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91화 (91/174)
  • 91화

    전투의 시작을 연 것은 무명교의 성녀, 클레어였다.

    “이름 없는 신이시여, 당신의 가호가 이 땅에 바로 서리니…….”

    어느 빌딩의 옥상.

    사제복을 갖춰 입고 선 클레어의 입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파아앗!

    회색의 광휘가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이름 없는 신이 가진 고유한 힘, 신성력.

    그녀의 노래가 이어질수록, 퍼져 나간 신성력이 서서히 거대한 도시를 회색으로 물들여 갔다.

    그녀가 부르는 성가는 수호의 성가.

    본디 신성력을 두텁게 쌓아 수호 결계를 만들어 내는 신법이었으나, 지금은 이름 없는 신의 힘을 최대한 넓게 퍼트리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아아아아!

    신성력을 상당히 소모했음에도, 클레어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고베 전역에 이름 없는 신의 광휘를 덧씌우는 것.

    수십 제곱킬로미터의 영역에 신성력을 흩뿌리는 것은 아무리 성녀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효과는 분명했다.

    “크으으……?”

    “키이이!”

    마기를 다루는 괴수는 신성력을 거부한다.

    사람이 더러운 오물을 피해가듯, 그 양이 변변치 않다 해도 괴수들이 신성력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

    “키이이이!”

    “캬아아!”

    도시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사방에서 몰려들던 괴수들이, 신성력의 냄새가 나지 않는 길을 찾아 움직였다.

    곧, 그들은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키이이…….”

    2번 국도.

    고베의 해변을 따라 난 도로만은, 저주받을 회색빛에 잠식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괴수들의 본능이, 이 길을 따르라 외치고 있었다.

    쿵! 쿵!

    좁지 않은 도로였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괴수들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도로를 시커멓게 물들인 괴수들이 향한 곳은, 도로의 맞은편에 위치한 고베항.

    신기하게도, 그곳과 연결된 몇몇 길만은 저주받을 회색빛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더러운 신성력을 묻히지 않고 명령을 수행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키이이이이!”

    그 사실을 깨달은 괴수들은 빠르게 내달렸다.

    순식간에 항구에 발을 들인 그들은 아직 신성력에 오염되지 않은 길을 찾아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항구에는 선객이 있었다.

    딱딱! 딱딱딱!

    스켈레톤.

    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뼈다귀로만 이루어진 망자들.

    수많은 괴수들의 뼈가 뒤섞인 그들의 색과 형태는 제멋대로였지만, 공통점이 없지는 않았다.

    각기 손에 하나씩 쥐고 있는, 마나를 듬뿍 머금은 날붙이들.

    진혁이 일본으로부터 받아 낸 보구들이었다.

    딱딱딱딱!

    보구를 쥔 스켈레톤들이 턱뼈를 움직이면서 괴수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백이라고는 하나, 항구를 가득 메운 괴수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

    그럼에도.

    서걱!

    콰지직!

    보구를 손에 쥔 스켈레톤들은 마주친 괴수들을 손쉽게 도륙했다.

    콰득! 콰드득!

    푸욱!

    괴수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서가의 망령들.

    죽을 때까지 괴수와 싸워 온 그들에게 적절한 육체와 무기가 주어진 순간, 승기는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딱딱! 딱딱딱!

    턱뼈 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괴수의 숨통을 끊는 해골들은, 엽사보다는 솜씨 좋은 도살자에 가까웠다.

    “키…… 키이이?”

    “크아아아!”

    괴수들로 이루어진 검은 물결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본능으로 움직이는 괴수들의 손톱만 한 이성을, 잊고 있던 공포가 잠식했다.

    허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들의 후방은, 이미 함께 인간들의 도시를 파괴하러 온 동료들로 막혀 있었으므로.

    “키이이이이!”

    콰득! 서걱!

    싸우다 죽거나,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괴수들에게 밟혀 죽거나.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쐐애애액!

    하늘이 어두워진 것은 그때였다.

    자신들을 가린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괴수들은 앞으로 달려나가면서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고 푸른 비늘로 덮인 거대한 파충류.

    뱀과 도마뱀을 반쯤 섞어 놓은 듯한 형태의 파충류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파직! 파지직!

    녀석의 아가리에 든 것은, 푸른 스파크가 간헐적으로 튀어 오르는 백색의 불덩어리.

    콰아아아아!

    그것이, 하늘을 쳐다본 괴수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대체.”

    모리 마루이치.

    관서엽사들의 우두머리인 모리가의 후계자인 그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옆에 있던 시마즈 카스미 역시 마찬가지.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건, 엽사가 아냐.”

    수백의 해골과 괴수들을 수족처럼 움직이고, 혼자의 힘으로 수천의 적을 물리치는 존재.

    스스로의 기량만을 믿고 괴수를 사냥하는 엽사들과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아니, 애당초 저건 사냥이 아니다.

    “……전쟁인가.”

    홀로 괴수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존재.

    그렇다면, 인간을 상대로도 얼마든지 전쟁을 벌일 수 있으리라.

    그자처럼.

    “마왕…….”

    수십 년 전의 옛이야기.

    꿀꺽.

    전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일주일.

    관서의 엽사들이 목숨을 걸고 수백 만의 괴수들로부터 도시를 지켜 낸 시간.

    멸망을 앞에 둔 그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차단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정말로, 고베를 다섯 명이서 막아 내다니. 그것도 일주일이나.”

    서진혁.

