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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55화 (55/174)

55화

고려산.

천년 전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을 따 지어진 산의 중턱에, 금빛의 괴수가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전신이 황금색의 비늘로 덮인 거대한 도마뱀.

골든 드레이크, 한국에서는 여명이무기라 불리는 종이었다.

용이 되지 못해 괴수가 되어 버렸다는 에피로나의 설화 그대로, 녀석의 모습은 게이트 너머에서 온 지적생명체 중 하나, 용종(龍種)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놈에겐 용종의 상징인 거대한 날개와 목 뒤에 박힌 마나의 응집체, 붉은색의 용심(龍心)이 없다.

용이되 용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을 급 괴수의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강력한 괴수.

―사라져라, 잡종.

놈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녀석의 앞에, 괴수라면 본능적으로 증오하는 인간의 형태를 한 여인이 서 있었으니까.

평범한 인간과 달리 그녀의 몸에선 마기의 냄새가 풍겨 왔지만, 그 사실이 이무기의 생각을 돌리진 못했다.

―그 역겨운 몸뚱이를 찢어 버리기 전에, 당장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고오오!

이무기의 금빛 몸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은커녕,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 버릴 만큼 강력한 위압감이 단 한 사람을 향해 집중되었다.

하지만.

“넌 날 돌려보낼 수 없을걸.”

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이무기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을 급의 괴수라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텐데. 이대론 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란 걸 말야.”

―너같은 잡종이, 나의 원대한 야망을 어찌 감히 짐작하려 하느냐.

을 급 이상의 괴수는 지성을 가진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무기의 말투는 그를 닮은 존재, 용종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 미령의 자세는 괴수의 위협적인 기세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여명이무기를 향해 다가간 미령은 천천히 작은 입술을 열었다.

“마룡으로의 승격.”

순간.

이무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눈치챈 미령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았다면, 던전 같은 쓰레기통에 스스로 뛰어들지도 않았겠지.”

괴수의 등급은 변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을 급은 다르다.

을 급의 괴수가 업을 쌓아 마기를 축적하다 보면, 벽을 넘는 순간이 온다.

수많은 괴수들로 가득한 에피로나에서도 몇 되지 않는 최강의 괴수들, 갑 급의 경지에.

―……잡종 주제에 주워들은 건 많구나.

“피차 비슷한 처지인데, 서로 존중해 주자고. 중요한 건, 내가 네 승격을 도와줄 수 있단 거지.”

말을 마친 미령은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이무기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겠지.

한참의 기다림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무기였다.

―내게 원하는 게 뭐냐.

이무기의 말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품속의 스마트폰을 꺼내 이무기에게 들이댔다.

“한 사람의 죽음.”

―사람?

“마침, 이 근방에 있거든.”

스마트폰의 화면에 떠오른 것은, 정장을 갖춰 입은 서진혁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    *    *

서해.

석모도와 강화도 사이를 갈라놓은 바다 위를 수십의 망자들이 날고 있었다.

―주군, 다 좋은데 이건 너무 좁소. 역시 멜리나가 타기엔 더 편했는데.

각기 거대한 방패를 밟거나 창에 매달린 해골들.

그 사이에서, 방패 위에 몸을 구긴 채 주저앉은 자이츠가 투덜댔다.

“멜리나는 석모도를 지켜야 한다. 너희가 공중전을 할 순 없을 테니까.”

그 말에 진혁은 고개를 내젓고는, 바다를 건너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팀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맞아, 아무리 네 괴수들이 있다지만, 지금 강화도에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을 급 괴수가 있다며?’

‘갈 거면 저랑 같이 가요! 당신을 버리고 가면 신께서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요!’

진혁이 강화도로 갈 거라는 말을 들은 주연과 설화, 클레어는 진혁을 만류했다.

강화도는 석모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괴수들로 우글거리는 곳.

훨씬 작은 석모도에서도 괴수를 몰아내기까지 제법 시간을 써야만 했다.

을 급 괴수까지 존재하는 강화도의 토벌난이도는 석모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을 터.

하지만 진혁은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강화도의 괴수 상당수는 이미 석모도에 와 있을 거다.’

그렇다 해도 적지 않은 숫자의 괴수들이 남아 있겠지만, 상륙의 난이도 자체는 훨씬 쉬워진 셈이다.

‘게다가, 엽사 회장의 도움도 받을 수 있지.’

일 품의 엽사가 함께한다면, 강화도 전체는 몰라도 을 급의 괴수 정도는 충분히 토벌할 수 있으리라.

―진혁 님, 곧 강화도에 도착합니다.

생각에 잠긴 진혁을 향해 성준이 말하자, 그는 고개를 들어 눈 앞에 펼쳐진 해변을 바라봤다.

그러나, 해변은 비어 있지 않았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가득 메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괴수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지성을 가진 을 급의 괴수는 자신보다 낮은 급의 괴수를 부릴 수 있으니까.

해변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저 괴수들 역시, 놈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리라.

“준비해라, 곧 전투를 시작할 거다.”

스으으!

진혁은 흑마력을 재차 끌어 올렸다. 그와 함께 진혁의 명령을 받은 리빙웨폰들이 빠르게 위로 상승했다.

쐐애액!

