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광복관의 별관은 이곳을 세운 오 대 엽사 가문을 위해 지어진 공간이다.
그 중엔 당연히, 서가를 위한 공간도 존재했다.
‘불편하진 않겠군.’
인공섬 하나를 통째로 사용한 칠성원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넓은 저택.
진혁은 저택의 빈 방 중 하나에 짐을 푼 다음, 곧장 밖으로 나왔다.
‘본 일정은 내일부터니, 오늘은 좀 돌아다녀도 되겠지.’
진혁과 함께 온 토벌 2팀의 팀원들 그리고 아버지 서강진도 저택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
살면서 처음 와 본 백두산과 광복관을 둘러볼 시간은 사실상 오늘뿐이었으니, 딱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저택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순백의 세계가 진혁을 맞이했다.
‘눈인가.’
이제 초가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의 정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한파와 함께.
허나, 어떠한 한기도 흑마력을 전신에 두른 진혁의 몸을 뚫어 낼 수는 없었다.
아마,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다른 엽사들도 진혁과 별반 다르진 않으리라.
“기후조절 마법진이 없다니, 오롯이 엽사들을 위한 공간이란 거군.”
진혁은 홀로 중얼거렸다.
돈만 있다면 마도공학의 힘으로 북극과 사막에도 농장을 만들 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이 극한의 땅에 기후 조절 마법진을 서치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 말고는 딱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것보단, 광복관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함일 것이야.”
누군가가 진혁의 혼잣말에 대꾸한 것은 그때였다.
진혁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띈 것은, 진혁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갓?’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갓에 두루마기라니.
남자의 머리에 쓴 검은 갓과 몸에 두른 흰색 두루마기를 본 진혁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갓을 쓴 남자가 말을 이어 나갔다.
“화산의 에너지를 억누르려는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굳이 봉인 위에 화기(火氣)를 얹을 필요는 없으니. 그게 이치에 맞지 않겠나.”
말을 마친 남자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진혁을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군, 진혁. 십 년도 훨씬 넘었으니.”
그 말에, 진혁은 갓으로 반쯤 가려진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다시 뜯어봤다.
곧, 진혁은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한.”
이가의 장남이자 전임 착호 갑사 대장.
그리고.
‘이가의 차기 후계자.’
그가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이가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니, 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그 자리를 공고히 했으리라.
“이제 나이가 좀 찼다고 형님이란 말도 안 붙이는 구나, 허허.”
진혁의 말에 이한은 씨익 웃었지만, 진혁은 웃지 않았다.
“저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이제는 다시 손을 맞잡지 않았느냐. 각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서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지.”
진혁의 날카로운 말에 이한은 부드럽게 응수하며 진혁의 몸을 훑었다.
“십 년 만에 병상에서 깨어났다더니, 몰라보게 달라졌구나.”
“아직 부족합니다.”
“거기에 겸손까지 겸비하다니, 서가의 가주께서 기뻐하시겠어.”
그 말을 들은 이한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칭찬했다.
하지만 진혁은 겸손을 떠는 게 아니었다.
수만의 망자군단을 이끌었던 파슬란과 비교하면, 현재의 진혁이 가진 힘은 상대적으로 초라한 것이 사실이니까.
아직, 그가 망령군주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말을 마친 진혁의 표정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이한의 말 대로, 둘은 십 년 넘게 어떠한 연락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엽사가 엽사를 만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심심해서 눈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마침 자네 얼굴이 보이지 뭔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뭐, 겸사겸사 다른 일도 있어서 불렀지. 이를테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이한이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오라버니.”
이한의 등 뒤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둘의 눈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눈 구경하러 가신다더니,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하늘하늘 내리는 눈 사이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곰방대를 쥔 여인이 보였다.
이설화였다.
“엽사대회에 전국의 엽사들이 모인다더니, 마침 옛 인연을 만났지 뭐냐. 그리운 마음에 서로 얘기를 좀 나누고 있었단다.”
말을 마친 이한은 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눈을 찡긋했다.
“그럼, 난 이만 눈이나 마저 보러 가겠네. 내일 개회식에서 보도록 하세.”
그 말과 함께, 이한은 손을 흔들며 별관의 출구 쪽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는 오라비의 뒷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설화가 진혁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랑 무슨 얘길 한 거야?”
“안부 인사를 좀 했을 뿐이다. 만나서 반갑다더군. 왜지?”
“조심해.”
진혁을 향해 경고를 날린 설화의 눈이 안경 뒤에서 어둡게 빛났다.
“저기 저 사람은, 네가 알던 십 년 전의 이한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테니까.”
“네 경쟁자이기 때문인가?”
그녀의 말에 진혁은 무심한 듯 내뱉었다.
정곡을 찔린 것인지, 영하의 추위에도 하얗게 빛나던 설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겨, 경쟁자는 무슨! 오라버니는 이가의 차기 가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이제 와서 경쟁하기엔 너무 늦었지.”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
“헛소리하지 말고. 어쨌든, 뭔 말을 하건 적당히 걸러 들어. 그럼 난 간다.”
말을 마친 설화는 새빨개진 얼굴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한…… 언젠가 부딪칠 일이 있긴 하겠지.’
그 뒤에서, 진혁이 눈을 빛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 * *
이한.
이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 이정의 뒤를 이어 이가의 가주가 되고, 구 왕가의 명맥을 이어 나가는 것.
