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69화 (69/174)

69화

광복관의 본관.

그곳의 가장 중앙에 자리한 엽사대회장.

“여기 서가의 가주로부터, 그대들이 지난번 겪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수천 명의 사람으로 채워진 공간을 지배한 거대한 침묵 위로, 요정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가 모든 것을 파괴했다지.”

담담한 말투 속에 섞인 매혹적인 음색은, 자리에 모인 모든 엽사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단 한 사람, 서진혁을 제외하고는.

‘어째서, 요정이 흑마력을 다룰 수 있는 거지?’

흑마력은 현계에서 망자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다.

아스칸에서도 명계와 계약을 맺은 사령술사만이 다룰 수 있는 힘.

정령과 마법을 주로 다루는 요정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어쩌면, 탐욕고에 망자와 사령수가 있던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식귀, 자이츠, 멜리나.

그리고 사령술사의 기반인 사령수까지.

어째서 탐욕고에 사령술사의 물건이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요정과 관련되어 있었던 거라면 충분히 말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지금부터,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 그 존재의 이름은…….”

에플리오네의 매혹적인 설명이 이어졌지만, 진혁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지구에서 아귀에 대해 진혁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터.

굳이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진혁이 자리를 뜨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

‘우선은, 끝나길 기다려야겠어.’

진혁은 묵묵히 선 채, 그녀의 연설을 빙자한 강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럼, 이상 설명을 마치겠다.”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물러난 것은, 연설을 시작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였다.

“뭐, 뭔 소리야 저게? 영혼이 그런 힘을 낸다고?”

“저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데…….”

좌중을 압도하는 목소리.

그리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 앞에서, 자리에 선 엽사들은 박수 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괴수가 아닌 위협이라니…….”

“이름 없는 신의 힘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네요. 하지만…….”

그것은 진혁과 함께 있던 토벌 2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악과 감탄이 반씩 섞인 얼굴로 사라지는 요정을 바라보던 그녀들을 보며, 진혁은 짧은 한마디를 남겼다.

“잠시 다녀오지, 볼 일이 있어서.”

“팀장님?”

“갑자기요?”

주연과 클레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회장을 빠져나가는 진혁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늦기 전에 가야 한다.’

흑마력의 존재를 인지한 이상, 사령술사인 진혁의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다.

흑마력의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질수록,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곧.

진혁이 본관의 뒤편에 자리한 후문에 도착했을 때.

‘찾았다.’

흑마력의 주인, 대장로 에플리오네를 발견한 진혁의 눈이 번뜩였다.

허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대회장에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긴 웬일이냐?”

서강진.

본관의 후문을 나서며 대장로와 이야기를 나누던 서가의 가주는, 갑자기 나타난 아들을 향해 의문 섞인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진혁의 답은 강진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대장로,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아버지의 옆에 선, 외모와 달리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 온 노인.

“먼 곳에서 오신 귀한 분께 무슨 실례를 저지르는 게냐? 어서 사과하지 못해?”

진혁이 대쯤 대장로에게 반말을 내뱉자, 옆에 있던 강진이 버럭 소리쳤다.

허나.

“어떻게, 요정이 흑마력을 다룰 수 있는 거지?”

진혁의 질문이 그녀에게 닿은 순간.

“……당신, 뭐지?”

에플리오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엽사대회의 개회식이 끝난 이후부터, 윤이랑은 줄곧 별관의 저택에 머물러있었다.

윤가의 가주씩이나 되는 자가 일주일 내내 엽사대회장에 있을 필요는 없는 일.

하지만 그가 저택에 틀어박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진혁…….”

아들의 죽음에 관계된 원수.

놈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

조금이라도 놈의 얼굴을 바라봤다간,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윤이랑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서진혁을 불태우는 대신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은, 단지 일 품의 엽사가 가진 초인적인 의지력과 날카로운 이성 때문.

“……아무리 그래도, 서가의 장남을 건드릴 순 없지. 놈에게 죽는 건 가람이 하나로 충분해.”

아들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가문을 이끄는 가주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윤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윤이랑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서진혁…… 후우…….”

이성만으로 들끓는 분노를 붙잡아 두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

당장이라도 저택을 뛰쳐나가 놈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윤이랑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물의 정령이 뽑아낸 정령수로 우린 차라면,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참으면 병이 되는 법이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어, 이랑?”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우웅!

본능이 이성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들어 올리던 찻잔을 내팽개친 윤이랑이 목소리의 주인과 거리를 벌린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너.‘

그가 가진 힘의 원천.

불의 정령력을 전신에 끌어 올린 이랑이 상대를 노려봤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은 사내.

사내의 루비처럼 붉게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며, 윤이랑은 그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

“유…….”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야. 이젠 여명이라고 불러.”

