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강화도의 개발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수가 사라진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세한그룹의 주도하에 강화도의 평지 위엔 수많은 중장비와 건축자재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은, 서진혁이 강화도의 서쪽에 지정해 둔 출입 금지 구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나무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늘어선 것이, 멀리서 보면 과수원이나 공원으로 착각할 법한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딱딱! 딱딱딱!
살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백골만 남아 움직이는 스켈레톤 무리.
망자로 부리던 괴수의 사체들은 대부분 처분했지만, 그러고도 상당한 숫자의 망자들이 남아 사령수의 숲을 가꾸고 있었다.
그리고.
“심심하구만, 그래.”
숲의 중심에서 망자들을 부리던 거대한 해골, 자이츠는 망자가 된 뒤 처음 찾아온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죽었으니 검을 수련한다 해서 실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쟤네랑 놀기엔 재미가 없고…….
여기 모인 스켈레톤들 하나하나에 주군 진혁의 가문, 서가의 엽사들이 깃들어 있다.
그런 만큼 제법 실력은 있는 편이었지만, 사용하는 육체 자체가 압도적으로 차이나다 보니 일방적인 승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주군도 참, 나도 데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오.
입맛을 다실 혀도 없는 해골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무를 옮기고 땅을 파는 스켈레톤을 바라보던 그때.
쐐애애액―!
으응?
멀리서 들려온 익숙한 소리에, 자이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위에서 점처럼 보이던 검은 무언가가 점차 그에게로 다가왔다.
곧, 자이츠는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멜리나?
자신과 함께 주인, 진혁을 따르는 천둥비룡.
모두 물러나라, 물러나!
그녀가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지면으로 돌진해 오자, 당황한 자이츠는 급히 스켈레톤들을 뒤로 물렸다.
곧.
쿠우웅!
거의 수직으로 낙하한 천둥비룡은 반쯤 추락하듯 거칠게 착륙했다. 자이츠는 모래 먼지 속에 파묻힌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주군한테 가 있는 거 아니었나?
주인 명령이야, 빨리 타.
명……령?
적이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시간이 없어.
계속된 질문에 멜리나는 짜증을 냈지만, 그 말을 들은 자이츠는 오히려 신나 했다.
결국, 주군이 날 불러 주셨군. 크하하핫!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어!
이미 죽은 망령일 뿐이지만, 생전에 전사이자 기사였던 자이츠에게 전투는 삶의 일부.
그늘에 앉아서 나무 심는 스켈레톤이나 구경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이었다.
신이 난 자이츠는 그대로 천둥비룡의 배에 매달린 곤돌라에 타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너, 뭐 하는 거야?
그 모습을 본 멜리나는 기겁하며 몸통을 옆으로 돌렸다.
뭐 하는 거냐니? 조금이라도 빨리 주군께 가려는 몸짓이거늘.
하아…… 너, 주인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어?
어리둥절해 하는 자이츠를 보며, 멜리나는 비룡의 거대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그 쓸데없이 커다란 몸뚱이 말고, 영혼석만 오라고 했단 말야.
여, 영혼석만?
그래,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자이츠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어딘가를 향해 턱짓했다.
저것도 같이 가져와야 하고.
그녀가 가리킨 곳에 놓여진 것은, 평범한 상자 하나.
상자의 틈새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엽사는 괴수를 사냥하는 존재다.
백여 년의 시간 동안 발달하고 진화해 온 초상 능력과 대 괴수 전술은 그들의 사냥을 손쉽게 만들어 주었지만.
“빌어먹을.”
광복관의 성벽 위에 선 엽사들이 해야 할 일은, 사냥이 아니었다.
“더럽게 많네, 진짜. 요즘 시대에 저렇게 많은 괴수를 볼 일도 없을 텐데.”
백두산의 봉우리 너머로부터 달려드는 괴수의 파도를 마주한 채, 두정갑의 탑승석에 앉은 설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로만 들었던 괴수와의 전쟁이 이랬을까.
그들은, 사냥이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착호갑사대장에게. 탐지 결과, 현재 산을 넘어온 괴수는 삼천 마리 내외로 파악됨. 절반 이상의 괴수는 아직 봉우리 너머에 남아 있음.
“더럽게 많네, 진짜. 확인.”
그녀의 오라비, 이한의 무전에 답한 그녀는 옆에 걸어 둔 곰방대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정신을 맑게 해 주고 마나의 순도를 높여 주는 이가의 비전 중 하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는 앞에 놓인 조종간을 양손으로 쥐었다.
“천자총통 발사 준비. 목표는 전방의 괴수 무리. 신호에 따라 일제사격 뒤 자유롭게 사격하도록.”
존명.
존명.
지이잉―!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부하들의 대답과 함께, 설화가 탄 두정갑의 마력엔진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울어댔다.
[천자총통 충전 완료.]
곧, 두정갑에 장비된 마법 자아가 명랑한 목소리로 전투준비를 알린 순간.
“발사.”
그녀는 조종간 아래에 달린 방아쇠를 당겼다.
콰르르릉!
이가의 정예인 착호갑사대.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자들만이 탑승할 수 있는 두정갑의 어깨 위 마력포가 불을 뿜었다.
콰르릉! 콰르르릉!
