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모의훈련장이 위치한 실미도의 면적은 약 0.26제곱킬로미터다.
면적의 대부분이 수풀과 구릉,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
그러나 사람 하나가 숨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삼품이라더니, 강하긴 하군.”
구릉과 구릉 사이의 계곡에 몸을 숨긴 진혁은 감탄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흔하디흔한 잡초와 소나무, 흙모래 더미뿐.
허나, 그가 보는 것은 눈앞의 황무지가 아니었다.
망령이 전해 주는, 수백 미터 밖에 위치한 중심부의 장면.
콰아앙!
굉음과 함께, 두 중급 정령이 합작해 만든 고온 고압의 증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터져 나간다.
증기의 파도가 향한 곳은, 붉게 물든 던전 핵을 등진 채 달려오는 해골 무리들.
제각기 병장기를 하나씩 쥔 해골들의 기세는 범상치 않았지만.
빠드드득!
증기의 파도를 견뎌 내기엔 부족했다.
푸스스스!
하얀 파도에 휩쓸린 해골들은 그대로 바스러져 뼛가루로 화했다.
콰아아아!
그러고도 힘이 남아돌았는지, 퍼져 나간 증기는 공중의 천둥비룡을 덮쳤다.
정령의 힘이 더해진 고온의 증기가 비룡의 날개를 덮은 피막에 구멍을 내자.
“끼이이이!”
쿠우웅!
순식간에 날개를 못 쓰게 된 천둥비룡은 그대로 지면에 몸을 처박았다.
―주인, 도움! 이게 대체 몇 번째예요!
진혁의 머릿속에 멜리나의 짜증이 울려 퍼졌다.
망자이니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답답함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진혁의 답은 짧았다.
‘기다려라.’
―아니, 언제까지 기다리란 거예요?
스으으!
진혁은 대답 대신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앞으로 십 분.’
지금 던전 핵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진혁 자신.
십 분만 더 버틴다면, 이 대결은 진혁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조금만 버티면 돼. 놈도 한계야.’
중급 정령 둘을 다룰 수 있다 들었다.
하지만 다룰 수 있는 것과 유지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
윤가람은 지금 자신의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 중이었으니,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내부의 흑마력을 바깥으로 뿜어낸다. 진혁의 손에 모인 검은 힘이 한데 뭉쳐 탁구공만 한 크기로 변한다. 그의 입에서 언령이 흘러나왔다.
“망령이여.”
죽음을 거슬러라.
스으으!
손바닥에 떠 있던 흑마력 구슬이 빠른 속도로 시야를 벗어난다.
‘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진 흑마력 덩어리의 궤적을 살피며, 진혁은 입술을 비틀었다.
* * *
모의훈련장의 외곽에는 섬을 둘러싼 장벽보다 세 배쯤 높은 탑이 서 있다.
모의훈련의 결과를 평가하는 심사관들이 훈련을 지켜보는 관측탑.
하지만.
오늘 모의훈련장을 지켜보는 것은 심사관들이 아니었다.
“시작했군요.”
“어느 쪽이 이기려나.”
윤가와 서가.
두 가문의 대표가 벌이는 대결의 승패를 공증해 줄 사람들.
이가의 설화와 주가의 소영, 유가의 재준과 엽사회장 최현.
그리고 서가에서 보낸 토벌 3팀의 신주연까지.
다섯의 시선이, 탑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가린 거대한 스크린으로 향했다.
수십 개의 사각형으로 나뉜 스크린에 비친 것은, 섬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로부터 보내진 영상들.
“먼저 들어간 쪽은 서가네.”
유재준은 공터를 비추는 카메라에 잡힌 해골과 천둥비룡을 보며 중얼거렸다.
“해골처럼 생긴 괴수가 있단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시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가의 능력은 지배.
피에 섞여 있는 지배의 인자를 활용해 괴수들을 지배하고 부리는 것이 유가의 혈족이다.
그 일원에게, 생전 처음 보는 괴수를 부리는 진혁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봐야, 정급도 되지 못하는 것 같군요.”
하지만.
옆에 서 있던 마법사, 주소영은 영상을 유심히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천둥비룡 말고는 전력으로 가치가 없어요. 저 정도 마나 밀도로는 중급 정령의 공격을 막아 낼 저항력이 턱없이 부족할 테니까.”
해골들의 숫자는 제법 많았지만 느껴지는 마나는 거의 없었으니,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근데, 서진혁 본인은 어디로 간 거지?”
스크린에 떠 있는 영상들을 살피던 설화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유재준, 괴수들을 통제하려면 엽사가 근처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모르지. 서가의 장남이 우리 가문의 피를 이은 건 아닐 거잖아? 불륜도 아니고.”
재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네. 통제는 그렇다 쳐도, 저 괴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면 지켜보고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조용, 윤가람이 움직인다.”
이설화의 말에 재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이 화면을 빠르게 옮겨 다니는 정령사를 좇았다.
물방울로 이루어진 말에 올라탄 윤가람은 순식간에 괴수들이 모여 있는 중앙에 도달했다.
이내.
콰아앙!
