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과연 서가답구나. 허풍까지 아버지랑 똑같이 닮아 있다니.”
진혁의 호언장담에, 반대편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윤이랑은 코웃음 쳤다.
짧은 시간 동안 제법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삼 품의 엽사다.
마인의 길을 택했다곤 하나, 정령사의 한계를 넘어 현계에 정령왕을 강림시켜 낸 그와 비교하면 애송이에 불과한 자.
진혁의 말이 허풍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단, 뒤에 있는 요정이 더 문제지.’
신궁, 에플리오네.
요정의 대장로답게, 그녀의 궁술과 마법, 정령술은 일 품의 엽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허세만 가득한 삼 품 엽사 따위에 비하면, 분명 주의해야 할 상대임엔 틀림없었다.
그러나.
촤악!
진혁은 자신을 비웃는 마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손에 쥔 유리병과 보석을 허공에 집어 던졌다.
동시에.
그의 빈손이 옆에 있던 에플리오네의 어깨를 짚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갑작스런 진혁의 행동에 요정의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지만.
스으으―!
“이건…….”
에플리오네의 몸에 머물고 있던 흑마력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그녀의 눈빛은 놀람으로 바뀌었다.
두근! 두근!
진혁의 명치 어림에 자리한 검은 심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와 요정의 흑마력이 섞여 하나가 되었다.
이내, 진혁의 의지가 둘의 흑마력을 바깥으로 투사했다.
스으으으―!
그물처럼 퍼져 나간 흑마력이 향한 곳은, 허공에 뿌려진 유리병과 그 안에 담긴 여명이무기의 뼛가루.
쨍그랑!
허공에서 서로 부딪힌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 깨져 버리고, 안에 들어 있던 금빛 가루와 영혼석 사이로 흑마력이 스며들었을 때.
꾸득! 꾸드득!
망자의 힘을 접착제로, 두 개의 영혼석을 핵으로 삼아 뭉쳐 든 금빛의 구체가 진혁의 의지에 따라 모습을 바꿔 나갔다.
두 팔이 양쪽으로 뻗어 나가고, 두 다리와 머리가 위아래로 자라난다.
찰나의 시간 동안, 허공에 뿌려진 금빛 가루들은 두 명의 인형(人形)이 되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파슬란의 비술로 만들어 낸 망자들 중 하나, 용아병.
과연, 주군이오! 이토록 강력한 힘이 육체에 깃들어 있다니!
새로운 육체를 얻은 자이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진혁의 머릿속을 울렸다.
적게 잡아도 이 품의 엽사와 비슷한 출력을 낼 수 있는 육체였으니, 그가 기뻐하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진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오래 버티진 못하겠군.’
흑마력은 망자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
망자의 출력이 강해지는 만큼, 그 소모도 극심해진다.
급한 대로 에플리오네의 몸에 깃들어 있는 흑마력을 빌려 왔지만, 두 용아병의 힘을 최대한 끌어오기엔 부족한 양.
그렇기에.
‘빠르게 끝낸다.’
진혁에겐 망설일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간다.”
그의 입에서 한마디 명령이 내려진 순간.
타앗!
두 인간과 두 망자, 한 요정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윤이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가의 가주였지만, 이제는 인류를 배신하고 마인이 된 자.
마인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마인이 가진 강력한 힘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마기가 아니었다면, 내 평생 불의 정령왕을 소환할 일은 없었겠지.’
마치 모닥불에 끼얹은 휘발유처럼, 윤이랑의 몸에 깃든 마기는 그가 수십 년간 마나홀에 모아 둔 정령력을 더욱 강력하게 변질시켰다.
용심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마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
최소한, 정령왕이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이 백두산의 신이요, 마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놈은, 이걸 견디는 거지?
콰아아아!
윤이랑이 인상을 구기며 손을 한 번 휘젓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불꽃의 여인이 그의 동작을 흉내 냈다.
그와 함께 쏟아지는 수백 발의 불덩이들.
청백색으로 화려하게 타오르는 정령왕의 불꽃은, 그 하나하나가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금색의 인형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르르륵!
초고온의 불덩이가 금색 인형을 단숨에 집어삼킨다.
불의 정령왕이 가진 순수한 불꽃에 노출된 인형들은, 금세 자신의 형태를 잃고 금색 가루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이내, 두 금색 인간이 달려오던 자리에 남은 것은 모래처럼 반짝이는 금빛 가루뿐.
누가 보더라도, 기능을 잃고 소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런데, 어째서…….’
윤이랑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이미, 몇 번이고 저 금색의 인형들을 부숴 왔으니까.
그럼에도,
꾸득! 꾸드드득!
바닥에 쌓인 가루들이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갖추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거지? 부숴도 부숴도 다시 살아난다니……!’
마법으로 만들어진 무인 병기, 고렘이라 하더라도 정령왕이 쏘아 내는 초고온의 업화(嶪火)를 직격으로 맞고 멀쩡할 순 없다.
그런데.
어째서, 저들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파앙!
파공성과 함께 쏘아지는 수십 발의 하얀 화살들.
그것을 시작으로, 온갖 종류의 초상 능력이 윤이랑과 정령왕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정령왕의 힘에 비하면 하찮아 보이는 수준이었지만, 윤이랑의 육신을 부수기엔 충분한 힘.
‘놈들, 어느새 기운을 차렸어.’
콰아앙!
