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용(龍).
태어날 때부터 마나를 몸에 머금은 채 수천 년의 수명을 살아가는 마법 생물.
지구에선 한낱 전설 속 상상의 동물일 뿐이었지만.
백 년 전, 게이트가 열리면서 전설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에피로나에서 지구로 도망쳐 온 수많은 이종족 중에서도 극히 적은 숫자만이 존재하는 상위 종족.
―이 육체라면…… 마법의 궁극을 이루기에 충분해.
그 힘과 육체를 얻는 데 성공한 장무선의 비늘 덮인 머리가 오만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버러지들이 오는구나.
장난감처럼 늘어서 있는 건물과 자동차 사이로 난 도로 위를 비행하는 무리들.
각자 다른 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오행회의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무선은 코웃음 쳤다.
과거라면 부탑주인 그도 혼자서는 당해 내지 못했겠지만, 용의 육체를 얻은 지금이라면 어렵지 않은 일.
전신을 집어삼킬 듯 끓어오르는 적룡기의 일부만으로도, 눈앞의 마법사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하리라.
‘저쪽이라면 다를지도 모르지만.’
오행회의 마법사들에게서 눈을 뗀 그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금색으로 빛나는 고렘 하나와 남자 하나.
단둘뿐이었지만, 용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기운은 평범한 마나나 오러가 아니었다.
마기와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힘.
‘그래서…… 도민호의 마법이 예상보다 강력했던 것일지도.’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적룡의 힘은, 인간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출력을 낼 수 있도록 해 줄 테니까.
―우선, 살려는 둬야겠지. 저 힘의 근원을 파헤치면 마법의 궁극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혁과 그 옆의 고렘을 바라보는 무선의 눈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팟!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흰색의 가죽 코트를 입은 백발의 여성.
―흠, 저런 모습을 한 마법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상급 마법에 속하는 순간이동 마법을 마법진의 도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못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일 터.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기엔 너무나 독특한 차림새였다.
―어차피, 마법사 한둘로는 용의 힘을 감당할 수 없…….
기척도 없이 허공에 나타난 그녀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붉은 용이 감각을 집중한 그 순간.
―이, 이건.
그녀와 눈을 마주친 무선의 사고가 정지했다.
광기.
순수하고도 지독한 광기와 나태가 그녀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고작 백 년 남짓한 수명을 지닌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수백에서 수천 년을 살아가는 존재가 기나긴 세월 동안 쌓아 온 감정의 편린.
그러나, 그 작은 조각조차도 채 오십 년도 살지 못한 인간의 영혼이 견뎌 내기엔 벅찼다.
―설마…….
그런 생명체는, 이 지구상에 단 한 종류뿐.
―용……이라고?
수천 년을 살아가는 불멸의 존재.
이제는 모습을 감춘 역사 속 생물이, 어째서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무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녀의 새하얀 오른손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곧, 눈썹을 치켜뜬 여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역겹기 그지없구나.’
파아앗!
그 말과 함께, 손에서 쏟아져 나온 순백의 광선.
―……밝아.
그것이 거짓 용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파슬란 드 노미크롬.
아스칸의 망령군주가 상대했던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요정, 난쟁이, 용, 정령.
인간과 유사한, 혹은 그렇지 않은 지성체들.
그중에서도, 용은 죽은 자들의 왕인 그를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그 중 파슬란과 대립하던 하나를 본보기 삼아 죽여 망자로 삼았던 적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관계.
그렇기에.
‘용과 마주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군.’
아파트 저편, 상체의 절반이 지워져 버린 가짜 용을 일컫는 게 아니다.
진혁의 눈앞.
삼사 미터쯤 위의 허공에서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백발의 여성.
전신을 덮은 하얀 롱코트로도 가리지 못한 몸의 굴곡과 차가운 얼굴이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용인가?”
진혁이 물었지만, 그녀는 침묵했다.
마치 개미를 관찰하는 인간처럼, 진혁을 보는 그녀의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스칸이나 이곳이나, 용은 한결같은 존재구나.’
철저한 무시였지만 진혁은 분노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수천 년을 살아온 용의 마음이란, 으레 닳을 대로 닳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광룡(狂龍)이나 마룡(魔龍)이란 딱지와 함께 척살령이 내려졌으리라.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입을 열겠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용을 바라보며, 진혁이 팔짱을 낀 그때.
파앗!
푸른 빛과 함께, 진혁의 옆에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마탑의 탑주, 주미선.
“대체, 무슨 일이…… 아니, 그보다 장무선 부탑주는 어떻게 된 거죠?”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 그을려 있는 아파트 단지와 용의 사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주가의 가주인가?”
하늘에서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여자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 말을 들은 미선과 그녀의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
‘이게…… 인간의 눈빛이라고?’
상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광기에, 주미선은 순간 숨을 죽였다.
“……맞습니다.”
최상급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그녀조차도 이겨 내기 버거운 기운.
