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독립검, 아스칼론.
에피로나에서 넘어온, 본디 용살검(龍殺劍)으로 불리던 붉은색의 장검.
백 년 전, 독립전쟁의 한 축을 맡았던 전설의 보구가 진혁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초대 가주님께서 휘둘렀던 검인가.’
최초의 다섯 엽사 중 하나, 서문휘가 독립전쟁에서 사용한 검.
정확히는 주가의 소유였던 것을 빌려 쓴 것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서가와 진혁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은 아니다.
아스칼론의 붉은 검신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오오라. 적룡기(赤龍旗)를 바라보며, 진혁은 확신했다.
‘놈의 힘이라면, 외눈박이를 잡는 데 유용하다.’
굳이 직접 휘두르지 않더라도, 지니고 있거나 망자들에게 쥐여 주는 것만으로 강력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문제는 하나뿐.
“그래서, 뭘 도와주면 되는 거지?”
주소영.
그리고 주가와 계약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
소영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 고렘이 작동하는 걸 나와 우리 연구원들 앞에서 시연해 주세요. 우린 거기서 데이터를 얻은 다음 연구에 사용할 거니까.”
“기간은?”
“일주일.”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용아병을 그녀와 주가의 마법사들에게 선보이는 것뿐.
갑 급 보구를 얻을 수 있는 대가라기엔, 거저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다만.
진혁은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마법을 익히진 않았지만, 새로운 마법을 창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는 알고 있다.
일주일은 마법 하나를 새로이 창조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
심지어, 진혁이 그녀에게 보여 주려는 것은 마법도 아니지 않은가.
“그거면 충분해요.”
하지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술법이 대단한 건 맞지만, 그걸 눈앞에서 보고도 못 베끼면 마법사가 아니라 바보니까요.”
말을 마친 소영의 얼굴은 자신감과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혁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이미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그것 참, 기대되는군.”
어디, 열심히 해 보라고.
소영을 바라보며, 진혁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비틀었다.
한국 유일의 마탑이자 세계 오 대 마탑 중 하나인 강철마탑.
높이만 100층 가까이 되는 거대한 빌딩의 지분 과반수는 당연히 창립자이자 탑주인 주가의 소유다.
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오행회.’
한국 마법의 종주인 주가를 도와 마탑을 세운 마법사들.
그들이 가진 강철마탑의 지분이 주가에 비해 적다곤 하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탑주.”
진혁이 마탑을 방문한 다음 날.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오행회의 회장이자 세 명의 부탑주 중 하나인 도민호는, 탑주인 주미선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다른 가문에 보구를, 그것도 갑 급인 아스칼론을 넘기겠다니요! 그게 어떤 물건인지, 탑주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공간에 감춰 놓은 아스칼론은 주가뿐만 아니라 강철마탑의 일각을 차지한 오행회에게도 중요한 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 누구에게 들은 거죠?”
강철마탑의 탑주.
주미선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분명, 그 일은 주가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일일 텐데, 신기하군요.”
허나, 표정과 달리 도민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
주가 내에서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던 사업을, 부탑주라고는 하지만 외부인이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민호는 자신을 노려보는 탑주 앞에서도 몸을 굽히지 않았다.
“아스칼론은, 갑 급 보구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탑주와 마주친 그의 눈빛엔, 열망이 담겨 있었다.
“한국 마도학계의 수준을 이백 년은 뛰어넘을 수 있는 물건을, 마법도 쓸 줄 모르는 무지렁이들에게 넘기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갑 급의 보구를 자신의 두 손으로 재현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러나.
“그게, 끝입니까?”
주미선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봤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군요.”
“탑주!”
나가 달라는 그녀의 말에 도민호가 고함을 지른 순간.
“도 장로.”
미선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주가의 일을 어디서 엿들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허나.”
금강화(金剛花).
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다이아몬드처럼 차가운 그녀의 기세에, 민호의 입이 얼어붙었다.
“아스칼론은 마탑의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초대 가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주가의 것이지.”
심장을 찌르는 듯 날카롭게 들어오는 그녀의 말을, 도 장로는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마탑을 세우는 데 그대들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나, 주가의 일에 손을 대려 하진 마십시오. 이건 경고입니다.”
그 말과 함께, 미선은 시선을 거두고 의자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더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
“……탑주의 뜻은 알겠소.”
그 말을 끝으로, 도민호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곤 탑주의 연구실을 나섰다.
파앗!
