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엽사대회(獵士大會)를 다시 열 거다.”
세한빌딩의 회장실로 찾아간 진혁은 강진에게 생각 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엽사대회라.’
한국을 대표하는 엽사들이 모두 모이는 회의.
지난 백 년간 단 두 번만이 개최되었던, 역사책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난번 일 때문이군요.”
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으니, 우리도 상대할 방법을 궁리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려면 일단 모여야지.”
말을 마친 강진의 눈이 진혁의 눈동자로 향했다.
“너도 참석시킬 생각이니, 그리 알거라. 설마, 못 간다고 하진 않겠지?”
“참석하겠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자세한 일정은 조만간 알려 주마.”
진혁이 망설임 없이 승낙하자 강진은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을 부드럽게 풀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오 대 가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엽사들은 모두 초청할 거다. 이 기회에 그들과 안면을 틀 수 있다면,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그 말에 진혁은 피식 웃었다.
“제 마음에 차는 사람이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한반도가 좁다곤 하지만, 쓸 만한 엽사들은 충분히 많아. 잘 살펴보면 원석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거라.”
그 말과 함께 강진은 장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흠.’
회장실 밖으로 나온 진혁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온갖 엽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절대 조용하지는 않겠지.’
엽사들 사이에 원한 한두 개가 얽힌 것쯤은 흔한 이야기니,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건 진혁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히, 윤가도 참석할 테니까.’
진혁에게 분명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가문.
함께 갈 세한의 엽사들이 자신을 철저히 경호하겠지만, 그들만 믿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팀장님.”
승강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주연이 입을 열자, 진혁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세한금속으로 갈 거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엽사대회에 참가할 거다. 준비해 두도록.”
“……네?”
진혁의 말에, 주연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세한금속의 공장은 수많은 직원과 트럭들로 북적였다.
평소에도 자재를 들이고 상품을 내보내느라 분주한 곳이었지만, 진혁이 찾아간 오늘은 특히나 더 그랬다.
“이번 한정판, 정말 기깔나게 뽑을 생각이거든!”
“그렇습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재료들을 모아서 연구하고 있지. 그래도 한정판인데, 어느 정도 성능은 나와야 할 거 아냐?”
“그렇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꼬맹아, 대답 좀 성의 있게 할 수 없냐?”
영혼 없는 진혁의 대답에 글리펜은 툴툴대면서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흠.”
진혁의 표정에 변화가 생긴 것은 그때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글리펜은 피식 웃었다.
“자, 꼬맹아. 이게 네가 원하는 거지?”
“역시, 부탁드리길 잘했군요.”
글리펜이 가리킨 상자를 바라보며, 진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큼지막한 상자의 열린 뚜껑으로, 모래처럼 생긴 무언가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모래는 아니었다.
“나, 참. 나도 꽤 오래 살긴 했지만, 을 급 괴수를 가루로 만들어 달란 놈은 네놈이 처음이야. 네 증조 할아비도 만만찮은 놈이긴 했지만 이 정돈 아니었는데.”
여명이무기의 뼈와 비늘을 곱게 빻은 가루.
“그래도, 약속한 만큼의 비늘과 뼈는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저 아까운 걸 가루로 만들어 버렸으니 그렇지. 물에 타 먹을 것도 아니고, 나 원.”
글리펜은 한때 여명이무기였던 가루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허나.
진혁은 아직 챙겨야 할 게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어디에 있습니까?”
“아, 그거? 미리 챙겨 뒀지.”
진혁의 물음에 글리펜은 한쪽에 놓아둔 금고를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구슬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뼈와 같은 질감을 가진 구체.
작은 봉인기 안에 들어 있는 구슬이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을 급 괴수 아니랄까 봐, 마정석도 더럽게 크다니깐? 안 다치게 수습하느라 고생 좀 했지.”
을 급 괴수인 여명이무기가 지니고 있던 마나와 마기의 결정체, 마정석.
‘이건가.’
진혁은 보구의 마법으로 봉인된 마정석을 그대로 꺼내 손에 쥐었다.
‘용심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쓸 만하군.’
구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그에게로 전해졌다.
“저, 저, 저. 당장 봉인기에 안 집어넣어? 그거 정제 안 된 거라 마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인마! 누굴 골로 보낼 셈이야?”
놀란 글리펜이 호들갑을 떨자 진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봉인기 위에 형성된 마력장에 다시 마정석을 집어넣었다.
그제야 하얗게 질린 난쟁이의 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하여간, 어린 놈이 마기 무서운 줄 알아야지…….”
