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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45화 (45/174)
  • 45화

    “흐음.”

    경복궁의 중심에 위치한 근정전.

    한때 황실의 궁궐이었던 전각의 용상 위에, 중년의 사내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정.

    황실의 후예이자 오 대 엽사 가문 중 하나인 이가를 이끄는 일품의 엽사.

    권태로 찌든 그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의 딸, 설화에게로 향했다.

    “그래, 어떠하더냐.”

    주어가 빠져 있는, 알아듣기 힘든 물음.

    하지만 설화는 가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서진혁.’

    윤가와 서가 간의 대결을 공증한 이가의 참관인으로서, 그녀가 보고 들은 서진혁의 모든 것.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강했사옵니다.”

    “강하다라, 네 입에서 강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별일이구나. 어떤 면에서?”

    순간, 가주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설화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답했다.

    “상대와 자신의 유불리를 파악하고 행동할 줄 알았으며, 강자 앞에서도 자신을 숙이지 않았사옵니다.”

    “십 년 만에 깨어났다더니, 제법 성장한 모양이로구나. 역시 범의 자식은 범이로군.”

    딸의 대답을 들은 이정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릴 때에는 철없이 굴던 망나니라도,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또한.”

    그러나.

    “상급정령 둘을 소멸시켰사옵니다.”

    “……뭐라?”

    이어지는 설화의 말에, 이정은 끄덕이던 고개를 멈춰 세웠다.

    “방금, 상급 정령이라 하였느냐?”

    상급 정령을 다루는 것은 이품의 엽사다.

    을급 괴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품의 엽사가 상대할 수준도 아닌 존재.

    그런데, 상급 정령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소멸시키다니.

    “그렇사옵니다.”

    놀란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진혁이 부리는 괴수들, 느닷없이 사라져 버린 정령의 공격, 해골들의 검에 깃들어 있던 정령력.

    설화가 대결을 참관하면서 보고 들은 모든 내용이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허어,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구나.”

    설명이 끝나자 이정은 탄식했다.

    “서가의 자식이 어찌 괴수를 부릴 수 있으며,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단 말이더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십 년 전, 식물인간이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능력자에 가까웠던 자다.

    그런데 어떻게,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급 정령을 소멸시킬 힘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괴이하도다, 괴이하도다…….”

    이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설화를 향해 말을 건넨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서진혁, 그 아이 말이다.”

    딸의 물음에, 이정은 턱에 난 푸른색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녀의 생각은 이미 전부 말씀을…….”

    “그게 아니다.”

    설화가 자꾸 자신을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이정은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아직 마음이 있느냔 말이다.”

    “예?”

    설화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금테 안경 뒤로 보이는 그녀의 검푸른 동공이 놀라 흔들렸다.

    당황한 딸을 바라보며, 이정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사건 이후로 서가와의 관계가 끊어진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지. 한강을 마주 보고 선 두 가문이 말이야.”

    오 대 가문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쟁의 관계.

    하지만, 그중에서도 위세가 강한 편이었던 서가와 이가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한국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라이벌이자, 다른 세 가문을 견제할 수 있는 암묵적 동맹.

    비록 십 년 동안 끊어져 있었다곤 하나.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원인 중 하나인 서진혁이 돌아온 이상,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하오나…….”

    “당장 그 아이와 혼례를 치르란 건 아니다. 네 마음이 어떠한지 천천히 고민해 보라는 뜻이니라.”

    그럼, 이만 가 보거라.

    이야기를 마친 이정은 용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린 설화가 채 인사를 올리기도 전 용상 뒤로 사라졌다.

    “……혼례라고?”

    근정전에 홀로 남은 설화는 무릎 꿇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    *    *

    칠성원.

    강남의 인공호수 위에 세워진 서가의 영지.

    섬은 수많은 빌딩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단 한 곳, 단층의 기와집이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서가의 장남, 서진혁의 거처.

    “흠.”

    기와집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서진혁은, 손에 쥔 플라스틱 카드를 들어 올렸다.

    [서진혁]

    [삼품]

    [대한엽사회 인]

    “드디어, 얻었군.”

    지난 대결에서 상급 정령을 상대한 공적이 인정받은 결과.

    새롭게 얻어 낸 삼품의 엽사 자격증을 바라보며, 진혁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제야 겨우 출발선에 섰어.”

    진혁에게 삼품의 자격이란 그런 의미였다.

    십 년 동안 벌어져 있던 동생들과의 격차를 메꾸는 데 성공했다는 증명.

    그리고.

    ‘복수에 한 걸음 더 다가섰군.’

    갑급의 괴수, 외눈박이.

    놈이 살고 있을 에피로나에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이상, 남은 것은 외눈박이를 사냥할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주인, 그게 뭔데 그렇게 좋아해요?

    ―새로운 경지에라도 오르신 것 같구려.

    마당에서 진혁을 구경하던 멜리나와 자이츠가 신기해하며 물었다.

    셋 중 자격증의 의미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엽사 지망생이었던 성준뿐.

    ―말하자면, 진혁 님께선 에피로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으신 겁니다.

    ―와, 정말? 고향으로 갈 수 있단 말야?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복수를 할 수 있겠군.

    식귀의 설명을 들은 천둥비룡과 스켈레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향을 짓밟고, 자신들을 죽여 망령으로 만들어 버린 괴수들.

    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으니까.

    “그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망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진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곤 자격증을 품에 집어넣은 다음 몸을 일으켜 망자들에게로 다가갔다.

