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90화 (90/174)

90화

모리와 시마즈.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해 온 두 명가.

그러나, 게이트가 열린 뒤,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조선의 엽사들에게 패망한 이후론 예전 같지 않은 가문.

그럼에도, 그들은 백 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관서지방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서진혁, 그를 감시해라.”

모리 가이스케.

자리에 앉은 모리 가의 당주는 가문의 후계자를 향해 눈을 빛냈다.

“감시…… 입니까?”

그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후계자, 마루이치는 아버지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잠재적 적국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을 돕기 위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돕기는커녕 감시라니.

“듣기 불편하다면 다른 단어로 바꿔도 상관없다.”

불편해하는 아들의 표정을 눈치챈 가이스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다음 당주가 되어야 할 녀석이, 이렇게 순진해서야.’

하지만, 그렇게 가르친 게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번 수송 열차와 함께 고베로 가거라.”

가이스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아들에게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가서 한국의 엽사들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돈지 똑똑히 보고 오거라.”

“전력을 확인하는 겁니까?”

“그래, 이번 싸움이 끝이 아니란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가이스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콘크리트 벽면에 걸려 있는 거대한 지도를 가리켰다.

지도 위에는 유일하게 남은 일본제국의 영토인 혼슈가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분명, 괴수들을 막아 내고 나면 관동 놈들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놈’이 오겠지.”

‘그놈’을 떠올린 가이스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보일 듯 말듯, 그의 동공 깊은 곳으로부터 한 줄기의 공포가 새어 나왔다.

“그렇다면…….”

당주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마루이치는, 곧 아버지가 한 이야기의 속뜻을 깨달았다.

“……한국과 손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남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시마즈 놈들에게 질 수는 없으니까.”

말을 마친 가이스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을 때.

“길게 말하지 않겠다.”

관서헌터성의 건물 반대편에 자리한 시마즈 가문 소유의 빌딩.

“고베로 가거라.”

시마즈 타다요시.

시마즈 가의 현 당주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반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어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고베라면.”

“서진혁, 그자와 친분을 만들어라.”

“네?”

그 말에, 후계자인 카스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타다요시의 말이 이어졌다.

“혈마검의 주인이라면, 분명 자기가 한 말을 지킬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겠지.”

그의 생각이 맞다면, 한국에서 온 저 엽사는 분명 가문에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어쩌면, 우리 가문이 잃었던 고토(古土)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지금은 괴수들의 손에 들어간 시마즈 가의 땅.

하지만, 이번 기회에 괴수들을 모두 밀어낼 수만 있다면.

‘큐슈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생각을 마친 타다요시의 눈이, 여전히 놀란 표정을 한 딸에게로 향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지금이야말로, 모리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란 말이다.”

“……네, 아버님. 알겠어요.”

“잘 해낼 거라 믿으마.”

당주의 말에, 카스미는 자신 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사카의 달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고베.

만의 인구가 살아가는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 중 하나.

하지만, 괴수의 공격을 목전에 둔 지금은 주민들의 대피가 완료된 상태였다.

고베의 주민들 대신 거대한 도시를 지키고 있는 건 우두커니 서 있는 텅 빈 고층 빌딩들뿐.

허나, 모든 사람들이 도시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예상보다 많군.”

고베역의 플랫폼에 멈춰선 두 칸짜리 화물열차.

그중 가운데의 화물칸을 열어 본 진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보구들을 하루 만에 구해 올 줄은 몰랐는데.”

말 그대로, 천장까지 닿을 만큼 높게 쌓여 있는 보구들.

검, 갑옷, 방패와 같은 병기부터 귀걸이나 반지와 같은 장신구까지, 조금이라도 마법적인 처리가 된 물건은 모조리 쓸어 온 것 같았다.

“대부분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보구들입니다. 일단은 보구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오사카 내에 남아 있는 것들을 전부 긁어모으긴 했습니다만…….”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인지, 옆에서 진혁을 지켜보던 마루이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모두 마법적인 처리가 된 보구들인 건 확실해요. 약속은 지킨 거, 맞죠?”

그와 달리, 카스미는 오히려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하다.”

진혁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 칸을 열었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화물칸은 사람 하나 들어가기 힘들 만큼 꽉 차 있었다.

단지, 안에 든 화물이 수많은 괴수들의 사체라는 게 차이점일 뿐.

“물건은 확인했다.”

등급도, 종류도 구분되지 않은 괴수들의 사체들이 마구 쌓여 있는 꼴은 보기에 영 좋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물칸을 닫고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진혁은 이만 가라는 의미로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둘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저희도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도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우리도 괴수 한둘 정도는 잡을 수 있어요.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그 말과 함께, 마루이치와 카스미는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내보였다.

하지만.

“방해된다.”

진혁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역을 나섰다.

“방해…….”

“라고?”

