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약속보다 일찍 왔군. 저녁 식사 준비도 안 끝났는데.”
등에 두 개의 창을 멘 채 나타난 사내.
고베역에서 아라길드의 길드장, 성유창을 마주한 진혁은 말과 달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유창 역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기다리고 있으려니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우리 주연이 얼굴도 본 지 오래됐고 말야.”
“지금은 업무 중입니다. 직함으로 불러 주시죠.”
“예, 예, 부팀장님. 쌀쌀맞기는.”
그는 정색하는 주연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고는, 진혁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갑 급 괴수가 상대라면 나 혼자 와도 될 거 같지 뭔가. 그래서 곧장 내려왔지.”
“혼자?”
“상대가 갑 급이면 삼 품 수준이어도 고기방패나 하는 게 고작이야. 그 아래는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하지. 놈을 잡으려면 소수의 강자들이 필요해.”
과거의 일을 떠올린 걸까.
말을 마친 유창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하지만 진혁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놈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오직, 외눈박이를 토벌하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몰라.”
유창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을 들은 진혁의 눈꼬리가 슬쩍 휘었다.
“같은 갑 급 괴수라 하더라도 생김새나 형태, 사용하는 능력 모두 큰 차이가 있으니까. 외눈박이라고 했나? 내가 만나 본 녀석은 아니니, 제대로 된 정보가 있을 리도 없지.”
“그럼, 굳이 불러낼 필요도 없었겠군.”
예상과는 다른 유창의 이야기에 진혁은 이마를 찌푸렸다.
허나.
“그래도…… 놈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지.”
유창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통점?”
“일단, 놈들은 말을 할 수 있어. 인간의 말을. 생긴 건 완전히 딴판이지만, 하는 행동도 인간과 거의 비슷하지.”
“그 말은.”
숨어 있는 의미를 눈치챈 진혁의 말에 유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나 무기도, 인간처럼 사용한다는 뜻이지. 그것도 아주 강력한 출력으로.”
마수는 인간보다 용에 가까운 존재다.
용이 용심에 가득 담겨 있는 마나로 마법을 사용하듯, 괴수는 마정석의 마기를 뽑아내 특수한 능력을 사용한다.
그것이 갑 급의 괴수라면, 출력만큼은 용에 뒤지지 않을 터.
분명, 쉽지 않은 상대일 것이다.
“까다로운 상대군.”
그 말이, 승리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지만.
“감상은 그게 다인가?”
“계획을 바꿀 정도의 변수는 아니니까. 아, 계약대로 당신도 도와줘야겠어.”
“설마, 가서 놈과 맞서 싸우란 건 아니겠지?”
“두려운가?”
“전혀.”
단칼에 답한 유창이 장난스런 미소를 짓자,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자세한 계획은…….”
그때.
―저기요!
정장의 앞주머니에 달아 둔 손톱만 한 통신 구슬로부터, 피로에 찌든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엄청 큰 거인이 성역을 뚫고 들어오고 있거든요! 쟤도 괴수…… 아닌가?
순간.
클레어의 말을 들은 진혁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곧, 그의 시선이 앞에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창에게로 향했다.
진혁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가면서 설명하지.”
진짜가 시작됐으니까.
괴수의 목적은 단 하나다.
마기를 가지지 않은 생명체를 모두 지워 버리고, 세상을 괴수로 가득 채우는 것.
괴수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 목적만은 괴수들의 머릿속 본능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고도의 지성을 가진 갑 급의 괴수조차도, 그 본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후우…….”
신성력.
도시 사방에 퍼져 있는 저주받을 힘이 피부를 자극할 때마다, 외눈박이는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눌렀다.
괴수의 정점에 선 그에게 갑자기 인류에 대한 자비심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본능에 취하면 일을 못 하지.’
이성에 기초한 좀 더 효율적인 살육.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본능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작은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수준의 신성력에 분노해 미리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쿵! 쿵!
어지간한 빌딩 크기의 몸집을 가진 거인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도시가 흔들렸다.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주색 곤봉을 축 늘어트린 거인이 향한 곳은,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고베역.
‘분명, 놈은 거기 있겠지.’
과연, 그때의 애송이는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호승심이 끓어 오른다.
입에는 군침이 돌고 심장의 박동은 서서히 속도를 높인다.
지금껏 만나 본 적 없는 유형의 상대였기에, 그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나를, 즐겁게 해 다오.’
기대감과 증오, 분노와 설렘이 마구 섞여 뒤틀린 미소를 자아냈다.
고오오오!
하늘로부터 분명한 존재감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거인의 외눈이 본능적으로 강력한 힘을 좇아 움직였다.
곧, 그의 눈에 붉고 푸른색의 파충류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용……인가.’
하지만, 몸통과 달리 머리는 천둥비룡의 것.
용도, 비룡도 아닌 이상한 모습의 괴수를 마주한 외눈박이는 흥미로운 듯 외눈의 꼬리를 치켜올렸다.
이윽고.
우우우웅!
용의 몸을 가진 비룡의 입으로부터, 희고 푸른빛이 번쩍였다.
수 초가 지나기도 전, 빛은 백염(白炎)과 청뢰(靑雷)로 모습을 바꿨다.
“호오.”
번개와 불덩이에 담긴 거력을 느낀 외눈박이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용을 바라보던 그 순간.
콰아아아아!