글리펜은 오 년은 늙어 버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봉인기를 든 진혁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얼른 가라, 가. 이러다간 제명에 못 죽겠으니까.”
“건강하십시오, 어르신.”
“건강 못 하겠다, 이놈아! 빨리 안 가?”
반쯤 쫓겨나듯 공장 밖으로 나왔지만, 원하던 물건을 얻은 진혁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그 비술을 시험해 볼 수 있겠어.’
을 급 괴수의 육체라면, 비술의 재료로 삼기에 충분하리라.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만.’
세한금속의 공장을 나서는 진혁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진혁과 달리, 서가의 막내 서상혁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못한 수준이 아니었다.
“무혁 형님, 도와주십시오.”
자신의 사무실 소파에 앉은 무혁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이대론, 끝장이다.’
서진혁.
큰형을 막으려던 계획이 이렇게 망가질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함께 계획을 꾸민 성전기사단의 지부장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으며, 그와 함께했던 무명교의 성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의 큰형이 마인이 아니라 선포했다.
이제, 그가 진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선 이 품의 엽사, 무혁을 제외하면.
“형님도 진혁 형님이 위험하다는 사실엔 저와 의견을 같이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형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분명 일은 쉽게 해결될 테니까요.”
상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혁에게 애원했다.
마인을 상대하는 전담조직, 특수부를 움직일 수 있는 무혁이라면 분명 그의 큰형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동생의 부탁 앞에서, 무혁은 선글라스를 셔츠에 건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애당초, 여기 온 것부터가 네 부탁 때문이었지. 철없던 시절에 썼던 알량한 계약서 한 장 때문에.”
“그, 그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무언가를 직감한 상혁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무혁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젓고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혁 형님이 마인이라는 판정이라도 내려졌다면 모를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검증이 끝난 이상 나와 특수부가 나설 자리는 없어. 나서야 할 이유도 없고.”
동생의 안쓰러운 표정을 내려다보며, 무혁은 혀를 찼다.
“정 걸리면, 진혁 형님에게 사죄라도 해 보든가.”
형님이 받아 줄진 모르겠지만.
그 말과 함께, 무혁은 가슴팍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콰드득!
“빌어먹을.”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부숴 버린 서상혁은 씩씩대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아끼던 책상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언제 이 사무실의 주인이 바뀌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것도 잠시.
“아냐, 아냐. 아직 기회는 있어.”
상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슈헤르트 그놈이 죽었으니, 내가 사주했다는 흔적은 거의 지워졌을 거야.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서상혁, 그가 일을 벌였다는 증거도 지울 수 있으리라.
증거가 없는 이상, 큰형이 자신을 의심한다 하더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터.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는 생각에, 상혁은 조금씩 숨을 고르며 안정을 되찾아 갔다.
“뭐가 된다는 건지 모르겠군.”
누군가가 말도 없이 본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상혁은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 진혁 형님?”
서진혁.
그가 와 있었다.
“형님이 여긴 어떻게…….”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생각지도 못한 큰형의 방문에 상혁의 눈이 커지자, 진혁은 조소했다.
“정말 대단한 일을 벌였구나, 상혁아. 나 하나를 잡겠다고 무명교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거기에 어울려 준 성전기사단의 지부장은 죽어 버렸고. 정말이지, 아버지께서 들으면 아주 기뻐하시겠어.”
“그, 그걸……어떻게…….”
지금까지 벌여 왔던 일들이 진혁의 입에서 낱낱이 까발려지자, 상혁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진혁은 미소 띤 표정으로 부서진 책상의 잔해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내가 주변 사람도 의심해 보지 않을 만큼 멍청이는 아니야.”
책상의 나무와 똑같은 색으로 칠해진, 얼핏 보면 작은 스티커처럼 생긴 기계 장치.
도청기였다.
“내가 의심되는 사람들을 좀 추려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더구나.”
“아, 아, 아니, 그걸 어느 틈에…….”
나올 리가 없는 도청기를 발견한 상혁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진혁은 도청기가 아니라 망령을 이용했으니까.
도청기는 동생을 압박하기 위해 꺼낸 가짜일 뿐.
결국.
털썩!
“……형님, 살려 주십시오.”
상혁은 모든 것을 잃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순 없어.’
아버지 서강진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는 순간, 그의 이름은 가문에서 지워지게 되리라.
어쩌면, 칠성원 밖으로 영원히 나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상혁이 진혁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유였다.
무릎 꿇은 동생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진혁은 입을 열었다.
“네게, 선택권을 하나 주마.”
그의 한쪽 입꼬리가 날카롭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