순간이동 마법진을 가동한 민호가 다섯 층 아래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민호는 잔뜩 일그러트린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스칼론이, 주가의 것이라고? 누가 그렇게 결정했지? 그건 마법사 모두의 것이야.”
한국 마도학계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려 줄 열쇠.
하나의 가문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은 결코 아니다.
사실이 어떻건, 도민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 순 없지. 암, 그럴 순 없고 말고…….”
갑 급 보구를 재현해 내고, 한국의 마법 수준을 끌어 올릴 선구자가 되는 것.
마법에 입문했던 순간부터 추구해 왔던 목표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스칼론은 주가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냐.”
그러니.
더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도민호의 쭉 째진 눈에, 시퍼런 빛이 번뜩였다.
서진혁이 주소영과 계약을 맺은 지 사흘째.
그동안, 진혁은 소영의 요구대로 그녀와 마법사들 앞에서 용아병의 술법을 시연했다.
여명이무기의 가루가 조금 소모되긴 했지만, 마탑에서 그만큼의 보상을 지급하기로 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소영과 주가의 마법사들에게 있었다.
“아니…… 대체…….”
자신만만했던 처음과는 달리, 눈앞에 나타난 금빛 기사를 마주한 그녀의 표정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덧 사흘째의 마지막 시연.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서히 계룡산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반응은?”
“……없습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소영도, 소영 휘하의 마법사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첨단의 마공학 장비들도.
눈앞에 나타난 술법의 상세한 정보는커녕, 그 원리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마나조차 사용하지 않는 것을 과연 술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금색의 고렘에게선, 그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가 아닌 신의 힘, 신성력을 빌려 사용하는 신법조차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기적을 행하진 못한다.
‘이건……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에요. 내가 미쳤지.’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 같아선, 고작 일주일의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에게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 주고 싶을 정도.
“표정이 좋지 않은데, 문제라도 있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서진혁의 미묘한 웃음은 그녀의 머리를 더욱 뜨겁게 했다.
“……아뇨, 아무 문제도 없어요. 내일도 오늘처럼만 해 주시면 됩니다.”
말과는 달리, 진혁을 바라보는 소영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지만.
“알았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도록 하지.”
그녀야 어쨌건, 나흘 뒤에 아스칼론을 얻게 될 진혁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어떻게든 술법의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소영을 뒤로하고, 진혁은 용아병을 다시 가루의 형태로 되돌린 다음 몸을 돌려 연구실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부탑주.”
한 남자가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선 그의 길을 가로막았으니까.
“당신은…… 서진혁 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마탑의 부탑주를 맡고 있는 도민호라고 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진혁의 얼굴을 마주한 남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불만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잠깐이었지만, 진혁은 민호의 눈동자 사이로 스쳐 지나간 경멸의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서진혁이라고 한다.”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스으으!
심장에 가득 찬 흑마력.
그중 한 조각을 끌어내자, 진혁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가 쏟아져 나왔다.
“헙!”
진혁의 눈으로부터 전해지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은, 이 품의 엽사인 그조차도 견디기 어려웠다.
“다음부터는, 불만이 있다면 말로 해 줬으면 좋겠군.’
동상처럼 굳어 버린 민호를 향해 낮게 뇌까린 진혁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러나.
“……잠깐,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도민호는 새햐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벌벌 떨면서도, 해야 할 말을 잊지는 않았다.
“당신, 고렘을 부린다고 들었습니다.”
“고렘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주 부탑주와 일을 한다는 이야기도요.”
“도 부탑주, 서진혁 씨는 우리 마탑의 손님이에요.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도민호의 말을 듣고 있던 소영이 중간에서 끼어들려 했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주 부탑주를 믿지 마십시오.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이니까.”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진혁의 등 뒤에서 분노한 소영의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민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젠가, 제 말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당신……!”
그 말을 듣고 재차 소영이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진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고는, 눈앞의 젊은 마법사를 내려다봤다.
“그건 당신이 할 판단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이지.”
그 말을 끝으로, 진혁은 민호를 지나쳐 문밖으로 사라졌다.
‘도 부탑주, 당신 대체……!’
연구실의 철문 너머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소영의 고함 소리.
‘주가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건가.’
부탑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하나.
‘아스칼론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스으으!
생각을 마친 진혁은 품속의 수정구슬에 흑마력을 불어넣었다.
—……!
‘가라.’
구슬 밖으로 빠져나온, 도깨비불처럼 시퍼렇게 타오르는 망령을 바라보며, 진혁은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