용의 입에서, 푸른색 스파크로 감싸진 백색의 화염이 길게 쏘아져 나갔다.
닿는 것만으로 강철을 녹이고 건물을 무너트릴 힘이 담겨져 있는, 용과 비룡의 권능이 뒤섞인 숨결.
직격당한다면 아무리 갑 급의 괴수조차도 무사하기는 힘들 위력이었지만.
후웅!
도망치는 대신, 외눈박이는 불꽃을 향해 자줏빛 곤봉을 내리쳤다.
마기를 담뿍 머금은, 전봇대만 한 크기의 곤봉이 화염과 맞닿았다.
그리고.
화르륵!
화염 줄기는 곤봉을 녹이는 대신, 반으로 갈라져 주변의 건물로 향했다.
쿠르르릉!
고열을 견디지 못한 빌딩들이 하나둘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자리한 외눈박이에게는 어떠한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곤봉이 달아올라 붉은빛을 띤 것 외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 더 보여 봐라, 애송이.”
이 나를, 만족시켜 봐라.
화염을 몽땅 쏟아 낸 용을 올려다보며, 외눈박이는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고베역.
“시작이군.”
멜리나가 쏘아낸 화염이 지상을 불태우는 것을 확인한 진혁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빌딩 사이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스켈레톤 킹과 식귀가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피부가 없어서 그런가, 뼈마디가 쑤시는구려. 빨리 좀 보내 주시오, 주인.
성준과 자이츠.
눈은 없지만, 외눈박이가 용의 숨결을 가르는 장면을 본 망자들의 안광은 호승심으로 시퍼렇게 빛났다.
‘목표를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오, 힘줄쯤은 단칼에 끊어 낼 테니!
진혁의 허락을 받자마자, 스켈레톤 킹과 식귀가 빌딩 숲 사이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두 망자의 손에 들린 것은, 각각 화염과 냉기를 뿜어내는 거검.
흑마력과 뒤섞여 어두운 빛을 내뿜는 화염과 냉기의 오러는 갑 급 괴수의 가죽을 가르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크으으!”
딱딱딱!
말 대신 포효하며 달려드는 망자들의 목표는, 거인의 발뒤꿈치와 그 아래 숨어 있는 힘줄.
끊어 낼 수만 있다면, 외눈박이는 육중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리라.
진혁과 망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공략방법이었다.
그러나.
채채챙!
계획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빠르군요.
―이거…… 좀 더 진지해져야겠어.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몸놀림.
순식간에 두 망자의 검을 곤봉으로 쳐낸 외눈박이가 건물 사이로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제법이긴 하다만, 생각보단 손맛이 별로구나.”
두 망자를 내려다보는 괴수의 눈에 담긴 것은, 실망과 아쉬움.
그의 시선이, 진혁이 자리한 고베역으로 향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도시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과 함께.
팟!
거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내.
콰아아앙!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외눈박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식귀와 스켈레톤 킹의 앞에 나타난 거인의 곤봉을 막아 낸 것은, 두 자루의 검.
“크으으…….”
딱, 딱딱!
간신히 막아 내기는 했지만, 두 망자가 힘을 합쳤음에도 검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외눈박이는 씨익 웃었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쾅! 쾅! 콰앙!
그의 손에 들린 자줏빛 곤봉이 굉음과 함께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곤봉을 막아 내는 두 망자는 조금씩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채챙!
“호오, 벌레 한 마리도 같이 있었군!”
뒤에서 기습한 성유창의 공격까지 유유히 막아 낸 외눈박이는 곤봉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콰르르릉!
하늘에서 수십 개의 번개가 떨어지고, 불기둥들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중 거인이 휘두르는 곤봉을 뚫고 상처를 입힌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게, 너희의 전부인 것이냐? 조금 실망스러운데.”
호승심으로 가득 찼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 갔다.
챙! 채챙!
―한 사람과 세 망자의 협공 속에서도 외눈박이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법을 그따위로 쓰니 효과가 없지! 9의 허상 속에 1의 진짜를 섞으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잘 알면 영감이 몸뚱이 구해서 쓰든가!
―뭬, 뭬야?
‘슬슬…… 준비가 되었군.’
멜리나와 도민호.
한 육체에 든 두 망령이 티격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진혁은 품속에 넣어 둔 영혼 구슬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이 품과 일 품 사이의 수준에 올라서 있는 망자들만으로 갑 급 괴수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스칼론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아직 남겨 두긴 했지만, 그 역시 완벽한 해답은 아니다.
부족한 한 조각을 채워 줄, 괴수에게 빈틈을 만들어 줄 찰나의 힘.
“망령이여.”
진혁이 노린 것은, 바로 그 한 조각을 끼워 넣을 타이밍이었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너희의 원한을 내게 위임하라.”
영혼구슬 속 망령들이 증오하는 대상은 괴수.
그중 정점에 선 갑 급 괴수가 상대라면, 망령들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스으으으!
구슬을 빠져나온 수많은 망령들에게, 흑마력의 검은빛이 덧씌워졌다.
칠흑처럼 검은 빛을 띤 망령들 수백이 마치 병사들처럼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섰다.
이윽고.
“가라.”
진혁이 나직하게 명령을 내린 순간.
―키히히히!
―꺄하하하하!
들리지 않는 귀곡성과 함께, 망령들이 그물처럼 줄지어 나아갔다.
그들의 적.
갑 급 괴수, 외눈박이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