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친절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장무선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심지어 탑주도 알아채지 못한 일을…….’
완벽했다.
민호에게 마나 패턴을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를 슬쩍 던져 준 것도, 탑주에게서 엿들은 진혁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흘려 준 것도.
한 사람의 죽음이면 모든 것을 묻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외부인인 서진혁이 이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단 말인가.
“그걸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있나?”
민호의 차가운 눈빛 앞에서,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망령을 미리 붙여 두길 잘했지.’
사실, 도민호의 죽음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망령을 붙여 둔 것은, 언제 아스칼론에 손을 댈지 몰랐기 때문이니까.
설마, 도민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스칼론을 노릴 거라곤 진혁도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아스칼론은 어떻게 할 셈이지?”
결국, 진혁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독립검, 아스칼론을 손에 넣는 것.
그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검의 주인이 주가건 눈앞의 부탑주건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
“나 역시 말해 줄 이유는 없는데.”
“지금까지 한 말이 녹음되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보군.”
진혁의 말은 분명한 협박.
하지만 무선은 겁을 먹는 대신 코웃음 쳤다.
“이 결계 안에선 그 어떤 소리도 녹음할 수 없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술식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대놓고 당신에게 말할 리 없잖아?”
그 말에, 진혁은 품에 숨겨 둔 녹음기를 꺼내 틀어 재생했다.
마치 처음부터 켜지지도 않았던 것처럼, 녹음기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과연, 괜히 강철마탑의 부탑주가 아니야.”
“그러니까, 협박할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거래라면 모를까.”
“거래?”
“강철마탑의 탑주.”
진혁의 물음에 무선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자리를 얻는 데 도움을 준다면, 아스칼론을 주도록 하지. 이 정도면,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 아니겠어?”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스칼론을 손에 쥘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친 무선의 표정엔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이내. 그가 손을 한 번 흔들자, 소리 없이 주변에 펼쳐져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결계가 사라지기 무섭게, 무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다음 진혁을 지나쳐 갔다.
“생각보다…… 더 대담하군.”
멀어져 가는 부탑주의 등을 바라보며, 진혁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곧,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로 향했다.
“그렇지 않나?”
정확히는, 그 위에 얹어져 있던 하나의 망령에게로.
…….
얼어붙은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도깨비불을 바라보며, 진혁은 씨익 웃었다.
강철마탑의 탑주 주미선.
밝은 햇살이 그녀의 연구실을 환하게 비추었지만.
“후우.”
그녀의 마음속은 먹구름처럼 우중충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소영아…….”
자신의 딸이 누군가를 살해하고 구금당한 상황에서, 평정심을 찾기는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것이 강철마탑의 탑주라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 그럴 일을 벌일 애는 아냐.”
딸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아니라, 강철마탑의 탑주로서 볼 때도 그랬다.
부탑주에 올라 차기 탑주 자리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소영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스칼론을 손에 넣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증거가 너무 뚜렷해.’
다른 것은 몰라도, 현장에 남은 마나 패턴은 분명 주소영의 것.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법으로 조작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탑주인 그녀조차도 아직 해내지 못한 일.
조작이라는 한없이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건, 논리와 술식으로 법칙을 뒤트는 마법사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설사 그녀가 의문을 가진다 하더라도,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이 동의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단은, 좀 더 조사해 봐야겠어.”
책상 위에 놓인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선이 입술을 깨물던 그때.
방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요청자, 서진혁.
연구실의 강철문에 장착된 잠금장치에서 들려온 딱딱한 목소리.
“허락한다.”
문을 개방합니다.
미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금장치는 소리 없이 철문을 옆으로 밀어냈다.
곧, 활짝 열린 연구실 입구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흑청색 정장을 걸치고, 한 손엔 주먹만 한 구슬을 쥔 검은 머리의 청년.
서가의 장남, 서진혁.
“서진혁 씨,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죠?”
문을 열어 줬다고는 하지만, 거리낌 없이 연구실 안으로 발을 들이민 진혁을 바라보며 미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혁의 표정은 담담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확인? 아스칼론을 말하는 건가요?”
진혁의 말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사라진 갑 급 보구 아스칼론.
계약의 대가로 내어 줄 보구가 사라졌으니, 진혁이 따지러 온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단지, 찾아온 시점이 문제였을 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데.’
안 그래도 딸의 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그녀다.
진혁이 이곳에 찾아온 건, 불난 집에 헬파이어를 던지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
“아스칼론은 반드시 되찾아 올 테니, 당신은…….”