순식간에 방해꾼이 되어 버린 모리와 시마즈의 후계자가 벙찐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을 동안.

“팀장님, 괴수 도달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역 밖으로 나가는 진혁에게 주연이 다가와 브리핑했다.

“성녀는?”

“성기사와 함께 지정 위치에서 대기 중입니다.”

“준비가 빠르군.”

“굉장히 의욕적으로 나서던데요? 이번엔 좀 놀랐습니다.”

“어리다곤 하지만 성녀니까.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미소 짓는 주연을 향해 진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역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망자들을 살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진혁 님.

뼈다귀 몸 주제에, 힘이 넘쳐 나는구만!

조성준과 자이츠.

머리 대신 투구를 쓴 식귀와 스켈레톤 킹이 역 밖으로 나온 진혁을 반겼다.

이전과 달리, 그들의 육체에선 희미한 금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근원은 다름 아닌, 여명이무기의 사체를 빻아 만든 가루.

소모가 큰 용아병의 술법을 항상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신 진혁은 남은 가루를 망자들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을 급 괴수의 힘이 더해졌으니, 전에 비하면 출력이 더 강해졌을 거다. 힘 조절에 주의하도록.”

걱정 마시오, 주인. 괴수 상대로는 힘 조절할 필요도 없으니까! 으하하!”

오히려, 지난번보다 더 편해진 감도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괴수들을 상대하는 건 문제도 아니겠군요.

몸에서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두 망자의 의지에서, 진혁은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두 망자의 뒤쪽으로 향했다.

“몸 상태는 어떻지, 멜리나.”

―최상이에요.

진혁의 말에 답한 그녀의 육체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푸른 비늘로 뒤덮인 천둥비룡의 뱀처럼 길쭉한 형태가 아닌, 붉은 비늘의 거대한 도마뱀.

가슴 위로 누더기처럼 이어 붙인 천둥비룡의 머리와 상체 일부를 제외하면, 그녀의 모습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키메라의 술법은 시간이 지나야 완성되는 것이니, 당분간은 육체의 안정성이 떨어질 거다.”

천둥비룡과 붉은 용의 육체를 엮어 만들어 낸 망자.

머리와 상체 일부가 사라진 붉은 용의 몸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 진혁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출력과 안정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용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생각하면 손해 보는 일은 아니지.’

―그래 봤자, 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아니잖아요. 흥.

그 육체를 사용하는 멜리나가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럼, 육체를 포기하도록.”

―괴수는 언제 오는데요? 기다리느라 목 빠지겠네.

그가 멜리나를 부리는 데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진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호들갑 떠는 붉은 용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슬슬, 준비해 볼까.

두근! 두근!

가슴 속, 흑마력을 토해 내는 검은 심장의 박동.

전신으로 퍼지는 진하고 끈적한 기운 속에서.

파앗!

진혁의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났다.

모리 마루이치와 시마즈 카스미.

관서의 두 명가를 이을 후계자들은, 아직 고베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 진혁 씨의 말 못 들었어요?”

“그러는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지?”

같은 빌딩의 옥상에서 마주친 둘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가운데서 맞부딪쳤다.

백 년 넘게 연합과 반목을 반복해 온 두 라이벌 가문의 후계자들이었으니, 사이가 좋을 리 없다.

“……흥, 지난번처럼 방해나 하지 말아요.”

“그쪽이야말로.”

곧, 말다툼을 하던 남녀의 시선은 빌딩 숲 사이에 자리한 고베역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역 앞에 도열해 있는 괴수들을 향해.

“혈마검의 주인이라더니…… 실제론 괴수들을 부리는 건가?”

괴수들 앞에서 무어라 이야기하는 진혁을 보며, 카스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검 한 자루만으로 괴수를 상대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명가의 헌터들에게, 자신 대신 괴수를 앞세우는 술사들은 경멸의 대상이었으니까.

“혈귀의 핏줄이라더니, 실제론 겁쟁이였군.”

실망한 것은 반대편에서 진혁을 바라보던 마루이치 역시 마찬가지.

‘굳이…….’

‘더 볼 필요가 있을까?’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진혁의 모습에, 둘은 서서히 의욕을 잃어 갔다.

구구구구!

갑작스레 그들이 밟고 있던 빌딩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지, 지진?”

“이런, 하필 이런 때…….”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게 지진은 생활의 일부나 다름없었지만, 문제는 괴수가 공격해 오기 직전이라는 것.

비틀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으며, 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곧, 고베역을 지켜보던 둘은 지진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멈춰 선 열차의 화물칸이 산산조각 난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겹겹이 쌓여 있던 괴수의 사체들.

아니.

“시체가…….”

“일어난다고?”

이미 죽었으나,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킨 망자들.

“크으으…….”

“끼이…….”

시체의 산 속에서 하나둘 몸을 일으키는 괴수들을 보며, 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