못해도 지상에서 오, 육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까지 오른 창과 방패들이 해안을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펑! 펑!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괴수들이 무언가를 쏘아댔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진혁과 망자들을 쉽게 맞출 수는 없었다.

이내, 진혁과 망자들이 해안에 모인 괴수들의 머리 위까지 당도했을 때.

“공격.”

진혁은 나직하게 명령을 내렸다.

―명대로.

―지금 가겠소.

타앗!

식귀와 킹 스켈레톤을 시작으로, 리빙 웨폰 위에 올라탄 망자들이 줄지어 괴수들로 가득 찬 해안을 향해 뛰어내렸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본다면, 진혁을 미친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부하들을 괴수 무리의 한복판에 던져 넣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서걱!

죽어도 죽지 않는 망자들에게, 난전만큼 유리한 전투 방법은 없었다.

콰드득!

거대한 괴수에게 물린 스켈레톤의 허리가 동강 난다. 다리를 잃은 해골이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하지만 해골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멈추지 않았다.

푸욱!

키에에에!

단창의 절반이 몸에 박혀 들자 멧돼지를 닮은 괴수가 비명과 함께 몸부림친다.

녀석의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푸푸푹!

주변의 스켈레톤들이 찔러 넣은 날붙이에 급소를 관통당한 괴수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것도 잠시.

스으으!

쓰러진 괴수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놈의 눈에서 빛나는 것은 생기가 아닌 시퍼런 귀기.

“키에에!”

생전과는 달리 으스스한 울음소리를 내뱉은 괴수가, 몸에 온갖 날붙이를 박아 넣은 채 조금 전까진 자신의 동료였던 괴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딱딱! 딱딱딱!

그 옆에서, 조금 전 두 동강 났던 스켈레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일으켰다.

딱딱딱!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해골은 괴수의 시체에 박힌 자신의 창을 찾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죽으면 죽는 대로, 죽이면 죽이는 대로.

망자들의 숫자는 늘어만 갈 뿐 줄어들지 않았다.

서서히, 해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괴수들이 섬의 안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흑마력의 소모가 꽤 심하긴 하지만.’

그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진혁은 점점 줄어가는 심장 속의 흑마력을 확인했다.

석모도에 심어 둔 사령수들이 어느 정도 보충해 주고는 있었지만, 아직 지상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전.

망자들을 복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들어가는 흑마력을 감당하기엔 부족한 양이다.

‘을 급 괴수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겠어.’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망자들이라지만, 흑마력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그가 가진 흑마력이 완전히 바닥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가라.’

진혁은 자신의 주변에 떠 있는 창과 방패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쐐애액!

망령이 깃든 수십의 리빙웨폰 중 몇몇이 을 급 괴수를 찾아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은 놈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강화도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야트막한 산.

그 중턱, 보름달빛 아래 반짝이는 황금비늘의 도마뱀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을 급 하나에, 병 급은 열여섯 정돈가.’

강력하긴 하지만, 최현과 힘을 합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딱딱! 딱딱딱!

“크아아아!”

아래에서 망자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괴수들의 벽을 뚫어 내는 게 먼저긴 했지만.

“조금 도와줘야겠어.”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혁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가라.”

명령과 함께 그의 심장에 남아 있던 흑마력이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이내.

쐐애애액!

진혁의 주변에 남아 있던 리빙웨폰들이, 전장의 괴수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    *

타타타탓!

최현은 달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승용차와 비슷한 그의 주력은 삼 품 이상의 엽사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특별할 건 없었다.

그가 밟고 있는 것이, 대지가 아니라 바다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촤촤촤촥!

마나 제어 능력이 극에 달한 일 품의 엽사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기예.

하지만 그 묘기를 펼치고 있는 최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을 급의 괴수라니, 그것도 게이트 근처에…….“

을 급 괴수는 혼자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숫자가 많은 건 아니지만, 이 품의 엽사만 되어도 을 급의 괴수를 상대로 제법 버틸 수 있으니까.

을 급의 괴수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두 가지다.

주변의 괴수들을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뛰어난 지성.

그리고.

‘승격.’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을 급의 괴수가 한 단계 진화하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따금 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갑 급의 괴수들과는 달리, 을 급에서 갑 급으로 승격한 괴수의 주변엔 수많은 괴수들이 함께할 테니까.

‘괴수들로 이루어진 군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다섯 가문과 한국의 모든 엽사가 힘을 합쳐도 이겨 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놈을 막아야만 했다.

촤아아악!

달빛으로 반짝이는 바닷물을 아스팔트처럼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길 한 시간여.

최현은 진혁과 만나기로 한 강화도의 해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나마, 서가에서 강화도와 석모도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일을 스스로 해 준 셈이니, 엽사 회장의 입장에선 고마운 마음마저 들 정도.

이윽고.

그가 바다를 넘어 해변의 모래에 발을 디딘 순간.

“……이건.”

최현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검붉은 피로 온몸을 물들인 괴수와 해골들.

그리고.

“늦었군요, 곧 새벽이 밝을 겁니다.”

그들의 가운데에 선, 정장 차림의 사내.

‘……꿈인가?’

신을 향해 미소 짓는 서진혁의 모습에, 최현의 마음에 한 줄기 의심이 피어올랐다.

물론, 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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