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최현.
오직 두 주먹만으로 괴수를 쳐 죽여 온 지 사십여 년 만에 일품의 경지에 오른 원로 엽사.
가문도 길드도 없이 홀로 움직이는 자유엽사였지만, 한국을 지배하는 오대가문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일품의 엽사란.
초상 능력의 절정에 올라 인간을 초월한 자란 그런 존재니까.
하늘을 날고, 땅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현대의 초인.
하지만.
그 성품 때문에 현대의 신선이라 불리는 최현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찾기 힘들었다.
‘조금 더, 빨리.’
고작 불의 중급 정령조차도 몽골의 초원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불과 물의 상급 정령이 동시에 폭주한다면 어떤 재앙이 한반도를 덮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지.’
만무결(萬武結).
섬광보(閃光步).
파바밧!
금빛 마나를 전신에 두른 그의 몸이 빛과 함께 번쩍이며 사라졌다가, 이내 수십 미터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마치 고위 마법사의 점멸마법을 보는 것 같았지만, 이는 마법이 아닌 무(武)의 극의.
‘저기 있군.’
몇 번이고 사라졌다 나타나며 전진한 그의 눈에, 목표의 모습이 들어왔다.
푸른 불꽃으로 일렁이는 도마뱀, 샐리온과 얼음왕관을 머리에 쓴 푸른 피부의 여인, 엘라임.
하지만.
“음……?”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상급 정령들만이 아니었다.
“서진혁?”
서가의 장남이자, 이번 대결의 당사자 중 하나.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분명, 그가 탑에서 뛰쳐나올 때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았던 자다.
대체, 어느 틈에 섬의 중심까지 도달한 건지는 그도 잘 모르겠지만.
‘위험해.’
폭주한 상급 정령을 막기에 사품의 엽사는 격이 부족하다.
병급의 괴수인 천둥비룡이 함께한다 해도 마찬가지.
오히려, 상급 정령이 내뿜는 기운에 목숨만 잃을 게 뻔하다.
“서진혁 씨, 이곳은 위험하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최현은 진혁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서가의 장남이 정령의 폭주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그 역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테니까.
허나.
진혁이 정령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린 순간.
스으으!
최현의 상식은 뒤집혔다.
우웅!
진혁의 오른손에 들린 보석이 검게 빛난다.
동시에.
정령들의 맞은편에 도열해 있던 해골들이 무기를 쥐고는 두 정령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든다.
물론, 정령들이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해골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화르륵!
불도마뱀이 입에서 청색 불줄기를 뿜어냈다.
동시에, 얼음왕관을 쓴 여자의 손에서 백색의 한기가 연기처럼 쏟아져 나갔다.
두 상급 정령이 뿜어낸 자연의 기운은, 해골 따위가 버티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채 해골에 닿기도 전.
스으으!
쏘아 낸 자연의 기운이, 허공에서 점차 흩어져 나갔다.
―……!
―……!
해골들을 태우고 얼려 버렸어야 할 공격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허공에 흩어지자, 두 상급 정령은 당황했다.
이건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지만.
우우웅!
돌격하는 해골들의 몸이 점점 붉고 푸르게 물들어 간다.
그들의 무기와 백골을 타고 흐르는 것은, 뜨거운 불꽃과 차가운 한기.
정령들이 쏘아 낸 자연의 기운이었다.
딱딱! 딱딱딱!
각기 불과 얼음으로 전신을 감싼 해골들이 둘로 나뉘어 움직였다.
쿵! 쿵!
그중 가장 앞에 선 것은, 수 미터 키의 거대한 해골.
푸욱!
해골의 손에 들린 기다란 화염검이, 그대로 물의 상급 정령 엘라임의 몸에 틀어박혔다.
―……!
자신과는 상극인 불의 기운이 주는 고통에 물의 정령은 몸부림치며 반격하려 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푸욱! 푸욱!
뒤이어 달려든 해골들이 각자의 손에 들린 시뻘건 무기를 그녀의 몸에 찔러 넣는다.
엘라임이 가지고 있던 물의 기운이 불의 기운과 부딪쳐 사그라든다.
힘을 잃은 정령의 영체가 점점 크기를 줄여 나간다.
마침내.
―……!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불안정했던 물의 정령의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정령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한때 정령을 이루었던 핵의 흔적뿐.
한기를 담은 해골들과 맞선 불의 정령, 샐리온의 최후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대체,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 앞에서, 최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윤가람과 서진혁의 대결은 서진혁의 승리로 끝났다.
이미 죽어 버린 윤가람에겐 대결을 지속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윤가람은 대결 중 무리하게 상급 정령을 소환했고, 그 결과로 재앙을 불러올 뻔하지 않았던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 윤가에서도 제대로 따지고 들지 못하리라.
“아니, 오히려 우리 쪽에서 보상을 받아 내야겠지.”
“보상 말입니까?”
팀장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주연이 되물었다.
“윤가람이 대결 도중 마인이 되어 가는 징후도 보인 데다가, 정령이 폭주하면서 서가의 혈족을 죽일 뻔했으니까.”
말을 잠시 끊고,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윤가와 마인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윤가 전체가 마인과 엮여 있다면, 다른 가문들의 첩보망에 걸리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단지, 윤가에게 보상을 요구하기 위한 핑계일 뿐.
“……그런 방향으로 자료를 준비해 보겠습니다.”
말에 숨은 의미를 눈치챈 주연이 고개를 숙이자, 진혁은 말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슬슬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이 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끝났으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새롭게 가져온 윤가의 이권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이만하면, 시험 성적으론 나쁘지 않군.’
