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64화 (64/174)

64화

여의도를 물들인 신성한 빛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파괴의 흔적으로 가득한 무명교의 신전과, 정체 모를 공격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약해지는 빛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건…… 말도 안 돼.”

그 모습을 한강 너머, 강북의 한 빌딩 옥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검은색의 타이트한 옷을 몸에 걸친 그녀의 허리엔 피를 머금은 듯 검붉게 칠해진 채찍이 돌돌 말려 있었다.

“설마,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한강 너머로 보이는 무명교의 파괴된 신전.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 미령은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놈들에겐 녀석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단 말야.”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한강을 통해 놈을 보냈을 때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녀가 보낸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기척조차 감지할 수 없는 존재니까.

마인으로 ‘진화’하면서 얻은 그녀의 초감각으로도 간신히 존재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이계의 존재.

당연히, 저 신전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놈에게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런데, 저놈은…….”

수 킬로미터 너머의 개미까지 볼 수 있는 그녀의 눈이,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긴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계의 존재가 휘두르는 공격을 피해 성녀를 보호한 자.

놈이 아니었다면, 성녀는 채 강신을 시도하기도 전에 명을 달리했으리라.

“덕분에 신성력에 취약하다는 단점은 알게 됐지만…… 손해가 너무 큰데. 대주께서 싫어하시겠어.”

씁쓸한 표정으로 점차 소멸되어 가는 이계의 존재를 잠시 살피던 그녀를 향해.

“그래, 이번엔 네 실책이 맞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말을 건넸다.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채기 무섭게, 미령은 몸을 돌려 무릎을 꿇었다.

“대, 대주.”

갑작스레 나타난 대주를 향해 고개를 숙인 그녀의 표정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대주는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긴 했다만, 이번 일은 좀 성급했어. 너답지 않아, 미령.”

“죄송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미령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대주는 길게 자라난 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다음,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뭐, 괜찮아. 그래도 이 품 수준의 성기사를 잡아냈으니, 큰 손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용서해 주마.”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는 미령.

“그럼, 돌아가 볼까?”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던 대주는 마기로 가득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스으으으!

두 마인이 딛고 선 콘크리트 바닥이 소리 없이 갈라지면서 그들을 이동시킬 검은 무저갱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너로구나.’

한라산으로 향하는 무저갱에 발을 들이밀며, 대주는 한강 너머로 보이는 여의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혁아.’

공원의 나무 아래 선 서진혁을.

‘아무래도…….’

더 이상 놔둘 수는 없겠구나.

그를 바라보는 대주의 시선이, 차갑게 번뜩였다.

*    *    *

여의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행히도 큰 피해 없이 수습되었다.

성전기사단의 서울지부장인 슈헤르트 마이어를 비롯한 몇 성기사들이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신전과 그 주변에 있던 수많은 엽사들과 민간인들이 무사한 것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될 정도.

[여의도에서 일어난 대형 마나 폭발!]

[사상자는 모두 무명교 성전 기사단의 서울지부 소속으로…….]

[사망자 중에는 성전 기사단의 서울지부장 슈헤르트 마이어도 포함되어 있어…….]

언론에서는 일제히 원인 불명의 마나 불안정으로 인한 폭발사고인 것으로 보도했지만.

“입막음은 그럭저럭 잘 된 편이군.”

당연히, 그 괴현상을 직접 목격한 서강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당초, 언론이 보도한 내용 자체가 세한과 대한엽사회에서 뿌린 보도자료를 통해 만들어진 가짜였으니까.

“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틀 전의 일을 다시 떠올린 그는 뺨을 긁적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어떠한 기척도 없이 신전과 성기사들을 파괴하고 살해한 존재.

‘괴수였다면 당연히 탐지할 수 있었겠지. 그러라고 쏟아부은 돈인데.’

다섯 엽사 가문을 비롯한 한국의 자금과 기술을 총동원해 쏘아 올린 것이 마도 감시 위성, 전우치.

지금까지는 백 퍼센트의 정확도를 자랑했던 마도 공학의 정수조차도 감지할 수 없는 존재란.

‘애당초, 괴수와는 다른 종류의 위협이란 의미겠지.’

마법과 과학의 발달로 새로운 위험이 등장하는 건 종종 있어 왔던 일.

허나, 이번 경우는 조금 심각했다.

‘나조차도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감각을 비롯한 모든 능력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일 품의 엽사조차도 그 존재를 감지할 수 없다면.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

‘마인 놈들의 수작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서강진.

그리고 서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딸깍.

강진은 탁자 위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십 년 넘게 끊어져 있다가, 최근 다시 연결한 이가 외의 직통 회선.

―……무슨 일인가.

곧, 상대방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가의 현 가주, 이정.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조금 피로해 보였지만, 강진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저께 일 때문에 얘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네.”

