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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83화 (83/174)
  • 83화

    제주도.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섬 한가운데 존재하는 한라산의 가장 높은 곳에.

    한 남자가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남자가 걸친 블랙 톤의 캐주얼한 옷차림은 등산하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 산과 섬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그리고.

    “대주님…….”

    그 옆에, 남자를 지켜보는 여자가 있었다.

    미령.

    평소의 표독스러운 눈초리와 달리 대주, 여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아무 말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던 것이 벌써 일주일째였으니까.

    그가 마인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시간.

    자연히, 그의 부하인 미령은 대주의 건강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음.”

    석상처럼 굳어 있던 여명이, 사흘 만에 목소리를 낸 것은.

    “대주님!”

    바로 옆에서 대주의 기척을 느낀 미령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곧.

    “……며칠이나 지난 거야, 미령?”

    두 눈을 서서히 뜬 여명의 시선이 미령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 대답했다.

    “사흘...…입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네, 다행이야.”

    우득! 우드득!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여명은 씨익 웃으며 사흘 동안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음식 대신 마기에서 에너지를 얻는 마인답게,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그의 몸은 사흘 전에 비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뭐야, 걱정한 거야?”

    “……아닙니다.”

    “그냥, 생각을 좀 했을 뿐이야. 고민이 하나 생겼거든.”

    “생각, 말입니까?”

    “응.”

    미령의 물음에, 남자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오랫동안 고민해 봤는데 말야, 우리 계획이 굴러가기 위해선 한 가지를 처리해야 할 것 같아.”

    “한 가지라면…….”

    “서진혁.”

    그 말에 미령은 놀랐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지목한 적은 처음이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내가 원래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 근데, 이번엔…… 상대가 좀 지나쳐.”

    말을 마친 여명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슬슬, 연락을 할 때가 된 것 같아.”

    눈동자에서 진한 살기를 뿜어내던 그의 시선이, 남쪽의 바다로 향했다.

    상급의 마법을 익혀 부탑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도민호.

    비록, 한 번 죽어 망자로 다시 깨어났다고는 하지만.

    우웅!

    그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마법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멸절……하라, 만천화우(萬天花雨).

    눈 깜짝할 새, 술식을 구축해 낸 망자가 시동어를 외운 순간.

    콰앙!

    순식간에 구축된 술식이 셀 수 없이 많은 금속 탄환으로 바뀌어 쏘아졌다.

    하나하나가 마나의 응집체로 이루어진, 평범한 총탄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력의 탄환들.

    그중 하나라도 몸에 허용하는 순간, 나약한 인간의 육신은 조각조각 찢겨 나가리라.

    “……일어나라.”

    하지만, 상대도 강철마탑의 부탑주인 것은 마찬가지.

    상대의 마법이 발동되기도 전, 마나를 일으킨 무선의 앞에 강철로 이루어진 벽이 솟아났다.

    파파팍!

    철과 철이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쏘아져 나간 탄환들이 솟아난 철벽에 박혀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아니, 어떻게…….’

    하지만, 놀란 것은 탄환을 막아 낸 장무선이었다.

    ‘만천화우가 강력한 마법이긴 하지만, 이 정도 위력은 아닌데……!’

    사람이나 괴수의 몸뚱이라면 모를까, 마법으로 만들어 낸 철벽을 찌그러트릴 만큼 강력하진 않다.

    ‘죽기 전보다…… 오히려 강해졌어.’

    단지 죽었다 살아났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마법의 위력 자체가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상식선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꿰뚫……어라, 굉뢰창(轟雷槍).

    쉬지 않고 새로운 마법을 발현한 망자의 앞에서, 팔뚝만 한 크기의 금속 창들이 총탄처럼 쏟아져 나간다.

    콰아앙!

    마법의 이름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창들이 두꺼운 철벽과 함께 술식의 구조를 꿰뚫은 것은 순식간의 일.

    푸스스스!

    술식의 결합이 무너지자, 두꺼운 철벽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린다.

    허나.

    “……사라졌군.”

    무너진 철벽 뒤에 있어야 할 장무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감히…… 도망을 치다니…….

    복수할 기회를 놓친 망자, 도민호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가 번뜩였다.

    자신을 죽인 장무선을 잡아야만, 그의 영혼 속 깊숙이 박혀 있는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기 전.

    파앗!

    연구실 바깥의 순간이동 마법진이 푸른빛으로 번쩍였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것은,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알록달록한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

    마탑의 계파 중 하나, 오행회 소속의 마법사들이었다.

    “탑주, 탑주는 어디 있어?”

    “도민호 부탑주가 부활했단 게 사실입니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믿겠어!”

    소란스럽게 나타난 그들은 분노와 기대가 뒤섞인 괴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그들의 시선이 앞에 선 황금색의 고렘을 향해 모여들었을 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회의 마법사들이여…….

    “회, 회장?”

    “정말, 당신이 회장이란 말입니까?”

    고렘의 소름 끼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말투에, 마법사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그대들은 내 유지를 이어 나가게 될…… 사람들이니까. 만나게 되어서…… 반가울 뿐입니다.

