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엽사대회가 막을 내린 지 일주일.
얼마 전까지 멸망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한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백두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다섯 엽사 가문이 언론을 움직인 덕분.
윤가의 가주가 마인이 되어 백두산을 폭발시키려 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그 대신, 언론과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화젯거리를 신나게 물어뜯었다.
“서진혁 그 사람,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이 품 엽사가 됐대.”
“에이, 그게 말이 돼? 무슨 엄마 뱃속에서부터 마나를 모은 것도 아니고.”
“더 대단한 게 뭔지 알아?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식물인간이었단 거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아냐?”
서진혁.
엽사의 자격을 얻은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대한협사회장이 직접 수여하는 이 품의 자리를 거머쥔 미청년.
거기에, 서가라는 든든한 배경과 십 년 동안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는 독특한 이력까지.
평범한 사람들과는 모든 것이 다른 그에게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온통 팀장님 얘기뿐이에요. 조만간 방송 출연도 하셔야겠는데요?”
주연은 재밌어하는 표정을 짓고는, 나무에 기대 있던 진혁에게 태블릿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포털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신문 기사들.
그중 절반이 넘는 기사에, 서진혁의 이름과 사진이 박혀 있었다.
[서진혁은 어떻게 이 품이 되었나?]
[서진혁, 한국의 신성이 나타나다.]
[“야, 너도 엽사 할 수 있어.” 화제의 이 품 엽사, 서진혁과의 인터뷰.]
“마지막 기사는 어디에서 쓴 거지?”
“익스플로러요.”
“법무팀에 연락해서 처리하도록. 난 저런 인터뷰 한 적 없으니까.”
태블릿 화면 곳곳에 박힌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슥 훑은 진혁은 그 말과 함께 손을 휘젓고는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행동과는 달리, 그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쁘진 않군.’
오대 가문이 진혁을 아이돌처럼 내세운 이유야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약간의 유명세를 얻어 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하기에,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인지도는 꽤 유용한 도구였으니까.
‘결국, 보조일 뿐이지만.’
진혁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다름 아닌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제…… 거의 완성되었어.’
마치 과수원처럼 줄지어져 늘어서 있는 검은 나무들.
진혁에게 충분한 흑마력을 공급해 줄 사령수들이, 지하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지의 완성이 머지않았다는 증거.
이미, 사령수가 보내 오는 순도 높은 흑마력이 진혁의 검은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영지를 완성시키면, 더 높은 경지의 망자들을 준비해야겠지.’
용아병은 분명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주력으로 사용하기엔 흑마력과 재료의 소모가 너무 심하다.
파슬란이 만들어 낸 비술이 그 소모를 최대한 억제한다지만, 영원히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망자의 전투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으니까.
‘화염사자의 사체를 온전히 챙길 수 있었다면 어렵지 않았겠지만…….’
놈의 몸뚱이는 에플리오네가 쏘아 낸 화살에 의해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을 급 괴수를 찾으러 돌아다닐 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 그리고.”
태블릿을 거둬들인 주연이 재차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주소영 부탑주에게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팀장님을 뵙고 싶다고…….”
“분명, 지난번에 거절했을 텐데?”
주가의 후계자이자, 주소영이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지난 엽사대회부터.
진혁이 꺼내 든 용아병을 본 이후, 그녀는 일주일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해 왔다.
하지만 진혁에겐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알려 준다 해도 써먹지도 못할 터.’
용아병을 일으켜 세우는 비술은 마법이 아닌 사령술의 것이다.
망자를 움직이게 하는 힘, 흑마력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알려 준다 한들 그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리라.
“난 만날 생각이 없다. 다음부턴 굳이 보고하지 말도록.”
진혁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다시 나무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쐐애애액!
하늘로부터,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뭐지?’
상념에서 깨어난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곧, 그의 눈에 무언가가 지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팀장님, 물러서십시오!”
옆에 있던 주연이 진혁의 앞을 가로막고는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색의 오러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이내 사람 하나를 가릴 크기의 동그란 벽을 세웠다.
칠성무(七星武)
반탄벽(叛彈壁)
적의 공격을 그대로 적에게 되돌리는 칠성무의 기술.
진혁과 그녀 자신을 반탄벽으로 가린 그녀의 시선이, 지상을 향해 급강하하는 무언가를 노려봤다.
그러나.
빠르게 낙하하던 무언가는 지면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속도를 서서히 줄여 나갔다.
이내.
탁.
그 무언가…… 아니, 여자는 지상에 살포시 착지했다.
진혁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만날 생각이 없다고 했을 텐데, 주소영.”
마법사의 상징인 로브, 그중에서도 금속성을 상징하는 은색을 걸친 단발의 여인.
