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에피로나의 난민과 괴수들이 게이트를 넘어 지구에 나타난 지도 백여 년.
인류는 괴수로부터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일랜드, 마다가스카르, 그린란드…….
육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섬들은 늘어나는 던전들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게이트 크러시와 함께 괴수의 천국으로 변해 버렸다.
강화도 역시, 그런 지옥 중 하나였다.
“강화도에서 한몫 잡겠다며 들어가는 머저리들이 일 년에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못해도 백 명이다. 그리고.”
말을 마친 강진은 진혁을 향해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
“다섯, 그중 다섯 명 정도만 살아서 육지로 돌아오지.”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존율 오 퍼센트.
그것이, 강화도가 죽음의 섬 중 하나로 불리는 이유였으니까.
“처음엔 괜찮겠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괴수의 파도 앞에선 오러도, 마법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
직접 경험해 보기라도 한 듯, 무언가를 떠올리던 강진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결국 괴수의 파도에 쓸려 나가거나, 운 좋게 탈출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야.”
강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진혁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이만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하겠다. 내 적당한 섬을 하나 골라 보마.”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진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미련한 놈, 그리도 죽고 싶더냐?”
“죽을 생각이라면, 십 년 전에 이미 죽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진혁의 눈이 아비와 마주쳤다.
아들의 눈에서 타오르는 의지를 읽어 낸 강진은, 조금 뒤 한숨을 내쉬었다.
“……토벌 3팀의 담당 구역은 어떻게 할 셈이냐.”
“이미 산하 길드에 구역 분배를 끝냈습니다. 저와 팀이 없이도 충분히 돌아갈 겁니다.”
“내 지원은 기대할 수 없을 거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담담한 어조로 내뱉은 아들의 말에, 강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화도는 이가와의 접경 지역이니, 이건 이가와의 문제기도 하다. 이 부분은 내가 해결해 보마.”
“감사합니다.”
“네 녀석이 서가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장남이다.”
개죽음당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강진은 다시 한번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에, 진혁은 그저 입꼬리를 슬쩍 올릴 뿐이었다.
* * *
세한보안의 토벌본부장실.
“오랜만이야, 상혁. 못 보던 사이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선글라스를 낀 남자, 무혁은 동생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간만이에요, 무혁 형님.”
하지만 인사를 받는 상혁의 얼굴은 그의 말대로 썩 좋지 않았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뺨은 살짝 들어간 것이, 삼 품의 엽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몰골.
“……진짜 무슨 일이라도 났나 보네? 살이 쪽 빠진 걸 보니.”
“안 그랬으면, 내가 형님을 왜 불렀겠습니까. 피차 귀찮기만 하지.”
“그래, 잘 알고 있네. 어디 이유나 좀 들어 보자.”
말을 마친 무혁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책상에 발을 올리곤 다리를 꼬았다.
“하…….”
상혁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헛웃음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부탁하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다른 게 아니라, 진혁 형님 때문에요.”
“진혁 형님? 안 그래도 아까 만나고 왔는데.”
“……진혁 형님을?”
그 말을 들은 상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서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나던데, 대체 어디서 묻혀 온 건진 모르겠지만.”
“지독한 냄새라니, 혹시…….”
그 말에, 무혁의 능력을 알고 있는 상혁의 눈이 커졌다.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기.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지독한 냄새는 절대로 못 숨기지.”
“……용케 참았네요.”
“뭔 소리야, 참은 적 없는데? 바로 한바탕했지.”
“예?”
“성녀님만 아니었다면, 바로 두 동강 내 버렸을 텐데. 우리 형님은 운도 좋지.”
말을 마친 무혁이 으스스한 미소를 짓자, 그가 내뿜은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혁 형님이, 언제 이런 힘을…….’
삼 품에 이른 상혁마저도 무의식중에 몸을 떨게 만들 만큼 진한 살기.
그 와중에도 상혁은 그가 내뱉은 말을 놓치지 않았다.
“성녀님이, 말이에요? 진혁 형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름 없는 신이 형님을 주시하고 있다더라. 아무리 어리고 경험이 없다고 해도 무명교의 성녀인데,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잖아?”
말을 마친 무혁은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허나, 그 말을 들은 상혁의 눈엔 서서히 생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형님.”
“왜.”
“무명교의 사람이, 한국에 성녀님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뭔 소릴 하는 거야?”
무혁은 이상한 눈으로 동생을 쳐다봤지만, 상혁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성녀님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신실한 무명교의 수호자 중 한 분이 서울에 있지 않습니까.”
“왜, 성전기사라도 찾아가려고?”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무혁은 피식 웃었지만.
“네.”
상혁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 * *
토벌 3팀이 머물고 있는 세한보안 인천지사.
쾅! 콰광!
5층짜리 건물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서, 한 소녀와 식귀가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또, 또 시작이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 저 거대한 식귀와 검을 맞대다니.”
