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대한엽사회관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엽사란 아무리 많은 지원을 퍼부어도 부족한 존재.
그들에게 들어갈 천문학적인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조금이라도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선, 행정을 담당하는 엽사회의 직원들을 갈아 넣는 것이 최선.
“오늘도 정시 퇴근은 글러먹었군.”
그것은, 회장인 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9를 가리키는 걸 보고 혀를 끌끌 찬 사내는, 몇 번째 보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서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대충 처리할 수는 없었다.
현 대한엽사회의 힘과 권위는 결국 일 품의 엽사인 그에게서 나오는 것.
그의 손이 닿지 않으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역시, 이런 건 맡는 게 아니었는데, 쯔쯧.”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 외에 이 자리에 앉을 일 품의 엽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임기가 끝나도 자리가 바뀔 일은 없을 테니까.
최현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한 장씩 훑고 있을 그때.
왜애애앵!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점멸하는 붉은빛이 회장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이건…….”
순간, 최현은 표정을 굳히곤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을호 경보라니.”
괴수 경보 중 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단계.
틱! 티틱!
회장의 손가락이 책상 한구석에 위치한 버튼을 바쁘게 오갔다.
그러자.
기이잉!
천장이 얼리며 거대한 스크린이 아래로 내려왔다.
곧, 화면에는 한 장의 지도가 떠올랐다.
대한엽사회 소유의 마도 감시 위성, 전우치로부터 보내진 한반도의 괴수분포도.
형형색색의 수많은 점들로 가려진 한반도의 모습을 살피던 최현의 시선이 강화도에서 멈췄다.
강화도의 중심에서 빛나는 주황색의 점.
“을 급, 이라니.”
을 급의 괴수.
근 오십 년 동안 한 번도 한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을 급의 괴수가 강화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둘러야 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최현은 곧장 책상 위에 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회장님.
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최 비서.‘
하지만 최현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이 상황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지적하는 대신, 그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다섯 엽사 가문에 연락하게. 을호 경보에 따라, 회장의 권한으로 비상소집령을 내리겠다고.”
다섯 엽사 가문의 꼭두각시인 엽사 회장의 몇 안 되는 권한 중 하나.
상대는 갑 급도 아닌 을 급의 괴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시기를 놓친다면, 더욱 큰 위협이 될 테니까.
철컥!
전화를 마친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 한편에 놓인 락커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그가 가장 아끼는 애병, 갑 급 보구 진천장(震天掌).
“이 자리에 앉고서는 처음이군.”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금속 장갑을 양손에 낀 최현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는 방을 나서려 했다.
뚜루루루!
책상 위의 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문을 나서려던 회장은 자리로 돌아가 수화기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회장님.
“무슨 일인가.”
최비서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그의 눈이 슬쩍 가라앉았다.
이윽고.
―서가의 전언입니다. 세한보안의 서진혁 팀장과 토벌 2팀이 이미 강화도에 파견 중인 상태라고…….“
“뭐?”
비서의 말을 들은 회장의 눈이 찌푸려졌다.
* * *
이설화.
삼 품의 엽사이자, 여인의 몸으로 착호갑사대의 장에 오른 자.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그녀는 수도 없이 많은 괴수를 쏘아 죽였고, 던전에서 숱한 죽음의 위기를 넘겨 왔다.
그럼에도.
“이 자식들, 대체 뭔데? 괴수 맞아?”
지금, 설화가 겪고 있는 상황은 그녀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충분히 비상식적이었다.
“끼이이이이!”
거대한 독수리를 닮은 정 급의 괴수, 칼날수리.
얼핏 보기에도 백은 넘어 보이는 숫자의 괴수들이 서넛씩 뭉쳐 그녀를 사방에서 에워쌌다.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운 녀석들의 공세가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들어왔다.
마치, 지성이라도 가진 것처럼.
“괴수들 주제에, 무슨 전술을 짜서 공격하냐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쥐고 있던 조종간의 버튼을 눌렀다.
투투투퉁!
그녀가 탑승한 기동형 갑주, 두정갑의 허리춤에 달린 두 정의 현자총통(玄字銃筒)이 불을 뿜는다.
폭발 마법이 부여된 검은 탄환, 진천뢰(震天雷) 수십 발이 탄막을 이루어 쏘아져 나간다.
목표는 두정갑의 앞을 가로막은 괴수들.
콰아아앙!
쏘아져 나간 탄환들이 폭발하며 괴수의 포위진에 구멍을 만들어 낸다.
‘지금.’
설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정갑의 추진기를 전력으로 가동했다.
콰아아아!
번개의 마나가 만들어 낸 푸른 불꽃이 두정갑을 빠르게 밀어낸다.
그와 동시에.
우웅!
갑주의 어깨에 달린 두 정의 마력포, 지자총통(地字銃筒)에 푸른빛이 모여들었다.
지이이잉!
천자총통에서 쏘아진 두 줄기의 청광이 향한 곳은, 빠르게 메워져 가던 포위망의 구멍 주변.
파직! 파지지직!
순수한 뇌전의 마나가 담긴 지자총통의 위력은 병 급의 괴수도 일격에 격살시킨다.
고작해야 정 급에 불과한 칼날수리들이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끼이이!”
두 줄기의 뇌전에 감전당한 수십의 칼날수리들이 온몸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사이, 설화와 두정갑은 유유히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잔여 마나 농도 30%, 전투 중지를 권고합니다.]