다섯의 일 품 엽사들과 에플리오네가 쏘아 낸 공격들이 푸른색 불꽃과 맞부딪히며 폭발한다.
하지만, 윤이랑은 온전히 그곳에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냉기와 열기를 뿜어내는 검을 쥔 채 한 발씩 걸음을 내딛는 금색의 전사들.
그리고.
‘미르야…….’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과 정령왕 사이의 연결을 방해하려 드는 그의 아들.
정령왕의 손짓 한 번이면 산 채로 태워 버릴 수 있을 만큼 미약한 힘이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쿠구구궁―!
잠들어 있던 백두산의 떨림이 점차 강해진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간다면, 백두산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유황과 잿가루로 한반도를 뒤덮으리라.
‘그러면, 모든 게 끝이다.’
복수도, 삶도, 오명도.
모든 게 용암과 화산재 아래로 가라앉게 되리라.
‘내 아들, 가문까지도.’
그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이랑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한 줄기의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한 줄기의 의심은 곧 여러 줄기로 갈라지고, 의심의 균열은 곧 마음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내.
피융!
균열은 돌이킬 수 없는 빈틈을 만들어 냈다.
푸욱!
“……이런.”
응축된 오러로 코팅된 백색의 화살이 윤이랑의 오른팔을 훑고 지나간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툭!
일 품의 엽사가 지닌 강건한 육체도, 극도로 응축된 오러의 날카로움을 이겨 낼 수는 없다.
용심을 쥐고 있던 오른팔이 잘려 나가듯 바닥에 떨어진 순간.
—……!
공간이 찢어지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불의 정령왕 셀리아나의 거대한 영체가 종이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하하.”
결국, 이럴 운명이었던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한 줌 불꽃과 함께 사라진 셀리아나의 흔적을 바라보며, 윤이랑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우웅―!
그를 향해 달려드는 두 망자의 검을 맞이하며.
“피해 상황은?”
“부상자 넷, 사망자 하나. 총 다섯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자?”
“윤가의 윤이랑 가주……입니다.”
“……그자는 마인이야. 사망자 목록에서 지우도록 하게.”
“예.”
덜컥!
“후우.”
광복관의 본관 21층에 자리 잡은 응접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곳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던 대한엽사회의 장, 최현은 직원이 나감과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어.”
진심이었다.
마인이 된 윤가의 가주와 산봉우리를 넘어 몰려든 괴수 무리.
그리고, 통제에서 벗어난 백두산까지.
수많은 위험 요소들 중 하나라도 해결하지 못했다면, 그가 앉아 있는 광복관은 이미 백두산의 용암과 한 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저어 끔찍한 상상을 털어 버린 그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진혁…… 그 친구, 정말 만만치 않아.”
윤이랑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신궁의 화살이었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을 만들어 낸 것은 서진혁, 그였으니까.
고작 삼 품의 엽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 분명히 아니지.”
생각에 잠겨 있던 최현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밑의 서랍 중 하나를 열어젖혔다.
서랍에 들어 있는 것은, 우윳빛을 띤 직사각형 모양의 얇은 플라스틱 조각들.
마치 대리석처럼 반들반들한 질감이 인상적이었지만, 녀석의 특징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우우웅―!
손바닥만한 조각 하나를 집어든 최현이 마나를 끌어올리자, 조각의 색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백색의 도화지 위로 검은 글자들이 춤을 춘다. 도화지의 한쪽 구석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들어 간다.
대리석처럼 매끈했던 플라스틱 위엔, 어느새 수많은 글자와 그림, 사진들이 자리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제법…… 기대가 되는군.”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
그중 한구석을 채우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최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팀장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놀란 표정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는 주연에게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손에 들린 한 장의 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서진혁]
[이 품]
[대한엽사회 인]
그의 품계가 또다시 한 단계 상승했다는 증명이,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렌, 이 품이면 국제등급으로 A랭크죠?”
“네, A랭크의 헌터는 전 세계적으로도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와아, 그렇게 들으니까 좀 대단해 보이는데요…….”
옆에서 렌의 설명을 들은 클레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언젠가 자연히 얻게 되었을 것이다. 별 의미는 없지.”
허나, 진혁에겐 그저 얇은 플라스틱 조각일 뿐.
이 품이니, 일 품이니 하는 등급 놀음은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진혁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곧, 영지가 완성되겠군.’
영지의 사령수로부터 전해져 오는 흑마력의 세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 속도대로라면, 머지않아 진혁이 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리라.
‘그때가, 시작이지.’
에피로나 어딘가에 있을 갑 급 괴수, 외눈박이를 토벌하는 계획의 시작.
십 년을 기다려 온 복수를 시작할 시기가, 서서히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진혁.”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진혁의 시선이 별관의 저택 밖, 대문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윤미르.’
윤가의 하나 남은 후계자.
아니, 이제는 차기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
그의 타오르는 눈이, 진혁과 마주했다.
“무슨 일이지?”
상대는 자신에게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자.
이 자리에서 진혁을 공격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팀장님, 조심하십시오.”
둘 사이의 미묘한 기운을 느낀 주연이 살며시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고맙다.”
미르는 진혁에게 달려드는 대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몇 초간의 침묵.
그것을 끝으로, 윤미르는 다시 몸을 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싱겁군.”
사라진 윤미르의 자리에 남은 정령의 흔적.
금속 바닥 위로 톡톡 튀어오르는 노란 스파크를, 그는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