    아들이 보내 온 고베의 상황을 살피던 모리 가이스케는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혈귀의 자손이라더니, 그 명성에 걸맞는 지략을 지녔더군요. 괴수들의 본능을 이용해서 유인해 내다니.”

    그와 다르게, 시마즈 타다요시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덕분에 관서의 엽사들을 제법 살려 냈으니, 이대로 버틸 수만 있다면 승리는 우리 것이겠습니다.”

    “아니, 전술이 문제가 아니오.”

    그 말에 가이스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유인책으로 괴수들을 한 곳에 몰아넣었다 한들, 놈들의 머릿수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유인한 괴수들을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막을 힘이 있다는 게 문제지.”

    마나의 힘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엽사라 할지라도 휴식은 필요하다.

    최소한의 식사와 수면시간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전투는커녕 생존조차 어려울 터.

    그러나, 서진혁은 교대 인원도 없이 일주일을 홀로 버텨 냈다.

    마루이치가 보내온 정보엔, 그 이유 역시 잘 나와 있었다.

    “용을 타고 왔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자는 혈귀와 완전히 다른 힘을 지녔소.”

    가이스케는 서류 사이에 끼워져 있는 한 장의 사진을 뽑아 들었다.

    사진 속엔, 괴수들에게 창칼을 박아 넣는 해골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용의 붉은 몸뚱이도.

    “이제야 그 많은 보구를 요청한 이유를 알겠군. 자기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서였어.”

    인간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군대.

    놈들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진혁, 그자의 힘이라는 것.’

    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한 개인.

    국가의 무력이 군대가 아닌 엽사의 질로 가늠되는 현대에 홀로 수십, 수백을 상대할 수 있는 진혁의 능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어쩌면, 괴수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소.”

    지금은 괴수를 향해 있다지만,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한다면.

    모리가문은, 일본은 막을 수 있을까.

    괴수를 막기 위해, 괴수보다 더한 위협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사진을 내려다보던 가이스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와 달리, 타다요시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웠다.

    “어쨌거나, 지금은 우리 편이지 않습니까? 저자의 힘을 잘만 활용한다면, 관동의 주도권을 우리가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물론, 그의 속내는 전혀 달랐지만.

    ‘포섭할 수만 있다면, 고토를 되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어.’

    그리고 모리에게 빼앗긴 관서의 주도권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의 손이 서서히 품속으로 향했다.

    그 안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딸, 카스미와 연결된 통신 구슬에게로.

    시모노세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괴수를 사냥하려는 엽사들로 북적였지만, 이제는 괴수들로 북적이는 도시.

    그곳의 무너진 성벽에 걸터앉은 거인, 외눈박이의 시선은 남동쪽으로 향해 있었다.

    고베.

    십 년 전, 자신을 향해 덤벼들었던 애송이가 있는 곳.

    “분명…… 강해졌구나.”

    신성력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홀로 고베를 덮치는 괴수의 파도를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막아 내는 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인간을 상대해 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더욱 잘 알고 있다.

    “일주일이라, 시간을 너무 많이 쥐여 줬어.”

    그 애송이가 끼어든 덕분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지구의 국가 중 하나를 단숨에 무너트리려던 그의 목표가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좋구만.”

    거인의 이마에 박힌 외눈은, 웃고 있었다.

    끌어 올린 그의 입꼬리 사이로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분명, 외눈박이는 기뻐하고 있었다.

    구구구궁!

    거인의 몸으로부터 퍼져 나온 진동이 대지를 진동했다.

    “키이이?”

    “크아아!”

    놀란 괴수들이 진동의 주인공인 갑 급 괴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외눈박이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싸움을 할 수 있겠어.”

    그아아아!

    기쁨과 희열.

    전투에 대한 기대로 몸을 부르르 떨던 외눈의 거인이 성벽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포효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주마.’

    십 년 전.

    공포로 몸을 부들부들 떨던 애송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일주일.

    진혁과 토벌 2팀이 고베에 머문 시간.

    그 시간 동안 진혁과 망자들 그리고 토벌 2팀은 달려드는 괴수의 파도를 충실히 막아 냈다.

    고작 다섯 명.

    아니, 용을 제외한 네 명이 해냈다기엔 믿을 수 없는 업적.

    물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아우우…… 피곤해…….”

    사제복을 입은 클레어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고베역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한 일은 수호의 성가로 만들어진 성역을 유지하는 것.

    밀도가 매우 낮다고는 하지만, 수십 제곱킬로미터의 도시를 감싸는 결계를 유지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뺨까지 내려온 눈 밑의 다크서클은 그녀가 얼마나 피로한 상태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성녀님, 이거라도 좀 드셔 보세요.”

    클레어를 향해 다가온 주연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먹을…… 거……?”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먹을 거라는 말에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내뻗었다.

    두꺼운 고기패티가 든 치즈버거와 종이컵에 든 콜라.

    “먹……을 거…….”

    손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온기와 포장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맛 좋은 냄새.

    허겁지겁 포장을 벗긴 그녀는 두꺼운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마, 맛있어…….”

    마치 누가 혀에 주사를 꽂고 수액을 직접 집어넣어 주는 듯,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와구와구!

    “후후.”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던 클레어가 햄버거를 마구 입에 쑤셔 넣는 모습을 보며, 주연은 낮게 웃었다.

    우우웅!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운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다.

    [성유창]

    아라길드의 길드장.

    그리고 갑 급 괴수를 토벌해 본 몇 안 되는 엽사 중 하나.

    “……예정보다 빨리 오셨는데.”

    스마트폰을 쥔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