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오사카 시.
만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본제국의 제2 도시.
그곳의 분위기는 절망적이었다.
“관동에서는?”
“답신이 없어. 어차피 자기 일이 아니란 거겠지.”
“빌어먹을 놈들.”
모리 가이스케와 시마즈 타다요시.
관서지방 헌터계의 두 거두가 한자리에 모여 이를 갈았다.
“관서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기네 차례란 걸 모르나?”
“이참에 관서의 힘을 약화시켜 보겠단 속셈인 거겠지. 어차피 관동엔 ‘그’가 있으니까. 속셈이 너무 뻔해.”
씁쓸한 표정을 짓는 타다요시를 보며 가이스케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 말대로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 헌터계가 반으로 나뉜 지 약 백 년.
한 세기 가까이 지날 동안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감정의 골을 생각하면, 관동의 헌터들이 자신들을 도와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버려야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나. 방벽을 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먼저 큐슈의 괴수들을 쳐야 한다고.”
타다요시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 것은 그때였다.
“또 그 개소린가?”
가이스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럴 바엔 차라리 카미카제(神風)를 기다리는 게 낫지! 한 줌도 안 되는 헌터들을 보내 봐야 개죽음일 뿐이라고!”
“황국의 승리를 위한 영광스러운 한 걸음을 두고 개죽음이라니? 그 나약한 마음 때문에 지금 이 지경까지 온 거 아닌가!”
“뭐라고? 지금, 말 다 했나?”
차분하게 시작한 둘의 말다툼은 어느새 고성이 오가는 언쟁으로 바뀌었다.
붉어진 두 당주(黨主)의 오른손이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향해 천천히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말싸움은 칼싸움으로 변하게 되리라.
쐐애애액!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그들의 귀를 찌른 것은 그때였다.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토하던 둘의 입이 일시에 다물어졌다.
곧, 가이스케와 타다요시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뭐, 뭐냐, 저건!”
“아니…….”
하늘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그들의 눈이 놀라 커졌다.
“용……?”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전신 대부분을 덮은 붉은 비늘과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
붉은 발톱은 강철도 가를 듯 예리했고, 전신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기운은 멀리 떨어진 그들에게조차 미묘한 압박감을 전해 주었다.
상체의 일부와 머리가 몸통과 색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분명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용.
그중에서도 불의 힘을 다루는 적룡의 모습이었다.
“용이, 어째서?”
“분명, 아무런 경보도 없었는데…….”
소리소문없이 갑자기 나타난 용의 거체 앞에서, 모리와 시마즈의 당주는 혼란에 빠졌다.
수천 년을 살아가는 마법 생물을 맞상대하기에 관서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설사 이긴다 한들, 이득 하나 없이 상처뿐인 승리.
용과 싸우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그들에게, 몰려드는 괴수의 파도를 막아 낼 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저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용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가이스케는, 용의 등 뒤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곧, 마나를 눈에 불어넣자 무언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이스케의 생뚱맞은 말에, 타다요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야. 용의 등 뒤에, 사람이 타고 있어.”
“대체 그게 무슨…… 헛것이라도 보이는 겐가?”
타다요시는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모리의 당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마나를 눈에 불어넣었다.”
이내.
“아니, 사람이잖아?”
그는 가이스케의 말이 사실이란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흑청색 정장을 걸친 채 날아오는 용의 등 뒤에 선 미청년.
“지상이 제법 소란스러운 걸 보니, 도착한 모양이구나.”
옆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던 청명의 말에.
“거의.”
서진혁.
서가의 장남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과 일행들이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 오사카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다들 어딘지 모르게 지쳐 있어요. 공포에 질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클레어는 착륙한 공터 주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엽사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괴수들의 공세가 생각보다 심각한 걸지도요.”
그녀의 말에, 옆에서 걷고 있던 주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답했다.
“아니, 심각한 게 맞겠죠. 일본 엽사들이 한국보단 못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정도로 약하진 않으니까.”
그렇기에, 주연의 생각엔 더욱 큰 문제였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한 번 꺾여 버린 전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몰려 있으니, 한국까지 찾아온 거겠지.”
주연의 말을 받은 것은 진혁이었다.
“조금이라도 기세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지원군만 한 게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물론, 평소라면 이렇게 나약하게 무너질 엽사들이 아니긴 하지만…….”
말을 마친 진혁이 마루이치를 바라보자, 마루이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타타타탓!
저 멀리서, 일군의 사람들이 진혁과 일행들을 향해 달려왔다.
하나같이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자들.
엽사.
그중에서도 가문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사무라이를 연상케하는 갑옷을 입은 자들이 진혁과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곧, 그들 중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머리에 쓴 커다란 금속 투구에 각기 가문의 문장을 박아 넣은 자들.
“아버지.”