―갑자기?

점잖지만 짜증이 묻어나는 이정의 물음.

강진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대회(大會)를 하루라도 빨리 열기 위해선, 일 분 일 초가 아쉬우니까.

*    *    *

세한의료원은 국내 1, 2위를 다투는 규모의 대형 병원이다.

그 규모만큼이나 치료 능력도 우수해서, 어떻게든 입원하고자 하는 수많은 엽사들과 기업인, 정치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곳.

물론, 세한의료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이 병원의 주인인 서가의 가주와 그 혈육들.

그럼에도.

“돌아가십시오.”

스릉!

서진혁.

세한의료원에 찾아온 그의 발걸음은 두 사람의 검 앞에 가로막혔다.

이곳, 의료원의 직원은 아니었다.

세한에게 고용된 그들이라면 감히 서가의 장남을 거스를 생각을 하진 못할 테니까.

‘성기사들이라.’

성전 기사단의 상징.

기다란 참마검 두 자루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자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녀와의 계약 당사자로서, 성녀의 몸 상태를 확인해야겠다.”

“성녀님께선 현재 강신으로 몸에 무리가 간 상태입니다. 완전히 회복하실 때까지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기사들의 표정은 단호했다.

성녀가 입원한 VIP 병실의 문 앞을 지킨 둘의 눈빛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녀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가득했다.

‘강신 때문인가.’

성전기사단의 기사들 대부분이 성녀의 호위를 명목으로 그곳에 있었으니, 이들 역시 성녀가 강신의 기적을 사용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별 관심도 없던 성녀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호위하려 할 리 없으니까.

‘귀찮게 됐군.’

아귀를 소멸시키면서, 놈이 쌓은 업을 어느 정도 흡수한 진혁이다.

저들을 힘으로 이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 만으론 저들의 의지를 꺾기 힘들어 보였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저들은 자신을 막아서리라.

‘진짜로 끊어 버리면 뒤처리가 곤란해질 테고 말이지.’

하지만.

드르륵!

병실의 문이 열린 순간.

진혁은 머릿속에 떠올린 방법들을 도로 집어넣었다.

“들어오시죠, 진혁 님.”

렌 슈미트.

성녀의 호위기사인 그녀가 진혁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연 것이다.

“이분은 성녀님의 은인입니다. 검을 거두십시오.”

견습 기사일 뿐이지만, 그녀는 강신의 기적을 보인 성녀의 유일한 호위기사.

렌이 진혁의 앞을 막아선 성기사들에게 명령하자, 성기사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참마검을 거뒀다.

“성녀님께선 저곳에 계십니다.”

진혁이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자, 렌은 열었던 문을 다시 닫고는 드넓은 병실의 한쪽을 가리키고는 고개를 숙였다.

진혁은 그녀를 향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커튼이 쳐진 침대로 향했다.

커튼을 걷자, 은은한 신성력의 향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진혁의 시선이, 파리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금발 소녀에게로 향했다.

“오셨군요.”

몸에 무리가 갔다는 성기사들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클레어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수고했다.”

어찌 되었건, 강신을 펼친 그녀가 아니었다면 진혁은 아귀를 상대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을 겪었을 테니까.

“당신 덕분이에요. 덕분에 참…… 좋은 경험 했네요. 몸은 좀 힘들었지만.”

그 말에 클레어는 슬쩍 미소짓고는, 진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그러나.

진혁은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 질문에 대답해 다오.”

“질문, 이요?”

“멸망의 동반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름 없는 신이 서진혁 자신을 지칭한 이름.

그것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니, 당신이라면 알고 있는 게 당연하겠죠.”

순간 클레어는 의문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저도 몰라요.”

“……뭐?”

진혁이 눈살을 찌푸리자 클레어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이름 없는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건 재작년이에요. 그때, 그분께선 이렇게 말하셨죠.”

―멸망의 동반자를 찾으라.

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감정을 떠올린 클레어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 계시를 받고, 성녀가 되고…… 그분께서 내려 주신 힘을 사용해 당신을 찾았죠.”

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다예요. 멸망의 동반자라는 건, 교단의 경전이나 교리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니까. 본단의 주교님들도 모르는 걸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이름 없는 신께 물어봐 드릴 수는 있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클레어의 장난스런 말에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호칭 따위에 관심을 두기엔, 지금 눈앞에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우선은, 놈의 배후부터 찾아간다.’

놈은 모르겠지만, 진혁은 이미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던 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슬슬, 끝을 낼 때도 됐지.’

“뭐, 뭐예요, 그 눈빛?”

놈을 생각하던 진혁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나자, 클레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우우웅!

진혁의 품에서 진동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낸 그는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세한의 회장, 서강진.

―지금, 여기로 오거라. 할 말이 있다.

그가, 진혁을 부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