인천의 거의 절반이 서가의 손에 들어왔으니, 그 영역 내에서 나타나는 던전의 소유권만큼 서가의 부와 권력도 더욱 커지리라.
이 상황을 이끌어 낸 그의 입지도.
진혁이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던 그때.
부아아앙!
멀리서 들려온 굉음에 진혁과 주연은 시선을 돌렸다.
‘택시?’
섬과 육지를 연결한 다리를 통해, 은색 택시 한 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팀장님, 위험합니다!”
삼품의 엽사는 달려드는 자동차도 막아설 수 있다.
택시에서 심상찮은 기세를 느낀 주연은 진혁의 앞을 가로막고는 팔을 X자로 교차했다.
하지만.
끼이이익!
빠른 속도로 달려들던 택시는 그녀에게 부딪치기 전 급정거하며 핸들을 틀었다.
옆구리로 미끄러진 택시는 바닥에 긴 타이어 자국을 남긴 채 주연의 앞에서 멈춰 섰다.
곧.
쿵!
“크, 큰일이에요, 큰일!”
택시의 뒷문을 열고 나온 것은 금발의 소녀.
“……성녀님?”
무명교의 성녀이자, 세한보안 토벌 3팀의 객원인 클레어.
“병원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의외의 사람을 마주친 주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빨리, 빨리 막아야 해요!”
성녀는 흥분한 듯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막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서 외쳐 댔다.
“막다니, 뭘 말씀하시는 건지 설명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인입니다.”
주연의 궁금증을 풀어 준 것은 뒤따라 내린 성녀의 호위, 렌이었다.
“성녀님께서 강력한 마기를 느끼셨습니다.”
“마기 말입니까?”
“서울에서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했으니, 못해도 상급에 이르는 수준의 마인이 숨어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렌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름 없는 신을 섬기는 성기사에게, 마인은 하늘 아래 함께할 수 없는 대적(大敵).
놈이 도망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해야 할 의무였다.
허나.
“……그렇군요.”
그 말을 들은 주연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마인입니다, 마인!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놈은 더 거대한 악행을 벌일 겁니다!”
“그, 그래요! 아직 안 늦었으니까 빨리 가야 한다고요!”
목소리를 높인 성녀와 기사의 표정은 다급했다.
그럼에도, 진혁과 주연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뭐, 뭐지?’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거지?’
두 소녀가 상대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마인이라면, 윤가람을 말하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뭐, 뭐야. 벌써 알고…… 있었어요?”
진혁과 주연이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자, 당황한 클레어는 눈치를 슬슬 살피며 물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라면 이미 소멸했다.”
“아, 그래요? 끝, 끝, 끝이란 거죠…… 다, 다행이네요! 아하하…….”
그의 말에 성녀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진혁의 시선이 말없이 뒤편의 택시로 향했다.
“그러면 서울에서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온 건가?”
“아, 네. 워낙 급해서…….”
“이봐요, 돈도 안 주고 내리면 어떻게 해요?”
택시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따따불을 불렀으면, 내리기 전에 돈부터 줘야지! 젊은 사람들이 왜 이래?”
“……방금, 따따불이라고 하셨습니까?”
주연의 물음에 반쯤 머리가 벗겨진 택시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팔만 원에 따따불이니까 이십사만 원! 빨리 주쇼!”
그 말에, 주연의 시선이 말없이 두 소녀에게로 향했다.
“성녀님?”
“아하하하…… 미안해요…… 돈이 없는데 어떡하지…….”
고개를 푹 숙이는 클레어의 모습에, 주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혁은 말없이품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주연에게 넘기고는, 울상이 된 성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택시비는 교단 기부금에서 제하도록 하지.”
“히이이잉…….”
진혁의 차가운 말에, 성녀는 울상을 지었다.
* * *
아라길드.
올해로 이십오 년째를 맞이한, 인천 제일의 중립 엽사길드.
그곳의 길드장인 성유창의 표정은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약속을 지킨 건가.”
그가 바라보는 모니터 안에 비친 것은, 한 신문사의 뉴스 기사였다.
[서가와 윤가의 분쟁, 이대로 서가의 승리?]
제목 아래로 대문짝만하게 붙은 사진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담담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오대엽사 가문 중 하나인 서가의 장남, 서진혁이었다.
“혼자서 인천을 정리하다니, 진짜로 해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야.”
그저, 명문가 자제의 철없는 객기라고 생각했다.
진혁이 내걸었던 조건은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이미 나와 있는 상황.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돌려보낼 걸 그랬나?”
그가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던 그때.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길드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유창은 코웃음 쳤다.
서진혁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막상 상황이 닥치니 불만인가 보지?”
“내가 그 정도로 속 좁은 놈은 아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약속대로 내 요구 사항을 말하지.”
과연,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자리에 앉은 유창의 시선이, 진혁의 다물어진 입으로 향했다.
곧, 진혁의 입이 열렸다.
“언젠가, 힘을 한번 빌리고 싶은데.”
“언젠가라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창은 조금 안도했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원정을 떠날 것이다.”
“원정?”
그 말에, 성유창은 고개를 갸웃했다.
엽사들 사이에서 쓰이는 원정의 뜻은 단 하나였으니까.
‘게이트 너머의 세계, 에피로나.’
온갖 종류의 괴수와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는 죽음의 세계.
고작 사품의 엽사가 입에 담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진혁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때, 당신과 당신 길드의 도움을 받고 싶다.”
“그래, 언젠가 같이 원정을 간다 치고, 무슨 도움을?”
진혁의 철부지 같은 제안에 유창은 코웃음 쳤다.
그러나.
“갑 급 괴수, 외눈박이의 토벌.”
진혁의 다음 말을 들은 순간, 그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