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지리산.
호남과 영남을 가르는 거대한 영맥(靈脈).
정령을 다루는 윤가의 본가는 그 중심인 천왕봉 기슭에 위치해 있다.
얕은 능선을 따라 기와지붕으로 덮인 전각들이 줄지어 늘어선 대저택의 담벼락 위.
“뭐야, 진짜 다 먹은 거야?”
윤가의 다섯 정령대 중 하나.
음양대의 상징인 흑백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올려다본 곳은 하늘이었지만,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먹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말야…….”
저 멀리, 백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기파를 음미하며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힘을 한번 맛본 놈은 절대로 절제할 수 없다니깐.”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윤가에 잠입하고, 윤가의 무능력자를 꼬여 내 계획의 제물로 사용하는 것.
“뭐…… 저렇게 멍청한 놈이니까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휙!
말을 마친 남자는 담벼락을 넘어 밖으로 나섰다.
곧, 산기슭에 우거진 수풀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남자는 입고 있던 음양대의 복장을 집어 던졌다.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남자의 육체 곳곳이 검은색의 반점으로 덮여 있었다.
마기에 잠식된 자, 마인의 징표.
“엽사 놈들, 지금까진 우릴 사냥감이라고 생각했겠지.”
마기에 잠식당한 마인은 인류의 적으로 간주된다.
사실상 괴수와 다를 바 없는 취급.
그렇기에, 남자 역시 지금까지 엽사들에게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왔다.
“하지만…….”
이젠.
너희가 사냥감이 될 차례야.
스으으!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며.
남자는 차갑게 웃었다.
* * *
“……저건.”
“완전히 달라.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야.”
“아니, 이 정도의 힘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단 말야?”
갑작스러운 윤가람의 변화를 지켜본 탑의 참관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을 탑에까지 기파가 전해질 정도라면, 거의 이 품의 엽사와도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의 마나를 지녔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놀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웅!
윤가람의 등 뒤 공간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반으로 갈라졌다.
자동차 한두 대는 거뜬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 속에 일렁이는 것은, 일곱 색으로 빛나는 무지개.
정령들의 세상, 정령계로 통하는 차원문이었다.
이윽고.
“흠.”
차원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온 거대한 존재를 본 최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청염(靑炎)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마뱀과 얼음 왕관을 머리에 쓴 푸른 피부의 여인.
“상급 정령이라고?”
“윤가람 씨, 분명 삼 품의 엽사라고 들었는데…….”
샐리온과 엘라임.
두 상급 정령이 차원문을 넘어 나타나자, 유재준과 주소영의 눈이 커졌다.
상급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정령사는 언제든 이 품에 오를 자격을 지닌 자.
여태껏 삼 품이라 알려져 있었던 그가 갑자기 상급 정령을 둘이나 소환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와…… 이건 그 자식도 좀 힘들겠는데?”
놀란 것은 설화 역시 마찬가지.
홀로 에피로나를 나다닐 수 있는 것이 이 품의 엽사다.
서진혁 역시 홀로 길드 하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강자라는 건 그녀도 인정하는 사실이었지만, 이 품의 엽사는 격을 달리하는 존재였으니까.
“상급 정령 둘은 나도 못 이길 거 같은데. 저 자식,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강해진 거지?”
“진혁 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설화의 옆에서, 주연은 굳은 표정으로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음.”
그걸 지켜보는 최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불안정해.’
점차 검게 변색되어 가는것은 윤가람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정해진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정령들의 모습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변색되어 있었다.
거기에, 정령을 토해 낸 차원문이 닫히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기까지.
수십 년간 괴수를 토벌하며 수많은 경험을 쌓아 온 일 품의 엽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곧장 알 수 있었다.
“폭주다, 정령이 폭주하고 있어.”
“……폭주라고?”
최현의 혼잣말을 곁에서 들은 이설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령이 폭주한다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엽사교육을 받으면서 배우는 상식 중에는, 토벌 도중에 일어날 수 있는 재해들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정령사가 불러낸 정령이 폭주하는 일 역시 그중 하나.
하지만.
‘……저 상급 정령들이 폭주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 섬.
아니, 한반도 전체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물과 불의 상급 정령이 품고 있는 정령의 기운이 날씨를 바꾸고 기후를 뒤틀어 버릴 테니까.
막지 못한다면, 한반도는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모하리라.
“엽사회장의 권한으로 대결을 중지하겠소, 지금 당장!”
타앗!
최현은 심각한 얼굴로 외치고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늦기 전에, 막아야 한다.’
쐐애액!
소리 없이 마법결계를 뚫은 그의 몸이, 섬의 중앙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 *
‘젠장,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윤가람.
윤가의 차남이자 물과 불의 정령을 다루는 삼 품의 엽사.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의 정령력으로도, 상급 정령을 유지할 수 없다고?’
환약을 전부 입에 털어 넣어 정령력을 증폭한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얼마 못 가 사라질 힘이라지만,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온몸에 넘쳐 나는 기운이 주는 고양감은 미치도록 짜릿했으니까.