간신히 분노를 참아 낸 미선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아니, 다른 이야깁니다.”
“다른, 이야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붉게 달아오른 미선의 얼굴에 의문이 차올랐다.
곧.
“마나 패턴을 조작할 수 있는 마법, 존재합니까?”
“당신, 대체 그걸 어디서…….”
진혁의 물음을 들은 그녀의 눈이 커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녀 혼자서만 생각했던 가정 중 하나가 다른 가문의 외부인에게서 나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
진혁의 대답은 짧았다.
“그날의 일을 봤습니다.”
“그날이라면, 아스칼론이 탈취된 날 말인가요?”
“물적 증거는 없지만.”
진혁은 망령을 통해 봤던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스칼론을 탈취하기 위해 숨어든 도민호 부탑주와, 그를 뒤에서 급습해 살해한 다음 아스칼론을 챙겨 간 장무선 부탑주의 이야기.
그 모든 과정을 전해 들은 탑주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몇 분이 지나서였다.
“……모든 게 장무선 부탑주가 벌인 일이라. 그럴듯한 설명이긴 하지만, 당신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군요.”
결국, 증거가 없다면 진혁의 상상 속 가설일 뿐이다.
모든 감시 마법진이 가동을 멈춘 상황에서, 당시의 상황을 실제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증거라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진혁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당신 입으로 증거가 없다고 했을 텐데요.”
“물적 증거는 없지만, 다른 증거는 가진 게 있죠.”
“다른 증거라. 죽은 도민호 부탑주라도 살려 낼 생각인가 보죠?”
미선의 머릿속에, 서서히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피해자인 도민호 부탑주를 되살려 낸다면 훌륭한 증인이 되어 주겠지만.
‘그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야.’
말 그대로, 신화나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 꺼낼 만한 소재는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진혁은 빙긋 웃고는 품에 지니고 다니는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일단, 보여드리죠.”
그 말과 함께, 진혁은 모래처럼 곱게 갈린 금빛 가루가 반쯤 채워진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는 그대로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부었다.
동시에.
스으으!
미소 짓는 진혁의 동공 속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주소영.
마탑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그녀가 이곳, 마탑의 지하 감옥에 구금된 지도 이틀째.
고작 이틀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엔 어느새 짙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도, 빠져나가긴 힘들겠죠.’
현장에 남은 모든 증거가 그녀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탑주의 딸인 그녀조차도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들 만큼 치밀한 수법.
‘대체, 어떻게 마나 패턴을 조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후계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엔, 동료 마법사를 살해한 죄를 물어 마나홀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마나를 움직여 법칙을 비틀어 내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는 마법사에겐 죽음이나 다름없는 형벌.
‘아직, 못 해 본 게 많은데…….’
소영이 다가올 운명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안색이 영 좋지 못하시군요.”
누군가가, 그녀를 가둬 놓은 쇠창살 앞에 나타났다.
“장무선 부탑주.”
“어차피, 조금만 더 지나면 모든 게 밝혀질 일입니다. 굳이 숨겨서 얻을 게 없을 텐데요.”
한때, 그녀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던 마법사.
하지만 지금, 감옥에 갇힌 소영을 바라보는 무선의 눈빛은 싸늘했다.
“……난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잡아떼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모든 증거가 당신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윽…….”
소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장에 남은 마나 패턴.
그것만은, 그녀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으니까.
“지금이라도 죄를 자백한다면, 어떻게든 마나홀만은 유지할 수 있도록 다른 마법사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선은 미소를 지었다.
“오행회 친구들은 좀 어렵겠지만…… 그래도, 탑주님과 함께 설득을 해 본다면 그 작자들도 좀 진정이 되겠죠. 물론, 모든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마나홀을 유지할 수 있다.
부탑주의 직위는 사라지겠지만, 마법사로서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 나갈 수 있다는 말.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무선의 제안은, 그녀에게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다.
단 하나.
‘없는 죄를…… 만들어야 한단 건가요.’
자신의 결백함을 숨기고, 스스로 죄를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소영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많은 시간을 드리진 못할 겁니다. 우선, 내일 다시 찾아오지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선은 작별인사와 함께 몸을 돌려 감옥을 나서려 했다.
강철마탑에 전한다.
감옥에 설치된 마법 스피커로부터,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이, 이건……!”
스피커의 음성을 들은 무선의 눈이 커졌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듯 알 수 없는 오싹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으니까.
“도민호……?”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오행회의 수장.
그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무선의 등골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