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밤에서 새벽으로, 새벽에서 여명으로 바뀔 동안에도 석모도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지이이잉!
밝아 오는 하늘을 두 줄기의 푸른 광선이 가로지른다.
강력한 뇌전의 마나로 이루어진 빛이 향한 곳은, 반대편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서리비룡의 거대한 몸뚱이.
파지지직!
두 줄기의 뇌전에 직격당한 병 급 괴수의 몸이 물고기처럼 경련하더니, 아래로 추락한다.
풍덩!
이내, 놈의 몸뚱이가 차가운 서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걸로 다섯.”
을 급 마력포, 천자총통을 쏘아 낸 두정갑 안에서 설화는 하얗다 못해 퍼레진 얼굴로 손가락을 꼽았다.
마나, 정신력, 체력.
몇 시간 동안 전력을 다해 싸우고 나니 셋 모두 한계에 다다른 상태.
“키에에에에!”
콰르릉!
그녀와 함께 싸운 천둥비룡과 진혁의 괴수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버티지도 못했으리라.
삐! 삐!
[잔여 마나 농도 5%. 기체 보호를 위해 1분 뒤 자동으로 가동을 종료합니다.]
“하여간 약해빠져서는.”
경고음과 함께 들려온 마법 자아의 말에, 그녀는 지친 눈을 슬쩍 찌푸리고는 기체를 지상으로 하강시켰다.
쿵!
조선시대의 갑옷을 갖춰 입은 강철의 거인이 바닥에 내려앉자, 거인의 등 부분이 푸르게 빛났다.
[충전 모드 가동. 전투 가능 수준까지 앞으로 5분.]
“돌아가면 훈련도감에 말해 놔야겠어. 이런 걸 가지고 어떻게 에피로나에서 싸우겠다고…….”
마나와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이가의 특제 초콜릿 강정을 입에 집어넣은 설화는 두정갑의 마나가 다시 충전되기만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순 없겠지만, 오 분 정도라면 진혁의 괴수들이 충분히 빈 자리를 메꿔 줄 것이다.
그때였다.
“……쟤넨 또 왜 저래?”
달콤씁쓸한 강정을 녹여 먹으며 전장의 상황을 확인하던 설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갑자기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마치 군대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던 괴수들의 진형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키에에에에!”
병 급과 정 급, 정 급과 정 급, 병 급과 병 급.“
서로 협력하던 괴수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옆의 동료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괴수, 그것도 서로 종이 다른 괴수들 사이에 유대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당연한 일이 지금까지는 당연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만.
“잘 된 거긴 한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설화의 눈살이 슬쩍 찌푸려진 그때.
치지지직…….
두정갑에 장비된 마법 통신 장비로부터 잡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기체에 통신을 보내 왔다는 알림.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통신을 보낼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서진혁?”
으적으적!
설화는 녹여 먹던 초콜릿 강정을 단숨에 씹어 삼키고는 버튼을 눌러 통신을 연결했다.
―그쪽 상황은 어떻지?
그녀의 예상대로, 통신을 보내 온 사람은 서진혁이었다.
‘저게 괴수 잡으러 간 놈 맞아? 무슨 먼지 하나 안 묻었어?’
언제나처럼 재수 없을 정도로 말끔한 서진혁의 모습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뭔가…… 좀 이상해. 괴수들이 갑자기 자기들끼리 물고 뜯고 난리도 아냐.”
설화가 말과 함께 공중을 가리키자, 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다. 방금 을 급 괴수를 토벌했으니까.
“아, 그래? 어쩐지…….”
태연한 그의 말을 듣고 설화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깐, 벌써 을 급 괴수를 토벌했다고?”
곧 안경 뒤에 숨어 있던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엽사 회장께서 힘을 좀 썼지. 마침 괴수들이 혼란에 빠져 있으니, 이 틈에 강화도를 정리하면 되겠군.
“아, 아니. 그건 맞는데…….”
을 급 괴수의 토벌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끝났단 사실에, 그녀는 당황해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아, 그리고.
당황한 설화의 정신을 깨운 것은, 진혁의 다음 한마디였다.
―뭐라도 먹고 있었나 본데, 입술은 좀 정리하는 게 낫겠군. 그럼.
팟!
그 말과 함께 진혁과 연결된 통신이 끊어진 순간.
“……이 재수 없는 자식이…….”
설화는 초콜릿이 묻은 입술을 매만지며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었다.
* * *
“흐으응.”
강화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 광채를 바라보며, 바다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미령은 콧소리를 냈다.
“최현. 일 품 중엔 말석이라지만,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냐.”
회색의 빛무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챈 그녀의 눈은 한없는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잡종이 어쩌고 하더니, 결국 인간 하나 못 막았군. 웃기지도 않는 일이야.”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지구의 물정도 모르는 을 급 괴수 따위가, 일 품의 엽사가 다섯이나 존재하는 한국에서 세력을 넓힌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한국을 적당히 흔들어 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기대가 너무 과했는지도 모른다.
“이러면 대주님께 새로 보고를 드려야 할 텐데…….”
대주.
