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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70화 (70/174)

70화

엽사대회가 막을 올린 지 닷새가 지났다.

대회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대회장에 모인 엽사들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백, 수천의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벌이는 난상토론.

한 사람이 한 번만 말해도 수백, 수천 개의 의견이 모이는 회의에서, 일주일 만에 만장일치를 이뤄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럼에도, 대회장에 모인 엽사들의 의견은 대략 둘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게이트가 열린 지 백 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잖습니까.”

“요정족 대장로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결국 해결책이라곤 무명교의 힘을 빌리는 것밖엔 없지 않소?”

“괴수들만 신경 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영혼인지 뭔지 하는 허무맹랑한 놈까지 상대해야겠어?”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엽사는 괴수만 잡으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일 품의 엽사도 감지할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났는데 손 놓고 보고만 있자니!”

“아무리 적은 위협이라도 한 번 나타난 이상 현실입니다. 인류와 국가를 수호할 의무를 지닌 엽사들이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죠.”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손 놓고 있다가, 저놈들이 한 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거요?”

그리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사람들.

두 주장 모두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의견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놈들,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사니까 너희 길드가 구역 관리를 못 하는 거 아냐.”

“뭐? 말 다 했냐?”

“그래, 어쩔래? 한 판 해보기라도 하려고?”

“하자면 못 할 줄 알고?”

말싸움은 기본에, 조금만 수틀리면 곧장 싸움이 벌어졌다.

덕분에 본관 바로 옆에 붙은 훈련장은 시비가 붙은 수많은 엽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와, 한국의 헌터들은 정말 대단해요!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기 위해선 결투도 마다하지 않는다니……!”

“꼭, 기사단의 기사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난장판이 된 지 오래인 대회장이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던 클레어와 렌은 이 아수라장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자 주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토론만으로 그 많은 사람의 의견이 통일될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말보다 주먹이 빠른 사람들인데.”

그리고, 엽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분쟁 해결의 방법은 단 하나.

“엽사대회의 끝은 결국 결투일 수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말을 마친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진혁을 쳐다봤다.

하지만.

“팀장님!”

진혁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요정왕.’

그리고 흑마력.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혁은 둘 사이의 연관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요정왕 그리고 요정들이 명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요정들은 지금까지 흑마력을 다루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이 정말 명계의 신과 계약을 맺어 사령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애당초 지구에서 멸족의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세계수로 가야 한다.’

요정의 본거지에 들어가, 그들을 이끄는 에플리오네의 입으로 직접 모든 사실을 전해 듣는 것.

그것 말고는, 진혁의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강화도에 세워지고 있는 영지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진혁의 관리 없이도 망자들만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때, 진혁은 망설임 없이 세계수를 찾아갈 것이다.

“……님, ……팀장님?”

생각을 마친 진혁의 귀에 주연의 부름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시선을 돌리자 그녀와 클레어, 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진혁 님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뭘 말하는 거지?”

“뭐긴 뭐예요, 저 둘 중에 어느 의견이 좋냐는 거죠.”

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클레어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답은 짧았다.

“둘 다 상관없다.”

“아니, 무슨 말이 그래요?”

대답을 들은 성녀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결정되건, 명계나 흑마력의 도움 없이는 영혼을 다룰 수 없다.’

설령 아귀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하더라도, 흑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엽사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무명교의 성기사나 사제, 그중에서도 영혼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극소수만이 대처할 능력을 지니고 있을 터.

해결책이 정해져 있는 이상, 엽사대회의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오늘도 결론은 나지 않을 것 같군. 난 슬슬 가 보겠다.”

여전히 고성이 오가고 있는 엽사대회장을 한 번 둘러본 진혁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대회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오기 전까지는.

‘흠.’

발걸음을 멈춘 진혁이 고개를 돌리자, 단상에 올라가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윤미르인가.’

정령을 다루는 윤가의 하나 남은 후계자.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번 여의도 사태에 관한 일을 윤가에서 전적으로 담당하고 싶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지금까지 엽사대회장에서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주장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저희 가문은 정령을 다루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령은 말하자면 자연의 영혼이라 할 수 있고, 요정족의 대장로가 말한 대로라면 이번 일의 원인 역시 영혼이 아니겠습니까?”

이후로도 미르의 말이 이어졌지만, 요약하면 간단했다.

자신들, 정령을 다루는 윤가보다 이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해결하겠다.

“그, 그런가?”

“아예 말도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정령도 분명히 영혼이긴 하잖아.”

