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상혁은 언제나 목말라 있었다.
가주.
서가의 정점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
그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상혁이 젊은 나이에 세한의 이인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네게, 선택권을 하나 주마.”
이 순간.
그 갈증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진혁이 제안을 건넸을 때, 상혁은 이미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미 자신의 운명은 눈앞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큰형의 손에 달려 있다.
무슨 선택을 하건, 그 결과는 파멸 혹은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그가 말한 선택지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쓰레기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무슨 선택지 말입니까.”
상혁은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부서져 가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희망이, 주저앉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진혁은 손가락을 꼽으며 입을 열었다.
“하나는, 이대로 아버지께 가서 모든 사실을 말씀드린 다음, 널 칠성원 구석에 평생 가둬 두는 거다. 좀 답답할 수는 있겠지만, 목숨은 건지겠지.”
“그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진혁의 말을 들은 상혁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서가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뻔한 그다.
고작 목숨만 간신히 연명하는 것을 바랄 리 없다.
“그래, 다른 선택지는 뭡니까.”
고개를 들어 올린 상혁이 묻자, 진혁은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끝까지 들어는 주마.’
이 모든 것이 승자인 진혁의 장난일지라도,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은 그 장난질뿐이니까.
하지만.
“다른 하나는, 내게 영혼을 저당 잡히는 거지.”
“……형님,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두 번째 선택지를 들은 상혁의 입에선 허탈한 웃음만이 새어 나왔다.
“영혼을 저당 잡히라니, 형님이 무슨 신이나 요정이라도 됩니까? 내 영혼에 손을 대게?”
최소한, 현대의 마도학으로는 인간의 영혼에 접근할 수 없다.
인간의 영혼이 가진 영적 보호막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접근을 차단하기 때문.
신의 심을 내려받은 사제나 성직자 혹은 요정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들 역시 인간의 영혼에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상혁의 눈에, 그의 형이 꺼낸 제안은 허풍이나 다름없었다.
“난 선택지를 제시했으니, 이젠 네가 선택할 차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어하는 상혁을 내려다보는 진혁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방금 그게,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십 년 동안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다.
상혁은 표정만 보고도 큰 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진심인 건 맞아.’
분명, 그의 큰형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을 저당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미친, 이젠 이런 개소리에 희망을 걸어야 하다니.’
상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래, 형님이 신의 힘이라도 얻어서 내 영혼에 압류 딱지를 붙일 수 있다 칩시다. 그게 칠성원에 갇혀 있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다르다.”
반쯤 체념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을 내려다보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칠성원에 연금되는 걸 선택한다면, 영혼은 자유롭겠지만 몸은 죽을 때까지 칠성원에 갇혀 있겠지.”
아마,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생을 보내게 되리라.
“하지만, 네가 내게 영혼을 저당 잡힌다면.”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영혼은 내게 묶여 있겠지만, 네 몸은 자유로울 거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 사무실에 네 이름이 계속 걸려 있을 거란 얘기지.”
순간.
진혁의 말뜻을 이해한 상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서가에서 쌓아 올린 자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어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서가의 후계자 중 하나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저, 영혼을 내어주기만 한다면.
“……영혼을 저당 잡히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걸 나도 알 수 있게 되지. 내 지시를 어기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거고.”
“기한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좋게 말해도 노예 취급이다.
어떻게 보면 칠성원에 연금되는 것보다도 더한 형벌.
하지만.
상혁은 희망을 보았다.
‘……노예로 살더라도, 살아야 기회를 얻을 수 있어.’
진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일궈 낸 것들은 온전히 그의 손에 남아 있을 것이다.
형의 의지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목숨.
아니, 그 이상을 건 도박이었지만.
“……정말, 그거면 되는 거요?”
해볼 만했다.
진혁을 올려다보는 상혁의 눈빛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아마, 생각한 대로는 힘들겠지만.’
영혼의 종속을 선택한 동생을 떠올린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영혼의 종속으로 풀어 줄 것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때는 아마 둘 중 하나가 죽어서야 올 것이다.
‘그래도, 이제 허튼짓은 안 하겠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요소만 차단한다면, 동생인 상혁은 충분히 써먹을 만한 존재다.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살려 놓고 이용하는 게 차라리 나으니까.