하지만 상대, 여명은 이랑의 말을 단칼에 끊어 버리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 다니는 마인 주제에 여명을 입에 담다니, 꿈이 크군.”

“꿈은 클수록 좋은 법 아니겠어?”

“싸늘한 윤이랑의 말에 여명은 쿡쿡거리며 웃고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랑이 너, 복수하고 싶지 않아?”

“무슨 소리냐.”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네 아들, 윤가람이라고 했나? 진혁이한테 죽었다지, 아마.”

그가 윤이랑의 역린을 건드린 순간.

“……모든 원인은 네놈들, 마인들이 제공한 게 아니더냐.”

고오오!

저택의 내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칼날처럼 차갑던 한기는 최상급 정령이 가진 열기 앞에서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뜨거운 열기가 저택 내부를 가득 채웠지만, 여명의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먼저 말해 주겠는데, 난 분명히 모르는 일이야. 네 아들놈이 마인이 됐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 아들이 마인이란 주장의 근원이 어디였지? 내가 찾아본 대로라면 우리 진혁이와 엽사회장이었던 것 같은데.”

윤이랑은 그의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마음의 빈틈까지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이랑이 너도, 솔직히 의심하고 있잖아.”

여명의 한마디가, 그 빈틈을 노리고 섬전처럼 찔러 들어왔다.

“이 모든 게, 서가의 공작인 게 아닐까?”

“그, 그, 그럴…….”

그럴 리가 없다!

라는 한마디가 이랑의 목구멍까지 솟아올랐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분노로 흐려진 그의 이성은, 서서히 감정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윤가의 가주를 바라보던 마인의 미소가 진해졌다.

“특별히, 옛 친구인 널 위해 복수할 힘을 주지. 마기를 받아들이면 어떤 힘을 얻을 수 있는지는, 일 품에 오른 네가 더 잘 알겠지?”

“……네가 마인이 된다 해서, 이곳에 모인 가주와 엽사회장을 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넌 그들을 이길 필요가 없어.”

비웃는 듯한 이랑의 물음에, 여명은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답했다.

“불의 정령력을 다루는 네가 이곳에서 이겨야 할 건, 오직 하나뿐이야.”

이내, 그의 손가락이 바닥을 가리켰다.

“이 산.”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윤이랑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    *

서강진을 먼저 보낸 에플리오네가 진혁과 마주 앉은 곳은, 별관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카페였다.

“차 맛이 좋구나. 세계수의 것보다는 못하지만, 인간들치고는 상당한 수준이야.”

설탕이 듬뿍 들어간 홍차를 홀짝거리던 요정이 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리 종업원과 손님을 전부 내보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으리라.

“시시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닌데.”

하지만, 파슬란의 몸으로 백 년을 살아온 진혁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인간들은 대개 참을성이 부족하던데. 너는 특히 심한 편이구나.”

“여기서 더 시간을 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모르겠군.”

여유 있는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는 에플리오네와는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진혁의 표정은 싸늘했다.

“말해, 네가 가진 흑마력의 근원이 어딘지.”

흑마력.

지구에서 유일한 사령술사인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몰랐던 힘.

오직 명계와 계약을 맺은 사령술사만이 다룰 수 있는 힘을, 어째서 요정의 대장로가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에플리오네의 답은 간단했다.

“요정이 어떤 방법으로 힘을 얻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요정왕에게 받았단 말인가?”

요정왕.

멸망 직전인 에피로나에서 최후의 요정들을 이끌고 지구로 이주했지만, 혼란한 지구의 상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사라진 비운의 영웅.

그리고.

‘대장로는, 그의 딸이지.’

세계수를 통해 부모의 힘을 물려받는 것이 요정의 방식이었으니, 에플리오네의 말은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의문을 풀 수는 없었다.

“그러면, 요정왕이 흑마력을 다룰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 말에, 그녀는 텅 빈 찻잔을 내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이 자리에서 말해 줄 수 없는 이야기다.”

“뭐라고?”

“세계수의 가호가 없이는, 한마디도 할 생각이 없어.”

모든 비밀을 가려 주는 세계수의 가호 없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정보.

동시에.

“알려 주지 않을 거란 말을 돌려서 하는군.”

요정 외의 그 어떤 종족도 발을 들이지 못한 곳이 혹한의 땅에 위치한 세계수다.

결국, 요정이 아니라 인간인 진혁에게 알려 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건 아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세계수 안에 이종족을 들이게 될지도 모르니까.”

진혁이 냉소하자 에플리오네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지?”

진혁의 물음에, 요정의 수호자가 답했다.

“너와 같은 힘을 쓰는 자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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