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강화도는 육지와 가깝지만 먼 곳이다.
거리상으론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섬을 가득 채운 수많은 괴수들로 인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 때문.
하루에도 수십 개의 던전이 붕괴하고, 생성되면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이 사투를 벌이는 지옥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 지옥의 한복판.
쩌적! 쩌저적!
던전과 연결된 통로, 게이트가 서서히 부서져 내린다.
이미 게이트크러시가 벌어진 지 수십 년도 넘은 땅이었으니, 던전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것 정도는 흔해 빠진 일.
그러나.
이번 붕괴는 지금까지와 달랐다.
쨍그랑!
던전의 붕괴를 알리는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주변으로 확장된다.
그와 동시에, 던전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괴수들이 차원 붕괴에서 살아남기 위해 쏟아져 나온다.
문제는.
“키이이이이!”
“크으으으……!”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이, 대부분 병급의 괴수란 것.
“키이이이!”
“크아아!”
한 달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병 급의 괴수들이 떼로 몰려나오자, 강화도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지배자에서 사냥감으로 강등당한 정 급과 병 급의 괴수들이 앞다퉈 섬 밖으로 도망쳤다. 그 뒤를 방금 튀어나왔던 병 급의 괴수들이 쫓았다.
하지만, 모든 괴수가 던전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쿵! 쿵!
던전이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 하나의 괴수가 무너져 가는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색의 비늘로 전신을 뒤덮은, 네 발 달린 도마뱀.
그 길이가 어지간한 기차보다 길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다지 위협적인 생김새는 아니었다.
고오오오오!
놈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사악한 기파가 강화도를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 * *
영혼을 다루는 것은 명계의 고유한 권한이다.
사령술사들의 사령술 또한 마찬가지.
얼핏 사령술사들이 마음대로 망령을 부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명계의 권한을 잠시 빌려 온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령술사들은 빌린 망령을 부릴 뿐 흡수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신이 나갔군.”
무언가가 영혼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을 발견한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서 노기가 은은하게 타올랐다.
명계와 현계를 유지하는 영혼의 순환시스템을 근원부터 부숴 버리는 금기 중의 금기.
만일 사령술사가 저런 짓을 벌였다면, 그자는 영혼째로 연옥에 끌려가 영원히 고통받았으리라.
‘여긴 명계와의 연결이 약한 모양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명계로부터 빌려 온 힘인 사령술은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정작 명계와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혼을 소멸시키는 금기를 저질러도 제재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망령군주 파슬란 드 노미크롬의 힘을 이어받은 진혁을 제외하고는.
‘언젠간, 놈들을 찾으러 가야겠군.’
모조리 찾아내서, 금기를 범한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그것이, 명계를 대리하는 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강화도를 정리하고, 영지를 세운다.’
놈들을 징벌하기 위해선 힘을 가져야 하니까.
그리고, 영지를 가진 사령술사는 그렇지 못한 사령술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손에 쥘 수 있다.
진혁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영지를 구축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
‘얼마 남지 않았다.’
스켈레톤과 망자들이 싸우고 있을 석모도의 능선 너머를 바라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
* * *
한국에서 가장 큰 섬, 제주도의 또 다른 별명은 삼다도(三多島)다.
바람, 돌 그리고 괴수가 많은 섬.
한국의 삼 대 금지구역답게 온갖 종류의 괴수로 가득 차 있는 제주도의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의 백록담 위에서.
“죄, 죄송합니다, 대주!”
한 남자가 엎드려 잘못을 고하고 있었다.
엎드린 남자의 목과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간간이 몸을 떠는 사내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린 상태.
“제가 멍청하게도 임무를 잊고…….”
남자, 진우가 이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의 앞에 선 검은 옷의 사내는, 세계의 그림자에서 암약하는 마인들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강하고, 잔악한 존재였으니까.
“그만.”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손을 내젓자, 진우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다스렸다.
하지만 두려움에 지배당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끄, 끝장이야.’
이미 최후를 직감한 진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잘했어.”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 네?”
그 말에, 엎드려 있던 진우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사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도망쳐 오지 않았다면 정보 자체를 얻을 수 없었겠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가, 가, 감사합니다…….”
대주에게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듣자, 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였다.
‘사, 살 수 있는 건가.“
하얗게 질린 그의 표정에 희망이 조금씩 차올랐다.
“하지만…… 기분은 좀 나쁘네.”
스윽!
검은 옷의 사내가 무심하게 손날을 휘두를 때까지는.
툭!
희망에 찬 표정 그대로, 진우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경사를 타고 한라산자락을 따라 굴러 내려갔다.
동시에.
스으으으!
머리를 잃은 몸은 검은 연기로 화했다. 이내, 한 줄기로 모인 연기가 대주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진우의 영혼까지 말끔하게 먹어 치운 사내의 표정은, 처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럴 때가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빨리 커 버렸구나, 진혁아.”
아르카나에서 천둥비룡과 녀석을 마주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
허나, 그렇다 해도 그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다.