    멍한 표정을 짓는 마법사들 앞에서 고개를 한 번 숙인 도민호는, 계약자이자 주인인 진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장무선…… 부탑주, 쫓으실 겁니까?

    “물론. 아스칼론을 되찾아야 하니까.”

    진혁이 굳이 영지를 두고 대전까지 내려온 목적.

    자신의 손에 들어와야 할 갑 급의 무구를 훔쳐갔는데,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탑에서 이미 추적을 시작했어요. 장무선 부탑주가 강력한 마법사긴 하지만, 마탑의 추적을 완전히 뿌리치진 못할 거예요.”

    “……우리도 일단은 함께하겠소. 회장이 살아 돌아온 게 맞는지는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으니까.”

    탑주인 주미선과 오행회의 마법사들까지 함께하자, 도망친 장무선의 행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 마탑의 사택 근처입니다.”

    “좋아요, 내가 직접 가죠.”

    보고를 받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때.

    우우웅!

    어딘가로부터 흘러나온 강력한 기파가 마탑을 덮쳤다.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패도적인 기운.

    “이건…….”

    “장무선 부탑주가 있는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태를 띤 패도적인 기운은 지구상에 단 하나뿐이다.

    적마기.

    갑 급 보구, 독립검 아스칼론이 지닌 특유의 기운.

    그 말인즉.

    ‘아스칼론이 깨어났군.’

    진혁의 눈이 창밖의 노을처럼 일렁이는 붉은 기운을 바라봤다.

    장무선이 마탑에 들어왔을 때, 그는 고작 여덟 살 꼬마 아이였다.

    마탑을 학교와 놀이터 삼아 평생을 살아온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

    ‘마법의 끝을 보고 싶다.’

    하지만, 그의 재능으로도 마법의 궁극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웠다.

    궁극은커녕, 최상급에도 도달하지 못해 부탑주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능이 부족하다면, 재능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지.”

    어떤 인간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마법적 재능을 만들어 내, 스스로에게 심어 주는 것.

    그 오랜 연구의 실마리가, 무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스칼론.’

    독립검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이 검의 진정한 힘은 검이 뿜어내는 용의 기운, 적룡기에 있다.

    극소수만이 남아 있는 에피로나의 상위 종족 중 하나, 적룡의 용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

    우우웅!

    붉은 장검을 손에 쥔 그의 마나가, 술식에 따라 형태를 이루어 나간다.

    동시에,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룡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술식 안으로 어우러진다.

    강철마탑의 술식과 적룡의 기운이 섞여 만들어진 선홍빛 마법이 그의 육체를 감싸 안고는 주변으로 영역을 넓혀 나간다.

    쩌적! 쩌저적!

    형체 없는 기운이 형체를 이루고, 이내 물질의 모습으로 현실에 재현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후…….

    축구장보다 거대한, 붉은색의 생명체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파충류.

    이게…… 용의 힘인가…….

    피 대신 마나가 전신에 흐르는 마법 생물임과 동시에, 마법의 원류이자 궁극인 존재.

    마법의 재능이란 측면에서, 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웅!

    이 힘이라면…….

    마법의 궁극.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전신에 넘쳐흐르는 적룡의 힘이 주는 고양감에, 무선은 비늘로 뒤덮인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쐐애애액!

    저 멀리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래,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리 없지.

    용이 지닌 초월적인 감각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다.

    그의 귀와 눈이 감지한 것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이하면서도 음습한 기운.

    마법이 아니라고 했던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금색의 망자와 서가의 장남을 바라보며,

    마법의 궁극에 도달하는 데 좋은 재료가 되겠어.

    고오오오오!

    거대한 적룡은, 하늘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적룡기를 활용했나.’

    오 층짜리 아파트 너머로 보이는 붉은 용의 몸뚱이를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용의 전신에 감도는 흐릿한 붉은 기운은, 분명 아스칼론의 능력 중 하나인 적룡기.

    원래라면 사용자에게 적룡의 용심이 가진 마나를 주입하는 기능이, 지금은 적룡의 육체를 구현해 내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용이 된 것인가.’

    그리고 저 용의 육체 어딘가에 아스칼론이 숨어 있을 터.

    그렇다면.

    진혁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용을 죽이고, 아스칼론을 되찾는다.’

    생각을 마친 그의 시선이 옆에 선 민호에게로 향했다.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스으으!

    그 말과 함께, 금빛 망자의 몸에서 진한 흑마력이 피어올랐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말을 마친 그의 눈은 푸른색 귀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법을 발동하기도 전.

    팟!

    허공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가죽으로 만든 하얀색 롱코트를 걸치고, 길게 자란 백발을 뒤로 넘긴 여자.

    그러나.

    ‘……인간이 아니군.’

    수많은 인간의 영혼을 마주해 본 진혁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광기(狂氣)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곧.

    “……용의 모습을 흉내 내려 하다니.”

    눈썹을 치켜뜬 그녀의 새하얀 오른손이, 정면으로 내뻗어졌다.

    “역겹기 그지없구나.”

    그 순간.

    콰아아아아!

    뻗어 낸 그녀의 손에서, 백색의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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