“전투 중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 괴수들한테도 말해 보지 그래?”
[불가능한 요청입니다.]
“알면 닥쳐!”
콰과광!
뒤로 물러서면서 괴수들을 향해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애초에 상대가 너무 많았다.
일격에 적을 격살하는 것이 목표인 이가의 전투 교리.
그 정점에 위치한 두정갑은 단기전이라면 강력한 괴수들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지만, 장기전엔 비교적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아, 씨.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냐?”
삼 품에 오르고 나선 처음 느껴보는 생명의 위협.
어떻게든 마나를 충전할 시간을 벌지 못하면, 결말은 둘 중 하나다.
마나를 모두 소모한 두정갑이 아래로 추락하거나, 칼날수리의 부리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거나.
어느 쪽이건, 반가운 결말은 아니다.
“일단은 쏘자, 쏘고 생각하자.”
마나를 전부 소진하고 추락하는 게, 놈들에게 물어뜯기는 것보단 조금 더 생존률이 높으리라.
생각을 마친 그녀는 조종간의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두정갑의 어깨에 장비된 천자총통이 재차 푸른빛을 내뿜는다.
[경고, 경고. 잔여 마나 농도 10%. 전투 중지 및 이탈을 권고합니다.]
“그게 되면 진작에 했지, 이 깡통아.”
[부정적인 언행은 전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두정갑에 장비된 마법 자아의 헛소리를 귀로 흘리며, 설화는 충전된 천자총통의 발사 버튼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콰르르릉!
수십의 검은 번개 줄기가 하늘을 물들인다.
빛과 같은 속도로 퍼져 나간 검은 번개가, 뭉쳐 있던 칼날수리들의 몸뚱이를 타고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파직! 파지직!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번개에 직격당한 칼날수리들의 신경이 전류를 감당하지 못하고 타 버린다.
날개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괴수들의 말로는 뻔했다.
“끼이이이!”
“끼이이!”
“……뭐, 뭐야?”
하늘을 검게 물들인 칼날수리 떼가 약 먹은 파리처럼 추락하는 모습을, 설화는 어이없어하며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번개를 날린 장본인이 눈에 들어왔다.
“키이이이!”
“……쟤는 언제 또 저렇게 강해진 거야.”
진혁이 부리는 천둥비룡.
녀석의 기분 좋은 울음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두정갑의 좌석에 몸을 기댔다.
식은땀으로 젖은 옷의 축축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허나, 아직 긴장을 풀기엔 일렀다.
“키이이?”
“……뭐야, 저건.”
칼날수리들이 사라진 빈 공간에 나타난 무언가.
녀석들을 바라보던 천둥비룡과 설화의 눈이 커졌다.
대강 보기에도 몸 길이가 십 미터는 넘어 보이는, 피막으로 된 날개를 가진 색색의 뱀들.
천둥, 서리, 화염, 어둠, 여명.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비룡들이었다.
“……무슨 병 급 괴수가…….”
눈앞에 나타난 수십의 병 급 괴수 앞에서, 설화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생각보다…… 만만치는 않군.’
하늘에서 벌어지는 공중전을 올려다보며 진혁은 표정을 굳혔다.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병 급의 괴수인 천둥비룡과 진혁이 되살린 석모도의 수많은 비행형 괴수들 그리고 이설화의 지원까지.
정 급의 괴수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한 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병 급 괴수가 저렇게 많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질로도, 양으로도 쉽게 압도할 수 없는 상대.
‘한 달만 더 있었다면, 충분히 버텼을 텐데.’
그사이 진혁은 석모도에 충분한 숫자의 사령수를 심었을 것이고, 사령수로부터 끌어모은 막대한 흑마력은 망자를 영원히 움직이게 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길어야 사흘인가.’
고작 사흘 만에 저 많은 괴수들을 전부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전에 무언가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우우웅!
진혁이 가진 통신 구슬이 몸을 떤 것은 그때였다.
“이건…….”
주머니의 구슬을 꺼내 든 진혁은 구슬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최현]
그가 알고 있는 최현이란 이름의 사람은 하나뿐이다.
대한엽사회의 회장이자, 한국에 다섯 명만이 존재하는 일 품의 엽사 중 하나.
‘하필 이런 때 연락을 하다니, 왜지?’
의아해하면서도, 진혁은 통신 구슬에 흑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앗!
곧, 구슬 너머로 중년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달리고 있는 것인지, 사내의 주변 배경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진혁 팀장, 지금 석모도에 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그럼, 아직 얘기를 못 들었겠군.“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강화도에 을호 경보가 발령됐네.
“을호 경보라면.”
―을 급 괴수야. 지금 다섯 가문을 포함한 모든 엽사들을 소집한 상태일세. 나도 지금 강화도로 가는 중이고.
그제야, 진혁은 일련의 상황이 벌어진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을 급 괴수의 영향이었나.’
갑자기 괴수들이 강화도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도, 병 급의 괴수들 수십 마리가 하늘에 몰려나온 것도.
을 급 괴수가 강화도에 나타났기 때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진혁은 생각했다.
불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진혁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뿐.
“회장님.”
―왜 그러지?
“저를 좀 도와주시죠.”
―……도와달라고?
“네.”
을 급 괴수를 잡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