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강철마탑에서 벌어진 부탑주 살인사건은 깔끔하게 매듭지어졌다.
진범이었던 장무선은 갑자기 등장한 용에 의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주소영은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다.
주가와 강철마탑, 오행회, 서가가 한데 얽힌 복잡한 사건이 이토록 쉽게 해결된 이유는 간단했다.
“처분은 끝났는가?”
전신을 하얀색 가죽 코트로 감싼 백발의 여성.
그녀, 백룡 청명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
“예, 장무선의 이름은 영원히 마탑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한국 제일이라 불리는 강철마탑의 주인인 주미선조차도, 눈앞의 수천 살 먹은 괴물 앞에선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용이 자신의 힘을 드러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난 백 년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것으로 죗값은 치른 것으로 하겠노라.”
“그러시지요.”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여자의 말에, 미선은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갑 급 보구 아스칼론의 소유권을 잃기는 했지만, 마탑과 주가를 보전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거저나 다름없다.
‘또 변덕을 부리기 전에, 빨리 마탑에서 내보내야 해.’
괜한 꼬투리를 잡혀서 용이 분노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것은 그녀와 주가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니까.
“자, 이제 아스칼론을 지키는 건 네 몫이다. 의무를 받아들여라.”
탑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은 그녀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끊고는 둘의 옆에 서 있던 진혁에게 붉은 장검을 건넸다.
가볍게 검을 받아 든 진혁의 눈이 빛났다.
‘이게, 독립검 아스칼론.’
서가의 초대 가주가 사용하던 검이자, 강력한 용의 힘이 담긴 갑 급의 보구.
검 손잡이에서 손바닥을 타고 흘러드는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이 육신을 덥힌다.
갑 급의 보구는 그 이름에 걸맞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좋군.”
신경이 저릿할 정도의 광폭한 기운 앞에서, 진혁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주미선은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 용만 없었더라면, 죽은 자를 어떻게 부활시켰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내는 비술은 고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그녀가 탐내는 것은 당연한 일.
얻을 수만 있다면, 마탑 전체를 팔더라도 아깝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용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거래를 제안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어. 언젠가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꾹 눌러 삼키며, 미선은 욕망 어린 눈빛을 아래로 감췄다.
“팀장님, 출발할 시간입니다.”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신주연이 나타난 것은 때였다.
진혁을 곧장 데려가려던 그녀는, 팀장의 옆에 선 백발의 미녀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
“……이분은?”
“용이다. 날 감시하겠다는군.”
“……용, 이라고요?”
주연은 농담인가 싶어 진혁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의 얼굴엔 어딜 봐도 농담은커녕 웃음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눈앞의 여자가 용이 맞다는 뜻.
“그렇다면, 이……분도 차로 모셔야겠군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추가되었지만, 주연은 당황을 감추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는 탈 필요 없다.”
말을 마친 그의 검지가 하늘 위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가리켰다.
쐐애애액!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푸른색의 날개 달린 뱀.
천둥비룡이었다.
“끼이이!”
눈 깜짝할 새 마탑 앞에 가지런한 모습으로 착지한 비룡이 고개를 숙이며 낮게 울었다.
―이번엔, 뭐 들고 갈 필요 없는 거 맞죠? 저번에 백두산인가까지 날아갈 땐 죽는 줄 알았다고요.
공손한 모습과 달리, 진혁의 머릿속은 칭얼대는 멜리나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어볼 게 있다.”
“뭐지?”
“적룡의 시체는, 어떻게 할 거지? 어차피 진짜 용도 아니긴 하지만.”
그 육체를 만들어 낸 장무선은 눈앞의 백룡에 의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은 제법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아스칼론의 적룡기를 활용해 만든 가짜이긴 하지만, 실제 용의 육체를 거의 그대로 구현해 냈으니 분명 쓸모가 있을 터.
“그건, 왜 묻는 게냐.”
그녀의 물음에, 진혁은 짧게 답했다.
“내가 가져갈 생각이니까.”
세 사람이 천둥비룡을 타고 강화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동쪽 산에 걸려 있던 태양은 어느새 중천을 가리켰고, 늦가을의 바닷바람은 섬 전체에 찬 기운을 퍼뜨렸다.
―아이고, 나 죽네. 주인이 나 죽인다…….
진혁의 영지 한가운데에 착지한 멜리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망자 주제에 엄살을 피운다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배 쪽에 매달려 있는 세단과 붉은 용의 거대한 사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순 없으리라.
“수고했다.”
그녀의 꼬리를 계단 삼아 밟아 내려간 진혁은 기진맥진한 멜리나를 몇 번 다독여 주고는, 체내의 흑마력을 움직였다.
스으으!
그러자, 비룡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밧줄이 빠르게 풀려나갔다.
