진혁을 향해 청명이 말을 걸었다.

“기습에 아스칼론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우두머리 중 하나의 팔을 잘라 낼 줄이야. 생각 이상이었다, 인간.”

“그럼, 이제 수수께끼는 풀린 건가?”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 둘 생각이다. 언젠가는 풀리겠지.”

“즐거움이라, 외눈박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군.”

“나를 저 저열한 괴수와 비교하는 게냐?”

진혁의 말을 들은 청명은 언짢은 티를 냈지만, 진혁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는 그의 앞에 일직선으로 난 도로를 바라봤다.

쿵! 쿵! 쿵! 쿵!

그 위로, 세 망자와 한 사람이 진혁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진혁 님, 가져왔습니다.

순식간에 역 정문에 도착한 성준이 왼팔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왼팔에 들린 물건을.

진혁의 시선이 식귀의 왼손에 들린 물건에 고정되었다.

‘외눈박이의 팔……이라.’

갑 급 괴수의 육신.

얻어 낸 것은 고작 팔 하나뿐이었지만, 분명 강력한 망자들을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어떻게 쓸지는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언젠가, 외눈박이와는 다시 마주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다음엔, 놓치지 않는다.’

차원의 틈 너머로 사라지던 외눈박이를 떠올린 진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계약을 끝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군.”

그의 상념을 깬 것은 입맛을 다시는 유창의 목소리였다.

“목숨을 건져 돌아갔으니, 다음번엔 대비책을 마련해 놓을 거야. 다른 방법을 준비해야 할걸?”

“그건 내가 할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조언 정도는 들어 두는 게 좋을 텐데? 특히, 직접 무기를 맞대 본 사람의 조언은.”

“다음에.”

유창이 유들유들한 말투로 자극했지만, 진혁은 단칼에 거절하고는 앞주머니에서 통신 구슬을 뽑아 흑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앗!

곧, 손톱만 한 구슬 위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화면 속에 비친 것은, 거대한 금속제 투구와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

모리 가이스케였다.

―어, 어떻게 된 거요? 괴수들이 물러나고 있는데…….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은 짧게 답했다.

“갑 급 괴수를 격퇴했다.”

―갑, 갑 급 괴수를…… 그렇다면…….

“아마도,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진혁의 마지막 대답이 통신 구슬 너머로 전해진 순간.

―와아아아!

통신 구슬로부터, 거대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서, 서진혁 씨.”

누군가가 진혁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진혁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허리에 검을 찬 여자가 서 있었다.

시마즈 카스미.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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