“아버님.”
둘의 얼굴을 확인한 마루이치와 카스미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누구신가 했더니, 손님이셨군요.”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관서헌터성의 대신을 맡고 있는 모리 가이스케입니다. 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대신, 시마즈 타다요시입니다.”
“서가의 서진혁이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고는, 두 사람의 뒤에 선 엽사들을 자세히 살폈다.
‘높아야 삼 품 정도인가.’
그 숫자가 제법 많기는 하지만, 최상급의 실력자라기엔 조금 부족한 수준.
‘이 정도가 이곳의 정예라면…… 조금 벅찰 수도 있겠어.’
상대는 갑 급의 괴수다.
일, 이 품의 수준이 아니라면 공격조차 제대로 박히지 않는 강력한 상대.
휘하의 괴수들이라면 모를까, 외눈박이를 토벌할 때엔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그런데…… 선발대는 아직인가 보군요? 사절단분들만 오신 걸 보니.”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가이스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가라면 충분히 치를 수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지원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아버지.”
당주의 말에, 마루이치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우리가 선발대다.”
진혁의 말이 더 빨랐다.
“그게, 무슨…….”
선발대라니.
고작해야 다섯 명에 불과한 인원을, 어찌 선발대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진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두 당주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후속 지원은 한 달 뒤. 그때까지 잘 부탁하지.”
진혁의 다음 말에, 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두 당주의 마음과 달리, 오사카의 관서헌터성에선 급조한 환영 행사가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을 돕기 위해 찾아온 한국의 엽사들에게 어디서 따 왔는지 모를 꽃을 뿌리고,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하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게.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은 건가?”
성녀 옆에서 걷고 있던 호위기사, 렌 슈미트의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주연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마, 실망한 걸 거예요.”
“실망이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괴수들이 몰려오는데, 지원이랍시고 받아 온 게 고작 다섯 명이니까요. 실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녀의 말대로, 주변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한국의 엽사들이 정말로 괴수를 막아 내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일 터.
그것은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일본의 엽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다섯 명이라니…….”
“한국에서, 대체 우리를 뭐로 보고…….”
진혁 일행이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의 엽사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다섯 명을 지원이라고 보내다니, 한국도 정말 여유가 없는 모양이군.”
“차라리 보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을.”
비웃는 자,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자, 한숨을 내뱉는 자.
반응은 각기 달랐지만, 부정적인 태도는 같았다.
“뭐예요, 이 사람들? 그래도 도우러 온 건데…….”
통역의 권능으로 엽사들의 말을 알아들은 클레어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혁은 아무 말도 없이 주변을 살폈다.
‘여기 모인 게 관서 엽사들의 전부라면…… 실망인데.’
괴수의 이번 공세에서 전력의 상당수를 잃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렇다 쳐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세한보안의 토벌팀과 비교해도 크게 나을 게 없을 정도였으니, 한숨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
“조용.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소.”
관서헌터성의 대신, 모리 가이스케가 굳은 얼굴로 개회를 선언한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회의? 대체 이게 무엇을 위한 회의요, 대신.”
가이스케를 향해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붉은 머리의 사내.
“류헤이!”
“지원을 받아 올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더니, 고작 다섯 명? 하, 차라리 보구나 좀 받아 오지 그랬소.”
가이스케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지만, 류헤이라 불린 남자는 코웃음 치며 손가락으로 진혁과 일행들을 가리켰다.
“적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것도 치욕스러운 일인데, 이런 모욕을 받고도 가만히 있다니. 당신들이 정녕 일본을 지키는 자들이 맞는지 모르겠소.”
“그래, 맞아!”
“한국에게 동정을 구걸한 대신은 사죄하시오!”
“사죄하시오!”
류헤이의 말과 함께, 회의실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바뀌었다.
“그만, 그만! 귀빈들을 모셔 놓고 이게 무슨…….”
순식간에 청문회로 변해 버린 회의.
당황한 가이스케는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스릉!
검이 뽑히는 싸늘한 쇳소리가 회의실의 소란을 반으로 갈랐다.
그 주인공은, 회의실의 중심에 서 있던 서진혁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장검.
검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이, 소란스럽게 떠들던 엽사들의 입을 서서히 다물게 했다.
“적이라.”
침묵에 빠진 회의실의 한가운데에서, 진혁은 독립검 아스칼론을 뽑아 든 채 한 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적 앞에서 내분을 일으키는 건 부끄럽지 않나 보군.”
통역의 권능을 통해 번역된 그의 말에, 일본의 엽사들은 움찔했다.
이내, 진혁의 말이 이어졌다.
“허나, 말리지는 않겠다.”
어차피, 멸망은 너희의 몫이니.
말을 마친 진혁의 눈동자가, 귀기로 시퍼렇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