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여명이무기.
지성을 가진 을 급의 괴수로 태어난 순간부터, 여명이무기의 자아 속엔 한 가지의 목표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격을 넘어서라.’
그리하여, 에피로나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괴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는 원대한 야망을 위해, 이무기는 다른 하등한 괴수들과 함께 이계행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이계에서 마기를 모아, 염원하던 마룡으로 승격할 수만 있다면 취급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저게, 어찌 인간이란 말이더냐.
해안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던 금빛의 괴수는, 어느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상륙을 막기 위해 배치해 놓은 괴수들은 어느새 모래사장 안쪽의 숲까지 밀려나 있었다.
그들을 몰아낸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크으으으.”
“키에에에에!”
괴수.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명령에 따르던 괴수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난 순간 동료들을 향해 발톱을 들이밀었다.
딱딱! 딱딱딱!
쐐애애액!
거기에, 괴수들의 틈에서 날붙이를 들이대는 해골들과 날아다니는 창까지.
그 모든 것이, 공중에 떠 있는 한 인간의 작품이었다.
―건방진 인간 놈…….
감히 자신이 부리던 괴수를 빼앗아 갔단 사실에 이무기가 살기를 내뿜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마룡으로의 승격.’
마기의 냄새를 풍기는 건방진 인간 여자의 제안.
―그 제안이 진정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알기 위해선, 결국 저 인간을 죽여야만 했다.
되도록, 빨리.
―아무래도,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겠군.
판단을 끝마친 여명이무기가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구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이무기가 서 있던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은 아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땅속을 헤집으면서 생긴 부작용일 뿐.
―가라.
고오오오!
뒤흔들리는 땅을 내려다보며, 이무기는 소름 끼치는 포효를 내뱉었다.
* * *
최현이 강화도에 합류한 순간, 해변을 지키던 괴수들이 밀려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콰직! 콰드득!
기껏해야 병 급도 안 되는 괴수들이 버텨 내기에, 일 품의 엽사가 가진 격은 너무나 높았다.
쾅!
오러도 뿜어 내지 않은 그가 주먹이나 발을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한 마리 이상의 괴수가 목숨을 잃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지만.
“이 속도라면, 한 시간 안에는 을 급 괴수에게 도달하겠어.”
정작 괴수를 도살하고 있는 최현의 표정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엽사 회장에 오른 뒤로 몇 없었던 전투기는 하지만, 정 급이나 무급 따위의 약한 괴수들이 상대이니 별 감흥도 없을 수밖에.
“그 전에 도착할 겁니다. 놈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요.”
그 말에, 뒤에서 망자들을 부리던 진혁은 고개를 젓고는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봤다.
과거 고려산이라 불렸던 산의 중턱.
그곳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을 급의 괴수가 있었다.
이 속도라면, 길어야 삼사십 분이면 놈을 대면하게 되리라.
‘을 급 괴수를 처리하는 건 문제가 아냐.’
일 품의 엽사가 함께하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을 급 괴수가 강력하다고는 하나, 초상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일 품의 엽사 앞에선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으니까.
진혁이 생각하는 것은 그 이후였다.
‘을 급 괴수의 육체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을 급 괴수의 육체는 그 격에 걸맞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그 육체를 얻을 수 있다면 망자를 부리는 진혁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우선, 놈을 잡고 난 다음 회장과 이야기해 봐야겠어.’
생각을 마친 진혁의 시선이, 망자들과 함께 괴수를 도륙하고 있는 최현의 등에 머물렀다.
구구궁!
굉음과 함께 지면이 몸을 부르르 떤 것은 그때였다.
“크으으!”
딱딱딱딱!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대지 위에 선 망자와 괴수들이 균형을 잃고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이건……?’
공중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진혁은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주변을 살폈다.
곧.
콰아앙!
지진의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지렁이였다.
온몸에 돋아난 뾰족한 가시와 어지간한 기차보다 거대한 덩치를 제외한다면, 놈들은 분명 지렁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
열 마리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지렁이들이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한 일은, 주변의 망자와 괴수들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콰드드드드득!
땅거죽과 함께 몇몇 해골이나 괴수들을 집어삼킨 지렁이들이 지상에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다.
“끼이이이!”
“크아아아아!”
놈들이 몸을 내밀 때마다 괴수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잡아먹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강화도 한복판에서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성준과 자이츠 그리고 최현뿐이었다.
“토룡이야!”
괴수들의 정체를 알아챈 최현이 진혁을 향해 소리 질렀다.
“병 급이니 을 급 괴수의 친위대쯤 되는 모양인데, 정말 놈에게 가까이 왔나 보군!”
진혁에게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최현은 마치 두더지게임의 두더지처럼 솟아났다 들어가는 토룡의 대가리를 가리켰다.
“금방 정리하고 가세! 놈들이 나왔다는 건, 을 급 괴수 놈도 끝물이란 소리니까!”
“먼저 가시죠.”
하지만 진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쩌면, 이놈들을 미끼로 도망치려는 속셈일지도 모릅니다. 여긴 제가 맡고 있을 테니 먼저 가십시오.”
