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슈헤르트 마이어.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성전기사단 서울지부의 지부장.
하지만.
‘흐음.’
신전의 단상 위에 선 그의 속내는 표정과 달리 짜증으로 가득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서진혁의 마인 검증을 위해 데려온 성녀, 클레어.
검증을 시작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결과는 시작 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냥 마인이 맞다는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그걸 잘 알고 있는 슈헤르트의 속은 더욱 답답할 수밖에.
‘직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성녀는 성녀란 건가? 신 앞에서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더니.’
성전기사단과 이단재판소에서 경력을 쌓아 오면서 여러 성녀들을 만나 온 그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선 성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슈헤르트의 눈엔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게 궁극적으론 이름 없는 신을 위한 게 아닌데도 말이야. 쯔쯧, 역시 교육이 더 필요한 것 같군.’
교단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곧 이름 없는 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
‘이번 기회로, 우리는 세한의 헌터들을 성전에 동원할 수 있다. 실패해서는 안 돼.’
이단 심판관의 신분으로 음지에서 많은 일을 해 온 그에게, 성녀들의 고결한 태도는 존경할지언정 존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들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간섭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슈헤르트라 해도 예배관에 모인 수많은 한국의 헌터들 앞에서 성녀에게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결국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겠지만.’
그는 서울지부의 지하에 가둬 둔 견습 기사를 떠올렸다.
평신도 중에서 성녀가 나타난 유례없는 일 덕분에, 견습 기사의 신분으로 운 좋게 성녀의 호위를 맡은 자.
주제도 모르고 성녀를 구하겠다고 홀로 나섰다가 체포되기는 했지만, 슈헤르트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 기사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내 말을 거스르긴 힘들 것이다.’
이름 없는 신을 위한 일에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
이번 기회에, 여전히 무지렁이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성녀를 제대로 교육시키리라.
착 가라앉은 슈헤르트의 눈이, 대답을 망설이는 성녀에게로 향했다.
“……선언합니다.‘
클레어가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결정을 내렸군.’
물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슈헤르트의 시선이 성녀와 서진혁에게로 향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길.’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슈헤르트의 입맛에 맞는 답을 내어주리라.
성녀의 작은 입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한보안의 서진혁 팀장에게선 마기나 마인과 관련된 어떠한 징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어진 클레어의 말에, 슈헤르트는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따라서. 이름 없는 신과 교단의 가호 아래, 세한보안의 서진혁 팀장은 마인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선언을 마친 그녀가 붉어진 눈으로 엷게 미소를 지은 순간.
‘……대계가 무너지겠군.’
그녀를 바라보는 슈헤르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세한보안의 서진혁 팀장은 마인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성녀의 입에서 판결이 내려진 순간.
신전의 예배관 안에서 검증의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역시.”
“정말로?”
“그럴 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자.
서진혁이 마인이 아니란 사실에 실망한 자.
그리고, 결과를 이야기한 성녀를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
하지만.
‘예상대로군.’
당사자인 서진혁은 그 중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진혁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클레어를 바라보며 엷게 웃었다.
방계, 억류, 구출.
그 말과 함께 강화도를 떠난 기사, 렌에게 망령 하나를 붙였을 때부터 세워 둔 계획이었다.
예상대로 호위기사는 성녀를 구하려다 체포당했고, 클레어는 그녀를 인질로 잡힌 채 검증 장소에 나왔다.
이미 과정과 결과가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 진혁은 클레어가 조금 더 편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이다.
‘생각보다, 지구가 망령에 대해 무지하다는 게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간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감옥이라 하더라도 망령을 이용해 감옥 문을 열어 주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그럼, 이제…….’
뒤처리만 남았군.
생각을 마친 진혁은 울먹이는 클레어와 그녀에게 다가오는 성기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기사 중 가장 높아 보이는 갈색 머리의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성녀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 자인가.’
성녀를 이용해 자신을 마인으로 몰아 죽이려 한 자.
‘그 뒤를 파 보면, 분명 뭔가가 나오겠지.’
그러기 위해선.
이 자리에서 꼬리를 잡아야 했다.
“그럼, 이상으로 검증을 마치겠습니다. 검증에 응해 주신 서진혁 팀장과 참석해 주신 귀빈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슈헤르트가 굳은 표정으로 행사종료를 알리는 말과 함께 급히 성녀를 데리고 나가려는 찰나.
“잠깐.”
진혁의 목소리가 예배관의 웅성이는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침묵에 잠긴 청중들 사이로, 단상을 빠져나가려던 슈헤르트와 클레어가 걸음을 멈췄다.