그 하나의 운명을 따르기 위해 삼십사 년의 삶을 바쳐 왔다.
‘서진혁…… 어릴 땐 안 그러더니.’
가문과 자신을 위협할 만한 존재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직접 만나 보니, 확실히 알 수 있겠구나.’
서진혁은.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연약하기 짝이 없었던 서가의 장남은.
이제 함부로 건들 수 없는 힘을 가진 거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서가에 다시 일 품의 엽사가 둘이 되겠어.’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특별하지 않았다.
아니,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 아닐까 싶을 만큼 평범했다.
허나, 이한은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욱 위험한 법.’
구 제국으로부터 명맥을 이어 온 이가의 정보부서, 익문사.
그곳의 수장, 독리인 그였기에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우선은, 이가 쪽으로 회유할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상대는 서가의 장남.
힘으로 제거하려 한다면, 이가 역시 만만찮은 피해를 보게 되리라.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혼약일 터.’
마침 가주인 이정도 과거 설화와 진혁이 맺었던 약혼을 다시 추진하려 하고 있었으니, 성사만 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가와 서가가 한 핏줄로 엮인다면 두 가문의 힘 역시 강해질 테니 일석이조의 방법.
‘허나.’
만에 하나, 혼약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겠지.’
익문사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검은 갓 아래로 그늘져 있는 이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비틀렸다.
* * *
엽사대회의 개회식은 다음 날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준비를 마친 진혁과 토벌 2팀이 본관으로 향했을 때에는, 이미 수많은 엽사들이 본관에 마련된 대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거, 회의 맞아요? 무슨 콘서트장 같은데.”
클레어는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앉을 자리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 채로 단상을 바라보는 것이, 그녀의 눈엔 꼭 콘서트를 기다리는 관중과도 같아 보였다.
“별반 다를 것도 없어요. 가수가 아니라 엽사들이 주인이란 것 말고는.”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개회식이 끝나게 되면, 여기 있는 모든 엽사들이 토론을 벌일 거예요. 의견이 전부 통일될 때까지.”
“그럼, 통일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언가를 눈치챈 듯 심각한 표정을 지은 렌이 묻자, 주연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통일이 될 때까진 안 끝나는 거죠. 두 번째 엽사대회 땐 한 달 정도 걸렸을걸요?”
“그렇다면, 식사나 휴식도 어렵겠군요. 성녀님의 건강이 염려됩니다만.”
그 말을 들은 렌이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주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할 건 없어요. 광복관 내에서라면 출입이 자유로우니까요. 식사나 휴식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갔다 올 수 있죠. 안 그랬으면, 아무리 엽사들이라도 한두 명쯤은 굶어 죽었을 걸요?”
“그럼, 지금 나가도 돼요?”
“개회식만 끝나면요.”
“그럼, 전 미리 점심이나 먹고 와야겠어요. 아까 보니까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하나 있던데. 그죠, 렌?”
“서, 성녀님…….”
주연의 대답을 들은 클레어가 곤란해하는 기사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던 그때.
“곧 시작하겠군.”
그들 사이에서 말 없이 단상을 지켜보던 진혁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단상 위로, 여섯 명의 남녀가 가로로 줄지어 서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일 품의 엽사들.
다섯 가문의 가주와 대한엽사회의 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백여 년 전, 망국의 엽사들이 이 자리에 모였소.”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대한엽사회장 최현.
“그것이 시작이었지. 첫 대회의 결과로 우린 나라를 되찾았고, 두 번째 대회는 세계를 구해 내는 전환점이 되었소.”
어느 가문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그의 말은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평범한 엽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위대한 발걸음은, 이번 대회 역시 마찬가지일 거요.“
수많은 엽사들의 시선 앞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최현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한국의 엽사를 이끌 자격이 있는 자였다.
“지금부터, 엽사대회의 개회를 선언하겠소.”
와아아아!
엽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최현은 단상 뒤로 물러났다.
빈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서가의 가주인 서강진이었다.
“이번 엽사대회의 주제를 발표하기 전에. 여러분께 한 사람…… 아니, 요정을 소개하겠습니다.”
“요정?”
“요정이라고?”
강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엽사들이 웅성거렸다.
에피로나에서 넘어온 이종족 중 하나.
백 년 전부터 그 아름다운 생김새와 강함으로 인류를 매료시켰지만, 정작 세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환상 속의 존재들.
평생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요정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엽사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강진은 웅성거리는 군중들을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세계수의 관리자이자 모든 요정의 수호자. 신궁(神弓) 에플리오네 대장로입니다.”
말을 마친 강진이 옆으로 자리를 비켜서자, 누군가가 단상 위에서 나타났다.
아름답다.
그 말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요정 특유의 뾰족한 귀와 하얗게 세 버린 머리칼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미모는 그 어떤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와…….”
“요정…… 진짜 요정이야…….”
남녀를 불문하고 나직한 감탄사를 내뱉는 엽사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반갑다, 인간들이여. 나는 에플리오네. 요정들의 수호자.”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매혹적인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모든 엽사들의 눈과 귀가 그녀의 미모와 목소리로 향했다.
‘이건…….’
단 한 사람.
서진혁을 제외하고는.
‘어째서.’
요정에게서, 흑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단 말인가.
그녀의 주변으로 후광처럼 퍼져 나가는 흑마력의 잔영을 바라보며,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