수십의 망자들이 놈들에게 잡아먹혔음에도, 최현을 바라보는 진혁의 표정엔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그럼, 먼저 가겠네. 천천히 오게나.”
단호한 진혁의 말에, 최현은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발을 굴렀다.
쾅!
“역시, 일 품의 엽사는 다르군.”
을 급 괴수가 있는 고려산을 향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가는 최현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진혁은, 발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키이이이이!”
땅거죽을 파헤쳐질 대로 파헤쳐져 원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
해골들과 이미 죽은 괴수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괴수들이 그 사이로 뒤섞여 있었다.
콰드드득!
중간중간 거대한 지룡들이 날치처럼 솟아오르며 괴수들을 끌고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덤이었다.
‘자칫하면, 나도 위험했겠어.’
어지간한 실력을 지닌 엽사들도 까다로워하는 것이 지룡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땅속에서 기습하는 거대한 괴수란, 그 존재만으로 공포를 심어 주니까.
하지만.
‘망자들을 삼켜 두다니, 고맙게도.’
진혁은 달랐다.
스으으!
심장 속 흑마력을 눈으로 돌리자, 그의 눈이 도깨비불처럼 시퍼렇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영을 볼 수 있는 눈, 영안.
시리도록 차가운 귀를 뿜어내는 그의 눈에, 땅속에 파묻힌 채 움직이는 망령들이 들어왔다.
조금 전, 지룡들이 삼켜 버린 그의 망자들이었다.
“자이츠, 영혼석의 힘을 끌어내라.”
―아, 알겠소. 흐아아압!
스으으!
땅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혁이 명령을 내리자, 킹 스켈레톤 자이츠가 머리에 박힌 영혼석의 힘을 끌어냈다.
단순히 흑마력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뿐만이 아닌, 영혼석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힘.
정령의 힘을.
쩌저적!
물의 정령력이 냉기의 형태로 새어 나오자 자이츠가 밟고 있던 대지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망령이여.”
진혁은 언령과 함께 손을 휘저었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새로운 힘을 내려받으라.”
그 순간.
쿠구구궁!
지면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흔들렸다.
쩌적! 쩌저적!
진동을 견디지 못한 지표면이 제 맘대로 갈라지고 찢어지기를 반복했다.
“키에에에에!”
몇몇 운 없는 괴수들이 벌어진 틈 사이로 떨어져 내렸지만, 지진은 멈추긴커녕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구구궁!
거의 동시에, 십여 마리의 지룡들이 땅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지룡들의 몸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서서히, 푸른색의 냉기에 의해 몸이 얼어붙고 있다는 것.
놈들이 삼킨 망자들이 뿜어낸 물의 정령력이 벌인 일이었다.
―……!
산 채로 얼어붙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지룡들에게, 그들이 땅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는 사실은 잊혀진 지 오래.
“처리해라.”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진혁이 손을 한 번 내저은 순간.
―명대로.
―기다리고 있었소!
식귀와 킹 스켈레톤의 검이 붉고 푸르게 타올랐다.
* * *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렸단 말이냐.’
여명이무기.
승격을 위해 모든 걸 걸고 이계에 도착했던 을 급 괴수였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감정은 오직 당혹감 뿐이었다.
쾅! 콰광!
이무기의 꼬리가 무언가와 부딪칠 때마다 폭탄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사방을 진동했다.
무언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 명의 인간.
‘어찌, 어찌 이토록 강한 인간이…….’
알고는 있었다.
이계에는, 자신보다 강력한 인간이 적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빨리 조우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쾅! 콰과광!
수십 번의 공격이 오갔지만, 눈앞의 조그마한 인간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대로면, 내가 당한다.’
꼬리와 턱에서 전해져 오는 저릿한 통증이 이무기의 생존본능을 조금씩 일깨웠다.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승격을 해야만…….’
앞서 보냈던 친위대, 지룡은 소식이 끊긴 지 오래.
또 다른 친위대인 비룡들을 불러오기엔 그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아쉽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기회는 찾아올 거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이계에 도착하기 전부터 배워 온 생존의 방법.
이무기는 조그마한 인간과 공격을 주고받으며 도망칠 기회를 엿봤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잠깐의 틈만 있다면 다시 게이트를 열고 자신들의 원래 세계, 에피로나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쿠구구궁!
지면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이무기의 바람은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콰아아앙!
‘이, 이런!’
발밑의 대지가 갑자기 꺼지면서 이무기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무너지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디딜 곳이 없는 상황에서 균형을 잡을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이무기의 시선이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 아래로 향한 순간.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그의 정신파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
자신의 발밑을 무너트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보낸 친위대, 지룡들.
어째서.
그 어떤 괴수들보다 강력하게 지배하에 두었던 지룡들이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여명이무기는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다.
만무결(萬武結)
혼돈파(混沌破)
파아앗!
작은 인간으로부터 뻗어 나온 회색의 광휘.
그것이, 이무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