그녀의 것을 시작으로, 성벽 위에 줄지어 늘어서 있던 강철의 무사들이 연달아 어깨에서 번개를 토해 냈다.
효과는 분명했다.
콰아앙!
마력포에서 쏘아져 나간 푸른 번개가 뭉쳐 있던 괴수들을 집어삼켰다. 수십 개의 번개가 일시에 폭발하자, 봉우리에서 밀려오는 괴수의 파도에 벌집처럼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파도에 생긴 구멍은 새롭게 몰려든 괴수들로 채워졌다.
“빌어먹을, 더럽게 많네. ”
하지만 이미 예상한 일.
설화는 당황하지 않고 놈들이 근접할 때까지 천자총통의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끼이이이!”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서, 괴수 특유의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빨리도 왔네.”
허나, 그들이 아군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설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자, 달려! 늦는 놈은 오늘 밥 없을 줄 알아!”
유재준.
병 급의 비룡 중 하나, 서리비룡의 등에 올라탄 그의 주변으로 색색의 비룡과 엽사들이 무리 지어 날고 있었다.
한반도의 북부 대부분을 담당하는 유가의 자랑 중 하나, 비룡대였다.
공중을 전장으로 삼는 그들의 전투방법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콰아아아―!
뿔 혹은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속성의 줄기들.
마치 지상을 폭격하는 폭격기처럼, 비룡들이 쏘아 낸 공격이 괴수로 가득 찬 지상을 태우고 얼리고 녹여 냈다.
날개 달린 괴수들 몇이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모두가 병 급의 괴수로 구성된 비룡대에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키이이이!”
“크아아아아아!”
그럼에도, 괴수의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수십의 마력포와 비룡으로 저지하기엔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검은 파도가 광복관을 둘러싼 성벽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십 분.
성벽 아래에 몰려든 괴수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성벽 위로 올라섰다.
주가의 마법사들이 구축한 결계는 여전히 건재했지만, 수많은 괴수들을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태.
“공격.”
서가의 장남, 서진혁이 명령을 내린 것은 그때였다.
스릉!
세한그룹의 중심인 세한보안.
그곳에 소속된 엽사들과 각 길드 소속의 엽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성벽 위로 고개를 내민 괴수들에게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곧이어, 그들의 등 뒤에서 쏘아져 나가는 수십 자루의 창과 방패.
푸욱!
“키이이이이!”
진혁이 내보낸 리빙웨폰의 보조 아래, 엽사들의 칼날과 마법이 결계 밖의 괴수들을 도륙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괴수들이 흘린 피로 성벽의 금속 바닥이 흠뻑 젖었을 때.
크허허헝!
커다란 울음소리가 광복관과 백두산을 가득 채웠다.
곧, 진혁과 몇몇 엽사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기부터 꼬리까지 온몸이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자.
얼핏 보면 불의 정령이라 착각할 법한 형태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을 급 괴수, 화염사자야. 미리 말했던 대로, 놈은 우리가 상대하지.
설화가 탄 두정갑에서 그녀의 잡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이이잉―!
동시에, 그녀와 다른 두정갑의 어깨에 장비된 마력포가 푸른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력포가 채 쏘아지기도 전.
피유웅―!
강철의 거인들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산 정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아니, 빛이 아니었다.
순수한 정령력과 마나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한 발의 화살.
파아아앙!
놈이 채 반응하기도 전.
화살은 을 급의 괴수, 화염사자의 머리와 몸통을 꿰뚫고 산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푸스스스―!
생명을 잃은 괴수의 육체는,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크으으…….”
“키이이이…….”
성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던 괴수들이, 하나둘씩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혁은 고개를 돌려 화살을 쏜 상대를 바라봤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이렇게 많은 괴수들은 세계수 주변에서도 본 적이 없다. 거기에, 지하에서 마기가 느껴지다니…….”
신궁, 에플리오네.
눈살을 찌푸린 요정족의 대장로가 조금은 놀란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진혁의 대답은 짧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덕분에 괴수들이 물러갔으니 곧 해결될 거다. 일 품의 엽사들 모두가 지하로 갔으니.”
이미, 진혁은 가주들과 회장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윤이랑이 마인이 되어 강력한 힘을 얻었다지만, 네 명의 일 품 엽사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 이건 뭔가 달라.”
에플리오네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의아한 표정을 지은 진혁이 다시 질문을 던지려던 그때.
쿠르르릉―!
“지, 지진이다!”
“모두 조심해!”
잠시 동안 잠잠했던 광복관의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진동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닥이 뜨거워지고 있어!”
“모두 조심해!”
금속으로 만들어진 지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하로부터 전해져 온 후끈한 열기가 지상으로 퍼져 나갔다.
‘이건, 대체…….’
처음 겪는 상황.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그때.
우우웅―!
그의 정장 안주머니로부터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설마.’
무언갈 눈치챈 진혁은 곧장 품에 넣어 둔 통신 구슬을 꺼내 들었다.
곧, 통신 구슬 위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
서강진.
일 품의 엽사이자 세한그룹의 회장인 동시에 서가의 가주인 자.
하지만, 구슬 위로 떠오른 그의 얼굴은 너무나 지쳐 보였다.
천천히, 화면 속 중년의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서, 탈출하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진혁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