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모두가 퇴근한 대덕마법단지의 밤은 어둡고 고요하다.
그것은, 마법단지의 중심에 위치한 강철마탑 역시 마찬가지.
당직을 서는 마법사 몇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는 마탑의 분위기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후우…….”
오늘의 당직 마법사 중 하나, 부탑주 도민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호흡하며 쿵쿵 뛰는 심장을 억지로 안정시킨 그는, 눈앞을 가로막은 철문을 바라봤다.
‘그래, 이건 마도학의 발전을 위해서야.’
우웅!
민호는 속으로 다시 한번 결심을 굳힌 다음, 그의 하복부에 위치한 마나홀에서 마나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마나의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검지를 문 옆의 인식 장비에 갖다 댔다.
마법사의 마나 패턴을 읽어들여 신원을 확인하는 마공학 장비.
마나 패턴을 읽는 중입니다…….
민호가 마나를 불어넣자,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인식장치가 분석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민호는 준비해 둔 술식을 쌓아 올렸다.
이번 일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마력 패턴을 변질시키는 술식.
이 술식을 다뤄 보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지만, 상급의 마법을 다루는 이 품의 마도사에겐 문제되지 않았다.
확인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주소영 부탑주님.
“좋아.”
마법 자아가 부른 이름은 그가 아닌 주가의 후계자였지만,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구축한 마법이 의도대로 작동했다는 말이었으니까.
민호는 불어넣은 마나를 거둔 다음, 소리 없이 열린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강철마탑의 가장 높은 곳, 82층에 마련된 옥상정원.
개방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곳이었지만 마법으로 시력을 강화한 그에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우웅!
민호가 다시 한번 술식을 쌓아 올리자, 정원 곳곳에 설치된 감시마법진들이 동작을 멈췄다.
“후, 성공이야.”
그제야 긴장을 푼 민호의 걸음이 가벼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책하듯 정원을 가로지르던 그의 발걸음이 제자리에 뚝 멈췄다.
거대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 정원의 정 중앙.
우우웅!
그곳에서, 민호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정원 아래 숨겨진, 거대한 마법진을 가동시키기 위해.
“열어라, 세계의 그림자여.’
술식을 완성시킨 그의 입에서 시동어가 완성된 순간.
허공이 갈라지면서 차원 사이에 숨겨진 아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전체가 붉은색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무늬의 장검.
독립검, 아스칼론.
‘드디어…….’
계획이 그의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민호는 흡족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눈앞에 나타난 갑 급 보구를 손에 넣는 것뿐.
‘아스칼론만 있다면, 갑 급 보구를 재현하는 것도 꿈이 아냐.’
그때, 도민호는 마도학계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되리라.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놓인 갑 급 보구를 바라보며, 민호는 탐욕스러운 눈을 빛냈다.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자신의 몸뚱이를 꿰뚫기 전까지는.
“커헉!”
뱃가죽을 비집고 나온 은빛의 칼날을 내려다보며, 민호는 입에서 검은 핏물을 토했다.
“대체, 누구…….”
민호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있는 습격자를 확인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인간의 몸으론 불가능한 일.
곧.
털썩!
‘이, 이렇게는…….’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눈빛이, 점차 흐려져 갔다.
진혁이 대전의 강철마탑에 방문한 지 나흘째.
인근의 호텔에서 나와 강철마탑으로 이동하던 진혁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평소보다 마법사들이 많아.’
원래라면 각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자들.
마탑의 입구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지키고 있는 모습은 마치.
‘경비병같군.’
강철마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멈추십시오.”
진혁이 정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문을 지키고 있던 마법사들이 손을 뻗어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라는 탑주님의 명이십니다.”
“주소영 부탑주를 만나기로 했는데.”
“죄송합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가로막은 마법사들을 바라보던 진혁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말로는 안 되겠는데.’
그렇다 해서 강철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을 외부인인 그가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일.
진혁이 길을 막은 마법사들 앞에서 잠시 고민에 빠져 있을 그때.
“이런, 진혁 씨군요.”
마법사들이 지키고 선 강철마탑의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진혁을 맞이했다.
“이분은 마탑의 손님이십니다. 들여보내시지요.”
“하지만, 부탑주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남자는 문을 지키던 마법사들을 물리치고는, 진혁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진혁 씨.”
“그러지.”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안내를 받아 마탑 안으로 향했다.
파앗!
곧, 두 사람은 순간이동 마법진의 푸른빛과 함께 주소영의 연구실로 이동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강철마탑의 부탑주인 장무선이라고 합니다. 진혁 씨와 주가가 맺은 계약은 오늘부터 제가 담당하게 될 겁니다.”