“그나마 윤가의 정령사들이라면, 뭔가 수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

미르의 긴 연설을 들은 엽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정령을 다루는 윤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은 진혁의 옆에 있던 주연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권한을 지닌 윤가의 힘이 강해질 테니, 저희로서는 좋을 게 없긴 합니다만.”

그녀의 생각은 이미 윤미르와 윤가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이후의 상황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허나.

“불가능한 일이다.”

진혁은 그 말을 듣고 냉소했다.

“정령과 망령은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른 존재다. 당연히 다루는 방식도 다르지.”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아스칸의 정령사들은 모두 망자 한둘쯤은 아무렇지 않게 데리고 다녔으리라.

사령술의 극에 이른 파슬란조차도 편법을 사용해 흑마력을 정령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고작일 뿐, 정령 자체를 다룰 수는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서가에겐 고마운 일일 거다. 불가능한 일에 힘을 낭비해 준다면 윤가의 힘은 훨씬 약해질 테니까.”

사령술의 정수를 가진 진혁이 볼 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서진혁 씨.”

그 말을 꺼낸 단상 위의 윤미르에겐,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렸다.

“방금 한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습니까?”

자신이 꺼낸 말을 대놓고 무시했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미르는 그가 다루는 불의 정령처럼 붉어진 눈으로 진혁을 노려봤다.

이곳이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면, 그리고 상대가 서가의 장남이 아니었다면 욕이라도 퍼부었을 터.

“안타깝게도,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나 진혁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생각 같아선 그 허무맹랑한 소리에 지원이리도 좀 해 주고 싶지만, 우리 가문의 돈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말을 마친 진혁은 담담한 얼굴로 미르의 타오르는 눈빛을 마주했다.

“엽사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얼굴을 일그러뜨린 윤미르가, 진혁을 향해 반말을 씹듯이 뱉었다.

“훈련장으로 가서, 네 말을 증명해 보자고.”

*    *    *

에플리오네.

요정족의 유일한 대장로인 그녀는 아직 광복관에서 머물고 있었다.

에플리오네를 이곳까지 초대한 서가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진혁이라…….”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녀는 한 인간을 떠올렸다.

요정족의 은인이자 그녀의 친우, 서문휘의 손자.

하지만, 그의 손자는 그녀의 기억 속 친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 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지.’

그녀를 따르는 요정들조차도 느끼지 못한 힘.

요정왕으로부터 힘을 물려받은 에플리오네도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힘을, 그만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라면, 구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정된 멸망으로부터.’

서진혁을 반드시 세계수로 데려와야만 하는 이유였다.

그때였다.

‘이건……?’

에플리오네가 가진 요정 특유의 영감이, 독특한 기운을 감지한 것은.

‘정령력은 아니다.’

정령이 가진 자연의 힘, 정령력과 얼핏 흡사해 보이는 힘.

그러나, 그 근원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비틀려 있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정령의 힘을 재현해 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인간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낸 건가?’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난 요정의 눈에,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    *    *

광복관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훈련장은 시비가 붙은 엽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토론 중 시비가 붙어서, 아니면 그냥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서.

수많은 엽사들의 무기와 주먹, 마법이 부딪치는 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저 사람, 서진혁 아냐? 그 서가의.”

“옆에 있는 사람은 윤가 같은데?”

서진혁과 윤가람.

두 사람이 훈련장에 들어선 순간, 장내는 침묵에 빠졌다.

조금 전까지 검과 주먹을 휘두르던 엽사들의 시선이 오 대 엽사 가문의 두 사람에게로 꽂혔다.

“뭐야, 설마…….”

“둘이 한 판 하려고 온 거야?”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에 호기심이 어렸다.

“누가 이길까?”

“요즘 서진혁의 이름이 많이 들리던데.”

“아무리 그래도, 윤미르는 이 품 엽사라고. 상급 정령을 다룰 정도면 요행으로라도 삼 품 엽사가 이기긴 어렵지.”

이미 훈련장의 모든 관심은 두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다.

진혁과 미르가 양옆으로 늘어선 연무대 중 하나로 다가가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에서 칼춤을 추고 있던 엽사들이 말 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훈련장의 양쪽에 줄지어 늘어선 정사각형의 연무대들.

그중 하나에 올라선 진혁의 물음에, 반대편에 서 있던 미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답했다.

“둘 중 하나가 바깥으로 먼저 떨어지면 패배하는 걸로 하지.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기로 하고.”

“쉽군.”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보자.”

미소를 지은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열이 오른 미르의 노려보는 시선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정장의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금색 가루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유리병 하나.

그리고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보석.

‘이제, 시험해 볼 때가 되었군.’

두 가지 물건을 손에 쥔 진혁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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