강제로 정령계와 통하는 차원문을 열고 상급 정령을 불러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몸을 충만하게 채운 정령력이 빠르게 고갈되기 전까지는.
‘빌어먹을, 이 품의 벽이 이렇게 높단 말야?’
약으로 증폭한 정령력은 이미 전부 소모해 버린 지 오래.
그것으로도 모자랐던 것인지, 두 상급 정령은 그의 생명력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령이 빨아들이는 게 아냐.’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가는 그의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신호의 중심은, 가람이 지금까지 집어삼킨 환약들.
스으으으!
지금까지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었던 사악한 기운이, 어느새 그의 하복부에 자리한 마나홀을 가득 채운 채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내, 기운 속으로 빨려 든 생명력은 정령력으로 바뀌어 두 정령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써 왔던 정령력은…….’
자신에게 힘을 준 약이 사실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람의 표정은 악귀처럼 구겨졌다.
‘이 사기꾼 자식! 감히, 감히 나한테 이딴 걸 먹여?’
환약의 비밀을 눈치챈 가람은 분노로 몸을 떨었지만, 밖으로 터뜨릴 수는 없었다.
생명력이 사라져 죽어 가는 그의 육체엔, 목소리를 쥐어 짜낼 힘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이런, 빌어먹을…….’
아직, 멈출 수 없는데.
멈추면 안 되는데.
멈추면…….
미라처럼 비쩍 말라 버린 가람의 눈이,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쓰러진 그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두 정령의 모습이었다.
* * *
‘정령이 폭주하고 있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윤가람이 바닥에 쓰러져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진혁은 상황을 파악했다.
정령의 폭주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스칸의 파슬란 또한, 폭주한 정령을 상대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폭주한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지.’
그 대신, 통제되지 않는 정령력을 이용해 주변을 자신이 가진 원소로 침식한다.
불의 정령이 폭주한다면 무엇이든 재로 만들어 버리는 불지옥을 만들어 낸다.
물의 정령이라면 만물을 얼려 버리는 얼음지옥을 지상에 강림시킨다.
폭주한 정령의 수준이 상급이니, 이 섬뿐만 아니라 인천의 해안 지역까지는 충분히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
‘마기의 힘에 의해 강제로 폭주한 것이긴 하지만, 별반 다르진 않겠지.’
조금 더 불안정하냐, 덜 불안정하냐의 차이일 뿐이다.
‘윤가람이 마인과 손을 잡은 건가.’
그렇다면, 그의 영혼에 얼룩처럼 덕지덕지 묻어 있던 카르마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신경 쓸 건 아니지만.’
이 일을 벌인 배후를 찾긴 해야겠지만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진혁 님, 당장 대피해야 합니다!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기파가……!
진혁의 곁에서 그를 호위하기 위해 남긴 식귀 성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진혁의 표정은 덤덤했다.
‘일 품에 이른 엽사라면 상급 정령의 폭주 정도는 막아 낼 수 있겠지.’
상급 정령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일 품의 엽사가 가진 초월적인 힘이라면, 폭주한 정령이 영향력을 확장하기 전에 놈들을 소멸시키거나 정령계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그건 진혁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건, 일종의 기회였으니까.
‘정령의 힘을 거둘 기회는 흔치 않아.’
정령은 자연에서 비롯한 존재지만, 그 형태와 구조는 오히려 영혼을 닮아 있다.
그 말인즉.
‘파슬란의 사령술이, 먹힌다.’
폭주한 정령을 상대로, 파슬란은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정령의 힘을 역으로 흡수해 냈다.
사령술의 정점에 올랐던 파슬란과 지금의 진혁 사이엔 분명 적지 않은 수준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방법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술식을 보조해 줄 도구만 있다면, 충분하지.’
그리고 진혁은 이미 그 도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성준.”
―네, 진혁 님.
주인의 부름을 받은 식귀가 몸을 돌렸다.
이전과는 달리, 그의 명치 어름에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푸른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성준의 영혼을 저장해 둔 돌, 영혼석.
본디 영체의 힘을 증폭시키는 용도였지만.
‘이거라면.’
진혁은 영혼석의 진정한 쓸모를 알고 있었다.
식귀와 식귀의 명치에 박힌 영혼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널 빌리마.”
―네? 그게 무슨…….
당황한 성준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 그때.
진혁은 영혼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으으!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흑마력의 사슬이 식귀의 가슴 한가운데에 박힌 영혼석을 얽어맸다.
이내, 마치 고치처럼 흑마력의 실로 칭칭 감겨진 영혼석이 식귀의 몸에서 뽑혀 나갔다.
영혼을 잃은 육신은, 더 이상 망자가 아닌 시체일 뿐.
쿠웅!
영혼석이 뽑혀 나간 식귀의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히면서 뿌연 흙먼지를 피웠다.
―지, 진혁 님? 이게 대체…….
졸지에 몸뚱이를 잃어버린 성준은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네게, 새로운 힘을 줄 테니까.
성준의 영혼석을 손에 쥔 진혁의 눈이 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