그의 모습을 떠올린 미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별말이야 안 하시겠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긴 민망하단 말이지.”
그녀는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강화도와 석모도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섬들과 한강…….
순간.
“……오.”
괜찮은 아이디어가 미령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조금만 더 놀아 볼까?”
한강을 바라보던 그녀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 * *
“과연, 엽사 회장다운 솜씨십니다.”
짝짝짝
뱃가죽이 뻥 뚫린 여명이무기의 시체 앞에서, 진혁은 최현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새롭게 일으킨 망자들로부터 흑마력을 흡수한 진혁의 얼굴엔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최현은 고개를 젓고는 주변을 가리켰다.
“언젠간 이겼겠지만,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건 자네의 도움이 컸지.”
그가 가리킨 곳엔, 이제는 생명을 잃고 쓰러진 지룡들이 있었다.
지금은 마치 태풍에 꺾인 갈대처럼 머리만 비쭉 내민 채 널브러져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병 급 괴수들.
놈들이 을 급 괴수의 발밑을 흔들어 준 덕에, 최현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무기를 일격에 잡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문제지만.’
최현은 표정을 굳힌 채 진혁을 바라봤다.
“……자네,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죠.”
“대체, 언제부터 괴수를 다룰 수 있게 된 건가?”
분명, 서가의 것은 아니다.
백 년 전, 가문을 열었을 때부터 무가(武家)의 길을 걸었던 서가에 괴수를 부리는 술법 따위가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하물며, 눈앞의 서진혁은 식물인간이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엽사 지망생이었던 자다.
괴수를 다루는 혈통을 타고난 유가의 가주도 아니고, 어떻게 이토록 많은 괴수들을 손짓 하나로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진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엽사 회장인 내게도 말인가?”
“정 원하신다면, 일단 저희 가주의 허락을 먼저 구하셔야 할 겁니다. 그러면 혹시 알려드릴지도 모르죠.”
그가 웃으며 거절의 뜻을 밝히자 최현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자네의 그 힘,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냐. 정체를 알 수 없단 건 둘째 치더라도, 마기와 비슷한 냄새가 아는 그 힘…… 반평생을 엽사로 살아오면서 처음 느껴 보는 힘이란 말일세.”
인간이 마기와 비슷한 힘을 다룬다.
그 말인즉.
‘서진혁이, 마인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엽사들을 총괄함과 동시에, 모든 마인을 제거할 의무를 지닌 엽사 회장의 입장에선 타당한 의문이었다.
“혹시, 절 마인이라고 의심이라도 하는 겁니까?”
“……조사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가진 힘의 근원이 워낙 불분명하니까.”
미소 띤 진혁의 말에 최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마인인 게 맞다면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수많은 괴수들을 손짓 하나로 부릴 수 있는 인간이란, 을 급 괴수만큼 위험한 존재니까.
‘아니, 어쩌면 더 위험할지도 모르지.’
진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피식.
진혁은 회장의 기세를 가볍게 받아넘기며 웃었다.
“요즘 들어 많이 듣는 말이긴 합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검증해 드리죠.”
“……정말, 마인이 아니란 말인가?”
“어차피, 여기서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분간은 마인이 아닌 걸로 해 두는 게 서로가 편한 길이 아닐까 합니다만.”
태연한 진혁의 말에 최현은 잠시 입을 다물고는 눈앞의 청년을 살폈다.
이내,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일단은 동료라고 치지. 어찌 되었건, 자네 덕에 을 급 괴수를 쉽게 잡은 건 사실이니.”
정말 진혁이 마인이었다면, 여명이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발밑을 흔들었으리라.
쉽게 당하지야 않았겠지만, 제법 곤란을 겪긴 했을 터.
“그래도, 조만간 검증에 참여해 주면 좋겠군. 언제까지 숨기고 다니기에, 자네의 힘은 너무 눈에 띄어.”
“우선 강화도를 정리하고 나면, 그때부터 생각해 보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서로를 향해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할 게 하나 더 있군요.”
진혁이 입을 다시 연 것은 그때였다.
“이야기?”
최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진혁은 차갑게 식은 여명이무기의 사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을 급 괴수의 사체,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한국에선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을 급 괴수다.
놈의 사체가 얼마나 희귀한 물건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최현은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뱃가죽이 뚫렸으니 가치가 좀 깎이긴 했겠지만,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을 급의 괴수니 값어치는 확실히 하겠지. 경매를 연 다음, 수익금은 엽사회의 재정에 보탤 걸세.”
경매에 부친다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낙찰가가 나올 터.
쪼들리는 엽사회의 재정을 살릴 생각에 최현의 미소가 진해졌다.
“아, 걱정 말게. 자네 몫은 규정에 따라 확실하게 챙겨 줄 테니까.”
“제게,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만.”
혹시나 싶어 덧붙인 회장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방법?”
최현이 진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세한 카드에서 발급한, 북두칠성이 새겨진 흑색의 카드.
“가격은 상관 없으니, 제게 넘기시죠.”
서가의 자제들에게만 지급되는 한도 무제한의 카드를 들이밀며, 진혁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