“대체, 왜 절 피하는 거죠? 당신이 가진 그 기술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야기 정돈 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진혁과 눈을 마주친 그녀의 얼굴은 모멸감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반도의 마도학을 이끄는 주가의 후계자이자 마탑의 부탑주인 그녀를 문전박대할 사람은 그동안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소영을 마주한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알려줘 봐야 쓰지도 못할 기술이다.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한국의 마도학을 이끄는 우리 주가가, 정말 당신의 기술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지금?”
소영은 발끈했다.
진혁이 그녀에게 한 대답은, 곧 주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무식하게 칼과 주먹이나 휘두를 줄 아는 서가의 핏줄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진혁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애당초, 이건 마법도 아니고 고렘도 아니다. 주가가 다룰 힘이 아냐. 돌아가라.”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내저은 진혁은 그대로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
그러나.
“……우리 주가가 못 하는 건 없어요. 당신이 가진 기술이 유출되는 게 두려운 거라면, 마나의 계약을 맺는 것도 좋겠죠.”
그녀, 주소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진혁이 해낸 일은 마법사의 눈엔 불가능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상급 정령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의 출력을 낼 수 있는 소형 마력 엔진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고렘은 시작일 뿐이다.
마력엔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산업에 혁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적과도 같은 기술.
얻을 수만 있다면, 한국 마도학의 선두에 선 주가의 위치를 백 년은 유지할 수 있으리라.
“……원한다면, 주가의 보구도 빌려 줄 수 있어요.”
“보구는 굳이 필요 없는데.”
“갑 급이라도요.”
순간.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진혁이 눈을 떴다.
“갑 급 보구라.”
그의 눈이 입술을 굳게 앙다문 주소영의 얼굴로 향했다.
“주가의 상황이 그 정도로 급한 줄은 몰랐는데. 가주의 허락은 받고 말하는 건가?”
“이미 탑주님께 허락받은 사항이에요. 당신이 가진 그 기술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말을 마친 소영의 눈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의로 활활 타올랐다.
진혁은 그 모습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이야기 정돈 들어주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구.
기계공학과 부여마법의 융합학문인 마공학의 산물.
마법사가 아니어도 마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적의 물건이기에, 목숨을 걸고 괴수와 싸우는 엽사라면 보구 한두 개쯤은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장비.
그리고.
“여기군.”
마법의 도시, 대전에 내려온 진혁이 도착한 곳은 한국 보구의 절반을 생산하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강철마탑]
정문에 걸린 이름답게 차가운 금속빛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빌딩.
대덕마법단지의 중심이자, 충청도와 대전을 기반으로 삼은 주가의 본가(本家)가 바로 이곳이었다.
“제법 오래 걸릴 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이곳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팀장님, 혼자는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옆에서…….”
“주가의 후계자가 마력계약서에 서명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설득할 여지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진혁의 태도에, 주연은 작게 한숨 쉬고는 차를 돌려 빠져나갔다.
곧, 홀로 남은 진혁은 마탑의 굳게 닫힌 철문을 향해 걸어갔다.
세한보안 토벌 3팀 팀장 서진혁, 입장 허가 확인. 환영합니다.
마법자아의 딱딱한 기계음성과 함께 두꺼운 강철 문이 소리 없이 옆으로 열렸다.
이내.
파앗!
눈앞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은색 로브를 걸친 단발 여인, 주소영.
“날이 춥네요, 어서 들어오시죠.”
진혁은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소영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밟고 있는 마법진 위로 발을 옮겼다.
곧.
파앗!
마나의 파란빛이 한 번 더 번쩍임과 동시에, 눈앞의 광경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 온통 강철로 이루어진 좁은 방이었던 곳.
하지만, 지금 진혁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마탑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습.
‘순간이동인가.’
진혁은 작게 감탄했다.
지구에 마도학이 생겨난 지 백 년이 흘렀지만, 아직 대중화되지는 않은 마법을 이토록 쉽게 사용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진혁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소영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색했다.
“음, 어차피 계약서는 이미 썼으니까, 미리 대가를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요.”
우웅!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녀가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수인에 담긴 술식에 따라 그녀의 마나홀에 저장된 마나들이 서서히 마법의 형태를 이뤄 나갔다.
이윽고.
“열어라, 세계의 그림자여.”
소영의 입에서 마법의 시동어가 내뱉어졌을 때.
파지지직!
마탑의 주변을 뒤덮고 있던 하얀 구름들이,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밟고 있는 이 공간이, 현실이 아니라 아공간 속이라는 증거.
곧.
‘저건.’
검게 물든 세상 속에서, 진혁은 홀로 붉게 빛나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검(劍).
검신부터 칼날받이, 손잡이까지 온통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양손 검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모를 리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나고 자라 온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물건.
‘독립검(獨立劍).’
갑 급 보구, 아스칼론.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