형제간의 유대 따위는 십 년도 더 전에 사라진 상태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제…… 준비만 하면 되겠군.’
강화도에 발을 디딘 진혁의 시선이 눈앞의 거대한 공터로 향했다.
강화도.
한때 삼 대 금지 구역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인간의 손으로 되돌아온 거대한 섬.
아직은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은 땅이지만, 새로운 도시가 들어서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세한보안의 인천지사가 세워질 부지 역시 그중 하나였다.
‘어차피, 연막일 뿐이지만.’
이곳에 지어질 도시는 강화도를 관리할 권한을 지닌 진혁이 공개할 일부일 뿐.
진짜는, 이 도시 뒤에 새롭게 세워질 그의 영지니까.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되겠어.’
이미 진혁은 망자들을 활용해 상당한 숫자의 사령수를 심어 놓은 상태.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래지 않아 진혁에게 마르지 않는 흑마력을 공급하게 되리라.
“그래서, 우린 여기 왜 부른 건데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진혁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자, 얼마 전 퇴원한 클레어와 신주연, 렌 슈미트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사장 구경하라고 부른 건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무언가를 눈치챈 듯, 눈을 빛내는 금발소녀를 향해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산으로 갈 거다.”
* * *
일 년의 반은 늪, 나머지 반은 눈으로 뒤덮여 있는 시베리아 대평원.
그중 최북단에 위치한 베르호얀스크엔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사실, 나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높이만 수백 미터, 줄기의 굵기가 어지간한 마을의 넓이보다 두꺼운 ‘나무’란, 백여 년 전까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겨울 최저기온이 영하 60도가 넘는 혹한의 땅 위에서도 언제나 푸르름을 유지하는 이 거대한 나무를 두고, 지구의 사람들은 이렇게 칭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그 거대한 나무줄기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는, 괴수로부터 살아남은 요정들을 통솔하는 ‘신궁’ 에플리오네였다.
“대장로님, 인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세계수 바깥에 나서지 않고 요정들을 다스리던 그녀를 찾은 것은, 한 명의 인간이었다.
“누구지?”
“한국의 서강진입니다.”
“서강진…….”
그녀가 모를 리 없는 사람이다.
아니, 몰라서는 안 되었다.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멸족의 위기에 몰렸던 요정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유일한 인간.
그의 후손이었으니까.
“……연락을 받도록 하겠다.”
수십 년의 침묵을 깨는 데엔, 그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에플리오네의 말에 요정 장로는 예를 갖추고는, 자신이 밟고 있는 나무줄기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곧.
뿌드드득!
마나로부터 자라난 두꺼운 줄기들이 얽히고설켜 동그란 도넛 모양을 이루었다.
이내, 도넛의 중앙에 인간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장로.
“사십이 년 하고도 팔 개월 만인가. 그땐 아이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인간과 요정의 시간은 다르니까요.
사십여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에플리오네를 바라보며 화면 속 남자, 서강진은 잠시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연락을 드린 건, 저희 선조와의 언약 중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강진의 말을 들은 그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제 두 개가 남았을 텐데, 그중 하나를 쓰겠다라. 흥미롭구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요정의 지식을 조금 나눠 주셨으면 합니다.
“지식이라면?”
―이 녀석의 정체 그리고 놈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웅!
강진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화면이 바뀌었다.
어느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무명교의 신전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파괴되는 장면.
“이건.”
그 광경을 보자마자,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곧, 영상이 끝나고 강진의 얼굴이 화면에 다시 나타났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말해 줄 수는 없다. 조만간, 날짜를 정해 직접 찾아가도록 하지.
―그러면,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자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화면이 끊어졌다.
통신이 끝나고도 에플리오네는 한참을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그녀는 옆의 장로에게 간신히 한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뿌리도서관을 개방하거라. 알아볼 것이 있으니.”
“네, 대장로님.”
말을 마친 그녀의 시선이 나무에 난 창 바깥으로 보이는 시베리아의 밤하늘로 향했다.
하늘을 뒤덮은 오로라가, 보라색으로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