조심스럽게 입을 뗀 미선의 눈은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선언하겠다.”
하지만 용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조금 전 직접 쓰러트린 용의 사체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곧.
푸욱!
죽은 용의 몸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스스로 붉은 비늘 사이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독립검, 아스칼론.
쐐애액!
그 모습을 본 용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아스칼론은 마치 지성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오른손을 향해 빨려들듯 날아갔다.
곧, 용의 오른손엔 붉은색의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본래 아스칼론은 용의 것이었으나, 주가의 가주였던 마법사를 믿고 그 보관과 사용을 허가하였느니라.”
“요, 용이라니. 그럼, 당신은…….”
검을 손에 쥔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자, 상대의 정체를 눈치챈 미선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럼에도, 용은 표정 하나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에 이르러 주가는 아스칼론의 관리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용을 흉내 내려 하는 금기를 범하기까지 하였다. 하여.”
고오오오!
말을 멈춘 용의 주변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쩌적! 쩌저적!
아지랑이 사이로 하얗게 얼어붙은 서리가 그녀 주변의 공간을 서서히 잠식해 나간다.
이내, 그녀는 판결을 내렸다.
“주가에게서 아스칼론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금기를 저지른 주가에게 합당한 징벌을 내리겠다.”
우웅!
그녀의 손에 쥐어진 장검, 아스칼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붉은 검신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적색 기운, 적룡기가 주변의 서리를 붉게 물들였다.
‘이건, 이길 수 없어.’
일 품의 품계를 얻은 엽사이자 강철마탑의 탑주 그리고 최상급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도사.
평범한 인간의 궤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 주가의 가주인 주미선이었지만, 눈앞의 존재는 그녀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아니, 이기기는커녕…… 마탑이 사라질지도 몰라.’
눈앞의 용이 말하는 징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으리란 것은 그녀가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
일 품의 엽사인 그녀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라면, 마탑 전체가 달려들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물론.
우웅!
그렇다 해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자, 마나홀을 채운 순수한 마나가 술식에 따라 순식간에 형태를 이룬다.
‘빈틈이 보이는 순간…… 찌른다.’
눈 깜짝할 새 완성시킨 마법을 손에 쥔 채, 미선은 시동어를 외칠 순간만을 기다렸다.
“누구 맘대로, 아스칼론의 소유권을 가져간다는 거지?”
둘을 바라보던 진혁이 사이에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또각. 또각.
둔탁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온 그는 자연스럽게 두 여자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혁의 시선이, 서릿발의 중심에 선 용의 차가운 얼굴로 향했다.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대답 대신 짧게 말했다.
“비켜라, 인간.”
동시에.
웅!
여자의 마지막 말에 호응하듯, 진혁의 주변에 퍼져 있던 마나가 그의 몸을 옥죄었다.
언령.
오직 용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한마디 언어로 세계의 법칙을 조작하는 마법의 원류가 진혁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려 했다.
용처럼 긴 수명을 가지지도, 강인한 육체와 영혼을 가진 것도 아닌 인간이 견디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
그러나.
“거부한다.”
진혁은 언령에 따르는 대신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스으으!
검은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기운이 진혁의 몸을 얽맨 마나에 간섭한 것은 순식간의 일.
언령은 영혼과 현실 두 곳에 작용하는 힘이었지만, 명계의 대행자인 진혁의 영혼을 강제할 순 없다.
영혼의 속박이 풀렸으니, 남은 것은 육체를 강제한 마나를 부수는 것뿐.
쩌적!
망자의 기운이 서서히 주변을 잠식한다. 진혁을 옥죄던 마나의 틀이 서서히 그 힘을 잃어 간다.
결국.
“너야말로 아스칼론을 내게 넘겨라, 용이여.”
용의 언령을 파훼한 진혁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용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놀람도 분노도 두려움도.
눈동자 속 가득한 광기를 제외하면, 어떠한 감정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생명 없는 고렘을 보는 것 같았다.
곧, 진혁을 바라보던 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 힘을 지니고 있구나.”
그 말과 함께.
“정말, 흥미로워.”
파랗게 바랜 용의 입술이 작게 호선을 그렸다.
웃고 있었다.
수천 년의 시간에 걸쳐 풍화된 감정이, 오랜만에 자신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투투툭!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붉은 서리가 바닥에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 이름은 벨레룩스, 이곳의 이름으론 청명(淸明).”
“용이…… 먼저 이름을?”
용이 인간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자 미선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청명은 진혁을 향해 물었다.
“인간, 그대의 이름은?”
“서진혁.”
용의 물음에, 진혁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자.
“번복하겠다.”
진혁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청명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본래 주가에 주어졌던 아스칼론의 보관과 소유권을 서진혁에게 이양한다. 또한.”
말을 멈춘 그녀의 눈이, 서진혁과 그의 주변을 감싼 기운에 잠시 머물렀다.
곧, 용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고대의 의무에 따라, 그대의 감시자로 활동할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