―으으, 이제 좀 살겠네. 그럼 이제 더 할 일 없죠, 주인?
“끼이…….”
몸에서 무거운 짐 덩어리를 때 낸 멜리나는 힘없는 울음소리를 내고는, 진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흥미로운 곳이구나.”
진혁과 함께 비룡의 몸에서 내린 청명은 빽빽하게 심어진 사령수의 숲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분명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숲이라니.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야.”
정말로 신기했던 것인지, 청명은 사령수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가선 검게 물든 나뭇잎과 줄기를 하얀 손으로 매만졌다.
“벌써 돌아온 거예요?”
사령수를 만지며 신기해하는 용을 바라보던 진혁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회색의 사제복을 입은 클레어와 훈련복 차림의 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달은 있다 올 줄 알…… 저 사람은 누구예요?”
진혁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던 성녀는, 옆에서 사령수의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던 청명을 보곤 눈을 끔뻑였다.
진혁과 클레어를 등지고 있던 청명이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린 것은 그때였다.
“어……어?”
여자의 무심한 표정과 함께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클레어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자, 청명은 담담한 눈으로 금발 소녀를 내려다봤다.
“이름 없는 신의 아이인가.”
“어…… 어…… 맞, 맞는데요……?”
순간, 용의 눈동자 속에 숨겨져 있는 광기를 마주한 성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청명은 그 말을 끝으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사령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제야 클레어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진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저, 저 사람, 뭐예요?”
“용이다.”
“요, 용? 그, 제가 아는 그 용 말하는 거 맞죠?”
그의 대답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불신에서 놀람, 공포로 빠르게 변해 갔다.
진혁은 마치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성녀의 표정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조금 전 천둥비룡이 싣고 온 자동차와 적룡의 사체가 있었다.
‘아무리 가짜라고는 하지만…… 용은 용이지.’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마나를 손에 쥔 마법 생물.
마법에 최적화된 용의 육체라면, 강력한 망자의 재료로 손색이 없었다.
단지,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면.
‘온전한 상태였다면 더 좋았을 터인데.’
청명의 공격에 당한 적룡의 사체엔 왼쪽 가슴과 머리가 없었다.
장무선의 몸도 함께 소멸했으니 용의 사체를 활용하는 데 큰 문제는 없겠지만, 온전한 육체가 아니란 건 분명 아쉬운 부분.
‘금속으로 보강하기엔, 용의 힘을 버티기 힘들 테지.’
정 급의 괴수였던 식귀라면 모를까, 용의 육체가 가진 힘을 견디기 위해선 아다만티움이라도 들이부어야 하리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키메라.’
서로 다른 망자의 육체를 합쳐 하나로 만드는 비술.
금속과 달리 유연한 데다 재생이 가능한 생체를 사용한다면, 부족하나마 용의 힘을 견뎌 낼 수 있으리라.
‘그 전에, 용과 유사한 형태의 육체를 골라야겠지만.’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붉은 용의 바로 뒤.
“끼이…….”
눈을 감은 채 잠꼬대하는 천둥비룡, 멜리나를 바라보며,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시.
일본제국의 유일한 실효지배지, 혼슈(本州)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요새 도시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대부분은 인접한 큐슈(仇州)나 시코쿠(西國)의 괴수를 잡아 한 몫 챙기려는 뜨내기 헌터들과 그들의 호주머니를 털려는 장사꾼들.
그중에서도, 도시가 사람으로 가장 북적이는 시기는 10월 말과 11월 사이였다.
“올해도 몬스터 웨이브가 오겠지?”
“당연하지, 그 짐승들한텐 본능 같은 일이라고.”
“우리는 달려드는 사냥감을 잡기만 하면 되는 거고 말야.”
“이거 이거, 돈 버는 게 너무 쉽잖아?”
매년 이맘때쯤이면 큐슈의 괴수 무리가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기 때문.
제법 많은 수기는 했지만, 괴수와의 전투를 위해 조성된 시모노세키의 수많은 방어 장비들을 뚫을 수는 없었다.
일본의 헌터들 입장에선 싸우는 척만 하면서 괴수의 전리품을 챙겨 갈 수 있었으니, 말하자면 이 시기는 일종의 대목.
괴수들의 전리품을 챙겨서 한 몫 단단히 챙길 생각에, 시모노세키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바다 너머에서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저, 저게 뭐야.”
시모노세키의 성벽 뒤에 서 있던 헌터들은 놀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타큐슈의 해안가에서 몰려드는 흑색의 파도.
아니, 그건 파도 따위라고 표현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거대한 무언가.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모여 있던 헌터들 중 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쓰, 쓰나미(港波)…….”
바닷물 대신 괴수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거대한 파도.
파멸의 물결이, 무너진 제국을 덮쳐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