“거기다, 내 부하들에게 손을 댈 줄이야. 쯔쯧.”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사내는 주머니에서 땅콩을 한주먹 꺼내 껍질도 까지 않고 으적으적 씹었다.
“뭐…… 그렇다면.”
혼쭐을 내 줄 필요가 있겠어.
여명.
그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 * *
진혁과 토벌 3팀, 그리고 이설화가 석모도를 모두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사흘이었다.
단 다섯 명이 해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딱딱! 딱딱딱!
섬의 평지를 줄지어 걷는 수백의 스켈레톤들.
하나하나가 서가의 망령들을 품고 있는 해골 병사들의 무력은 어지간한 오 품의 엽사와도 맞먹을 정도다.
먹지도, 자지도 않는 오 품의 엽사 수백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 제아무리 괴수들이라 해도 버틸 방법이 없었다.
새로운 던전들이 꾸준히 나타나기는 하겠지만, 이미 섬의 괴수들을 모조리 밀어 버린 이상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우선은, 사령수부터 심어야겠군.”
텅 비어 버린 섬을 한 바퀴 둘러본 진혁은 판단을 내렸다.
강화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망자들.
수많은 망자들을 유지하기 위해선, 흑마력을 공급해 줄 사령수가 필요했으니까.
두근! 두근!
흑마력으로 시커멓게 물든 진혁의 심장이 고동친다. 거세게 뿜어져 나온 두 줄기의 흑마력이 각기 진혁의 양팔을 타고 주변에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을 향해 뿌려진다.
“망령이여, 명계의 율법에 따라 지금 네 영혼을 그릇에 옮겨 담아라.”
파아아앗!
―육체, 육체다!
―좋은 냄새가 나는군!
진혁의 영창이 맺어짐과 동시에, 영혼 구슬에 담긴 망령들이 흑마력을 머금은 나무들로 파고들었다.
진한 고동색의 나무줄기가 시커멓게 물드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의 주변엔 수십 그루의 새로운 사령수가 검은 뿌리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앞으로 한 달인가.”
석모도를 사령수로 가득 채우기까지 걸릴 시간.
그때가 되면, 강화도를 뒤덮기에 충분한 수의 망자들을 부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우웅!
시간은 진혁의 편이 아니었다.
―크, 큰일 났어요!
정장 주머니 속에서 놀란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이 통신 구슬을 꺼내자, 구슬 속에서 떨리는 성녀의 동공이 보였다.
―괴, 괴, 괴…….
당황한 그녀가 더듬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괴, 괴수, 괴수예요!
그 말을 들은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괴수라면 이미 토벌이 끝났을 텐데. 새로운 던전이 붕괴한 건가?”
던전이 나타나는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니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호들갑을 떨 만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게, 그게 아니라니깐요? 하늘 좀 봐 봐요!
하지만, 진혁의 말을 들은 클레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연거푸 찔렀다.
그의 시선이 석모도의 능선 위로 향했을 때.
“……이런.”
진혁은 클레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이 검게 변했다.
아니, 하늘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영안으로 하늘을 살핀 진혁은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괴수.’
날개가 달린 수많은 괴수들의 군집.
셀 수 없이 많은 괴수들이, 바다를 넘어 석모도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놈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의 삼 대 금지 구역 중 하나, 강화도.
‘어째서 놈들이 여기까지 온 걸까.’
자신의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는 것이 괴수들의 본능.
다시 말해.
‘본능을 이길 만한 무언가가, 강화도에 있단 말이겠지.’
하지만, 그걸 알아보는 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석모도를 향해 몰려드는 괴수 무리를 막아 내는 것.
‘성준, 멜리나, 자이츠.’
―네, 지금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휴, 하필 날아다니는 놈들이잖아? 내가 제일 고생하겠네.
―걱정하지 마쇼, 주군. 힘만 조금 회복하고 나면 저런 날파리들은 금방 쓸어버릴 테니까!
진혁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움직이는 망자들을 잠시 살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전력만으론 한계가 있다.’
하늘을 가릴 만큼 많은 숫자의 괴수.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쪽 역시 더 많은 숫자의 망자가 필요했다.
망자를 유지할 흑마력은 부족하나마 사령수들에게서 끌어올 수 있으니, 필요한 것은 망령과 망령을 담을 그릇뿐.
곧, 진혁은 전진기지 한 편에 늘어선 컨테이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망령이여.”
스으으으!
심장에서 흑마력을 끌어내며 언령을 내뱉는다.
―드디어, 봉인이!
―간다!
―육체로!
사령술의 힘에 반응한 영혼 구슬 속 망령들의 봉인이 풀려나고, 잠들어 있던 서가의 영혼들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컨테이너를 향해 쏟아져 들어간다.
스으으으!
사방에 심어진 사령수로부터 보내진 흑마력이 진혁의 몸을 타고 컨테이너로 향한다.
그 순간.
콰아아앙!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강철로 만들어진 컨테이너들이 하나둘 산산조각 나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컨테이너의 파편 사이로 보이는 것은.
“크으으으…….”
“키이이…….”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괴수들의 육체가,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광경.
‘일어나라, 망자들이여.’
되살아난 망자들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