    “그 전에, 너희에게 줄 것이 있지만.”

    ―줄 거라고요? 뭔데요?

    멜리나가 호기심을 보이자, 진혁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보석 두 개.

    ―정령석이군요.

    “그래.”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성준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가의 장남, 윤미르와의 거래를 통해 얻어낸 물건.

    ‘더 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내 권한으로 줄 수 있는 건 이게 다니까.’

    똥 씹은 표정을 짓던 미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진혁은 마당에서 휴식을 취하던 천둥비룡과 스켈레톤을 향해 다가갔다.

    “성준과 같이, 이것이 너희에게도 새로운 힘을 부여해 줄 것이다.”

    스으으!

    말을 마친 진혁은 모아 두었던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검은 기운이 무지갯빛 보석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망령이여.”

    그의 입이 망령군주 파슬란으로부터 얻어낸 주문을 영창했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너희의 영을 거두어 봉인한다.”

    스으으!

    언령이 발동되기 무섭게, 거대한 스켈레톤과 천둥비룡에 깃들어 있던 두 영혼이 밖으로 끄집어 내진다.

    흑마력의 인도에 따라 검게 물든 정령석까지 도달한 망령이, 이내 보석 안으로 스며들 듯 파고든다.

    봉인된 망령을 보호하고, 망령이 가진 힘과 잠재력을 증폭시키는 돌.

    영혼석이었다.

    ―뭐예요, 여긴? 되게 포근한데.

    ―아주 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힘을 기르기 좋을 것 같소.

    두 망령이 당황하던 것도 잠시.

    멜리나와 자이츠는 영혼석에 가득 채워진 흑마력을 기분 좋게 음미했다.

    진혁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는, 왼쪽의 식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식귀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영혼석을.

    ‘정령석이 제법 많이 모였군.’

    지난번, 두 상급정령을 소멸시키면서 얻은 정령력이 영혼석의 흑마력과 뒤섞여 독특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성준이라면, 충분히 적응할 수 있겠지.’

    그의 영혼이 가진 잠재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그리고, 이젠 다른 두 망령들에게 힘을 부여할 시간이었다.

    툭 툭

    진혁은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붉고 푸른색의 탁구공만 한 돌멩이가 마당을 뒹굴었다.

    불의 상급정령 샐리온과 물의 상급정령 엘라임.

    두 정령이 정령계 밖에서도 영체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존재.

    정령의 핵이었다.

    ‘흠.’

    진혁은 흙바닥 위에 놓인 두 개의 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곧.

    스으으!

    검은 영혼석을 쥔 그의 오른손이, 흑마력으로 검게 물들었다.

    *    *    *

    인공호수 사이에 떠 있는 작은 섬, 칠성원과 세한빌딩을 잇는 다리는 언제나 세한보안 소속의 엽사들이 지키고 있다.

    사품 이상의 엽사들로만 구성된 경비 팀의 보안은 철저하기로 유명했지만.

    “빨리, 빨리!”

    “서둘러!”

    그 명성이 무색하게도, 다리 앞 검문소를 지키던 경비 팀에게서 절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부우우웅!

    다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검은색 세단.

    억대를 호가하는 고급 승용차의 앞 범퍼에 달린 것은, 숫자 대신 북두칠성의 문양이 새겨진 번호판이었다.

    서가의 가주와 그 직계 후손만이 달 수 있는 번호판.

    척!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경례를 붙인 엽사들 사이를 검은 승용차가 빠르게 지나쳤다.

    그 뒷자리에 탄 것은, 선글라스를 쓴 장발의 남자.

    “삼 년 만인데, 여긴 변한 게 없네.”

    선글라스를 살짝 든 남자가 창문 밖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검은 안경알 아래로 보이는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상혁이 녀석, 이제 와서 약속 운운할 줄이야.”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는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초렵식을 치르기도 전에 했던, 아주 오래전의 약속.

    ‘그게 마법 계약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베어 버렸을 텐데.’

    무혁은 비릿하게 웃으며 삼 년 만에 돌아온 본가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뭐야.’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 냄새는…….’

    칠성원 어딘가에서, 강렬하게 피어나는 기분 나쁜 향기.

    날 때부터 특수한 감각을 지니고 태어난 그에게, 이 향기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마기……?’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선글라스를 벗은 눈에 보이는 검은 연기들.

    분명, 마기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무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기, 저기로.”

    “네, 무혁 님.”

    다급한 무혁의 말에, 운전기사는 방향을 틀어 검은 연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무혁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 칠성원에서 마기가 느껴지는 거지?’

    마인이 다루는 마기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분명 비슷한 점이 있는 기운이다.

    ‘아버지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셨을 리 없는데…….’

    알고 있었다면 자신을 부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으니,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인해야 돼.’

    그리고, 맞다면 베어 버린다.

    그것이, 세한보안의 특수부를 이끄는 그의 소임이었으니까.

    끼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탄 세단은 한 기와집 앞에 멈춰 섰다.

    ‘여기, 진혁 형님의 집 아닌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폐가나 다름없던 이전과는 달리 제법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

    하지만, 그 안에서 풍겨 오는 지독한 마기의 향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설마, 진혁 형님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손은 어느새 등에 멘 장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내, 그가 대문을 들어섰을 때.

    ‘진혁…… 형님.’

    그는 십 년 전 쓰러졌던 형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째서…….’

    전신에서 검고 지독한 향기를 풀풀 풍기는 형과.

    ‘최악이군.’

    스릉!

    단숨에 등의 장검을 뽑아 든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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