말을 마친 장무선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주가의 후계자인 주소영과는 달리 지극히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혁의 의문을 풀기엔 부족했다.
“주소영은 어디로 갔지?”
자신에게 아스칼론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그녀는 어디로 가고, 어째서 다른 사람이 나와 있단 말인가.
“그건…….”
진혁의 물음에, 무선은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무선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일 분 정도 지나서였다.
“……주소영 부탑주는, 현재 살인과 절도 혐의로 구금 중입니다.”
“살인?”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진혁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무선은 부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젯밤, 주소영 부탑주가 아스칼론을 몰래 빼돌리려 했습니다. 그걸 막으려던 도민호 부탑주는 살해당했고요.”
“증거는?”
“아스칼론의 봉인해제와 인증에 사용된 마나패턴이 주 부탑주의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군.”
진혁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패턴은 마법사 고유의 지문과도 같은 것.
바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마나 패턴이 일치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혐의를 벗어 내기 어려우리라.
“그러면, 내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지?”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주소영 부탑주가 담당하던 계약은 제가 관할하기로 했습니다. 아스칼론의 소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파악되는 대로 계약을 이행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알았다.”
무선의 설명을 들은 진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품에 넣어 둔 유리병과 영혼석을 꺼내 들었다.
“그럼, 슬슬 시작하지.”
스으으!
흑마력을 끌어올린 진혁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주미선.
한국 제일의 마법 단체 강철마탑의 탑주이자 최상급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마도사답게, 그녀의 표정엔 언제나 여유가 가득했지만.
“소영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주변을 감돌던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
마탑 지하에 갇힌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영은 탑주인 그녀의 딸이자 주가의 차기 가주.
아무리 생각해도, 부탑주인 도민호를 살해하고, 갑 급 무구인 아스칼론을 빼돌릴 만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 말에, 소영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럼, 네 마나 패턴이 어째서 그곳에 있는 건지 설명 좀 해 다오.”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저는 분명히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내일 다시 찾아오마.”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딸의 어두운 표정.
마음의 동요를 다스리기 위해, 미선은 곧장 몸을 돌려 감옥을 나섰다.
곧, 그녀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스칼론의 행방은 찾았나요?”
“아직입니다. 적룡기가 감지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구가 아닌 다른 아공간에 보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남자의 말에, 미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탐지계통의 마법사들을 총동원해 흔적을 쫓고 있으니, 머지않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부탑주만 믿겠어요. 그럼, 난 잠깐 연구실에.”
“예. 들어가십시오, 탑주님.”
남자의 인사를 받은 미선은 지친 표정으로 텔레포트 마법진 위에 올라탔다.
파앗!
이내, 푸른빛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머지않아라. 그게 언제가 될는지.”
장무선.
강철마탑의 마지막 남은 부탑주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직했다.
결국, 오늘도 강철마탑의 마법사들은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마도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진혁의 술법을 총동원했음에도 이 정도라면, 일주일 안에 술법을 분석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그래도, 아스칼론을 찾을 때까진 별일 없겠지.”
기껏해야, 본래 빌려주기로 한 아스칼론 대신 다른 보구를 주는 정도.
그것은 탑주가 해야 할 일이니, 무선이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럼……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면 되겠어.’
강철마탑을 나선 무선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음.”
그는, 자신 앞에 선 남자에게 가로막혔다.
흑청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미청년.
“서진혁 씨?”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물어볼 게 있다.”
무선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진혁은 그 말과 함께 앞으로 다가갔다.
진혁에게서 심상찮은 무언가를 느낀 그의 손이 급히 수인을 맺었다.
우웅!
곧, 무선과 진혁을 둘러싼 무형의 장막이 둘의 주변을 감쌌다.
이 안에서 이야기한 모든 내용이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결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결계부터 치다니.”
“이곳은 마탑의 외부니까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무선의 말에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뚜벅. 뚜벅.
보도블럭 위로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묘하게 무선의 신경을 긁어댔다.
이내, 진혁이 무선의 앞에 멈춰 섰을 때.
웃음을 머금은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아스칼론은 언제 줄 생각이지?”
“아, 그것 때문이셨습니까.”
그 말에, 무선은 긴장을 풀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말씀드렸듯이, 아스칼론의 행방이 밝혀지는 대로…….”
하지만.
“도민호를 죽이고 아스칼론을 챙겨 갔으니, 계약에 응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만.”
진혁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당신.”
장무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