“……행사는 끝났습니다, 서진혁 팀장. 마인의 혐의를 벗은 것은 축하드릴 일이지만, 교단과 하실 말씀이 있다면 차후에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서 해 주시지요.”
자신을 불러 세운 서진혁을 향해 슈헤르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지었다.
허나 진혁은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옆에 선 성녀, 클레어를 가리켰다.
“성녀는 어디로 가는 거지?”
“……성녀님께 존칭을 써 주시지요. 그리고 성녀님께선 저희 기사단의 호위를 받아 곧 본단으로 귀환하실 예정입니다.”
웃고 있는 그의 입과 달리, 진혁을 바라보는 슈헤르트의 눈빛은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러나.
“그건 곤란한데.”
진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무명교라고는 하지만, 계약 사항을 이렇게 위반해도 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계약을 위반하다니.”
슈헤르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세한과 무명교가 맺은 계약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가 서가의 막내와 맺었던 밀약이라면 모를까.
어이가 없어진 슈헤르트가 반문하자, 진혁은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검증에 참석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 둔 물건.
“성녀, 클레어와 그 호위기사 렌 슈미트는 계약대로라면 내년까지 세한보안의 객원 요원이다. 그런데 지금 본단으로 돌려보내면, 내 입장에선 좀 곤란하지.”
말을 마친 진혁이 클레어와 렌의 서명이 적힌 계약서를 팔랑거리며 들이밀었다. 클레어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져 왔다.
“……그 얘기는 차후에 본단에서 하시죠. 성녀님께선 이번 검증으로 피로가 쌓이신 터라, 본단에 돌아가 요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당연히, 슈헤르트는 거부했다.
성녀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순간,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최악의 경우엔, 교단이 날 파문하고 이단으로 몰겠지.’
이단 심판관인 그가 숨 쉬듯 해 왔던 일이니, 이단으로 낙인찍힌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성녀를 여기서 보내 줄 순 없어.’
교단을 위해, 그리고 슈헤르트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런가.”
하지만 진혁은 계속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내 눈에 보이는 성녀는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군. 그리고.”
말을 멈춘 진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슈헤르트를 쏘아봤다.
“당신, 성전기사단의 서울지부장 아닌가? 서가와 성녀 사이의 일에 왜 자꾸 끼어드는 거지? 언제부터 기사단의 지부장 따위가 성녀의 활동에 간섭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만.”
“……간섭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성녀님을 보호하는 건 저희 성기사들의 의무니까요.”
‘좋지 않아.’
슈헤르트는 진혁의 말에 반박했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점차 바뀌어 가는 걸 느낀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보호를 명목으로 성녀를 지금까지 구속해 온 그다.
하지만 성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부터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을 터.
‘그 견습 기사를 손에 넣었으니,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만…….’
예배관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에 조금씩 의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럼, 성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군.”
물론, 진혁은 쉽게 그를 놔주지 않았다.
“클레어, 정말로 계약을 파기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라.”
“저는…….”
“이미 행사는 끝났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교단과…….”
사이에 낀 클레어를 두고 진혁과 슈헤르트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경건한 분위기였던 신전의 예배관은 어느새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쏴아아아!
한강 방향으로 난 예배관의 큼직한 창에, 거대한 파도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뭐, 뭐야?”
“한강에 파도라고?”
“해일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난 거대한 파도 앞에서, 예배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뛰어난 엽사들이었으니 큰 파도 따위에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나타난 현상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정 놀랄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
파도 뒤에서.
무언가가 울음소리를 내었다.
―……!
귀가 아닌 영혼을 통해 전해지는 의지.
사악함으로 가득한 영적인 파장이 엽사들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이게, 대체 뭐야?”
“괴수인가?”
“하지만, 경보가 작동하지 않았어!”
마도 감시 위성 전우치.
한반도에 나타난 모든 던전과 괴수를 감시할 수 있는 보구조차도 놈을 감지하지 못했단 사실에, 최현을 비롯한 엽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저건…….”
오직 한 사람.
서진혁만은, 한강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가 무엇인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스으으!
사령술사가 가진 고유한 감각, 영안.
산 자와 죽은 자의 혼을 볼 수 있는 능력.
스으으으!
영안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진혁의 눈앞에, 놈의 정체가 드러났다.
지구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존재.
하지만, 파슬란이 있던 땅 아스칸에서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
“아귀…….”
검게 물들어 있는 거대한 악(惡).
놈을 마주한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