“나는 식귀가 검술을 쓰는 게 더 신기하다, 야.”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이 진귀한 대련은, 인근 주민들에겐 이미 하나의 구경거리로 자리 잡은 상태.
“오늘은 누가 이길 것 같아? 난 식귀에 오천 원.”
“에이, 그래도 저 꼬마가 한 번쯤은 이기지 않겠어?”
“뭔 소리야? 여태 한 번도 못 이겼는데. 이번에도 얻어터지겠지.”
“이겨라, 이겨라!”
마치 스포츠 경기를 구경하듯, 잔디밭은 주민들의 응원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대련의 당사자인 렌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쾅! 콰앙!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폭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역시 식귀…… 근력으로는 이길 수 없어.’
힘만큼은 병급에 버금가는 괴수다.
거기에 흑마력을 근육에 흘려 넣어 근력을 더욱 강화시켰으니, 식귀의 검을 맞받아치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
받아치지 않고 흘려 내기만 했을 뿐인데도, 강한 충격을 연달아 받아 낸 그녀의 팔은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허나.
“이름 없는 신이여.”
이번엔, 조금 달랐다.
“당신의 검에게, 빛을 좇을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파아앗!
영창을 끝낸 렌의 전신이, 신성력으로 환하게 빛났다.
이윽고.
파팟!
하얀빛에 감싸인 그녀의 몸이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녀가 쥔 거대한 대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삼 품의 격에 들어선 엽사들이 발현할 수 있는 오러.
그중에서도, 성전기사들이 사용하는 홀리오러였다.
쾅! 쾅!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과 속도.
그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내민 식귀의 거대한 검 곳곳이 움푹 패었다.
“크으으……!”
뒤늦게 식귀가 오러를 끌어 올렸지만, 그녀는 이미 식귀의 품 안으로 파고든 상태.
‘이번에야말로……!’
한 방 먹여 주리라.
렌은 오러로 가득 찬 거검을 식귀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허나.
까앙!
‘뭐, 뭐야.’
그녀의 검은 심장을 뚫지 못했다.
참마검을 막아선 것은, 검게 물들어 있는 식귀의 거대한 손아귀.
‘맨손으로 오러를 잡아낸다고?’
예상치 못한 일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순간.
쾅!
대련은 끝을 맺었다.
“뭐야, 또 졌잖아.”
“내가 말했지? 빨리 돈이나 내놔,”
바닥에 나동그라진 기사를 보며, 군중들은 아쉬움에 탄식했다.
“렌,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성녀님.”
뒤이어 달려온 클레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크으으.”
비록 볼썽사납게 지긴 했지만, 식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렌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짝! 짝! 짝!
“축하해요, 그 나이에 벌써 오러를 내뿜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옆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주연이 박수를 치며 렌에게 다가갔다.
“이거, 내 나이쯤 되면 나보다 더 강해지겠는데요?”
빈말이 아니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오러를 내뿜을 수 있는 천재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 일 품, 초인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리라.
“과찬이십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렌의 얼굴은 칭찬과 기쁨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다만.”
주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무 조급해요. 대련이 실력 상승에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하는 건 독이죠.”
아무리 신성력으로 육체를 치료할 수 있다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수련하는 건 주연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계를 넘어서까지 무리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
“……알고는 있지만, 제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 말에, 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성녀님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니까요.”
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식귀에게 패배한 이후 더욱 확고해졌다.
하루빨리 견습이 아닌 정식 성전기사로 인정받는 것.
그리하여, 성녀의 곁에 있을 자격을 온전히 획득하는 것.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진,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오늘은 좀 쉬자고요. 벽을 깬 날이잖아요?”
그 말에 주연은 빙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렌의 뒤쪽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성녀를 가리켰다.
“그리고 걱정하는 성녀님 마음도 좀 생각해 주고요.”
“마, 맞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들어가서 치킨이나 먹자고요!”
“……네, 알겠습니다.”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녀의 말에, 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키이이이!”
하늘 위에서, 익숙한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천둥비룡이다!”
입에서 뇌전을 쏘아 내는 병급의 괴수.
평범한 인간은 절대로 당해 낼 수 없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
허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 누구도 도망치거나 두려움에 주저앉지 않았다.
“쩐다, 진짜.”
“나도 한 번만 타 봤으면…….”
그저,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둥비룡의 웅장한 위용을 보며 감탄할 뿐.
남들이 보기엔 미친 것 같겠지만, 이들에겐 이미 익숙한 풍경 중 하나였다.
“오늘도 대련 중이었군.”
천둥비룡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서가의 장남이었으니까.
타앗!
진혁은 바닥에 착지한 천둥비룡의 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던 팀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돌아오셨군요, 팀장님.”
“그래.”
주연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진혁은, 모여 있던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할 일이 생겼다.”
“다음, 할 일이요? 갑자기?”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화도로 갈 거다.”
“강화도? 그건 또 어디예요?”
처음 듣는 지명에 성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강화도, 말입니까?”
그 말을 들은 주연의 눈은, 놀라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