“역시, 저런 해골들이 중급 정령의 힘을 버틸 리가 없지요.”
“실망이야. 이거 완전 시간 낭비했잖아?”
“아무래도, 서진혁 씨도 이럴 줄 알고 몸을 숨긴 모양입니다. 말하는 것과는 달리 겁이 많은 편이군요.”
폭발하는 증기에 휩쓸려 산산조각 나는 해골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두 참관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진혁 님…….”
옆에서 대결을 지켜보던 주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봤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신 건 맞지만, 삼품의 엽사에겐 아직 무리인가.’
마나를 응축할 수 있는 삼품과 그렇지 못한 사품을 가르는 벽은 그만큼 높았다.
‘천둥비룡 혼자선, 중급 정령 둘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그녀의 상념을 깨운 것은 이설화였다.
푸른 연기를 뿜어낸 그녀의 시선이 세한의 엽사에게로 향했다.
“너, 서진혁 부하지? 그럼 자기 상사를 믿어야 하는 거 아냐?”
“……믿고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짓는다고? 구라도 적당히 치든가.”
당황한 주연의 표정을 본 설화는 코웃음 쳤다.
“너도 알잖아? 저 자식, 재수는 없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도 아니란 거.”
길드 하나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엽사가, 이렇게 쉽게 당해 줄 리 없다.
분명, 뭔가 한 수를 숨기고 있겠지.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의 저 자식이라면 분명하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설화의 모습을 보며, 주연은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때였다.
스으으으!
박살 난 채 흩뿌려진 뼛조각들이 다시 엉겨 붙더니, 해골의 모습으로 재생한 것은.
“봐 봐, 저 새낀 걱정해 줄 필요가 없다니깐?”
화면 속.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해골들을 보며.
설화는 곰방대를 슬쩍 물었다.
* * *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야?
또다시 일어나는 해골들을 바라보며, 윤가람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집어삼키고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히, 분명히 부쉈잖아.’
그것도, 다섯 번이나.
병급 괴수의 피륙조차도 찢어발길 수 있는 게 중급 정령들의 공격이다.
몸놀림이 제법 빠르다곤 하지만, 그래 봐야 마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해골 따위는 산산조각 나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정상.
‘그런데.’
몇 번이고 가루가 된 해골들이, 어째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을지 몰라도, 다섯 번째로 살아난 해골을 마주했을 땐 그럴 수 없었다.
허나.
‘젠장.’
그에겐 당황할 여유조차 없었다.
콰아앙!
윤가람은 증기를 터뜨린 반동을 이용해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수십 미터 높이에 올라서기 무섭게.
콰르르릉!
검은 번개가, 조금 전까지 가람이 서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조금 전이랑 똑같아. 저 자식도 재생했어.’
불타는 지면과 멀쩡하게 재생한 천둥비룡을 번갈아 바라보며, 가람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이대로면…….’
그의 시선이 비룡의 뒤편, 붉게 물들어 있는 던전 핵으로 향했다.
[04:28]
그 위에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숫자는, 그의 패배가 확정되기까지 남은 시간.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자식부터 찾는 건데.’
실수였다.
중급 정령 둘을 동시에 소환해 힘을 낭비한 것도.
놈의 본체를 찾는 대신 놈이 부리는 괴수를 박살 내려 한 것도.
그 모든 것이 방심과 오만에서 나온 실수였지만,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이대론 질 거야.’
패배.
두 글자가 가람의 머릿속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그럴 순…… 없어.’
이 대결에서 패하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린다.
이제 와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순간.
품속에서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이건.’
대기실에서 그가 꺼내 먹은 약을 담아 놓은 약통.
‘……이거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령력을 인위적으로 증폭시켜 주는 이 약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에 두 알 이상을 드시면 안 됩니다. 반동이 심할 테니까요.’
순간 자신에게 약을 건네준 사내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반동 따위, 견뎌 내면 그만이야!’
[04:03]
단 사 분.
사 분만 버틸 수 있다면, 그다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심을 끝낸 가람의 손이 주머니로 향했다.
발이 지면에 닿기도 전 약통을 꺼낸 그는 안에 남아 있던 환약들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까득! 까드득!
입안을 가득 채운 환약들을 씹을 때마다 역하고 씁쓸한 맛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윤가람은 약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공중에 떠올랐던 그의 발이 지면을 내디뎠을 때.
“……후우.”
가람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정말…… 좋은데.”
우우웅!
전신으로 기파를 내뿜으며, 시커멓게 물든 눈을 치켜뜬 가람의 입가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 * *
세한의료원.
그곳에서 가장 비싼 1인실의 침대 위에, 금발 소녀가 누워 있었다.
무명교의 성녀이자 토벌 3팀의 객원으로 활동 중인 클레어.
인천에서의 던전 토벌로 탈진한 그녀는 그녀의 호위와 함께 세한의료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많이 좋아지셨어. 다행이야.”
그녀보다 먼저 체력을 회복한 성기사, 렌은 병원복을 입은 채 잠들어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깨어나시면, 당분간은 신법을 자제하라고 말씀드려야겠어.”
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육체와 마나, 그리고 영혼이다.
신법을 지나치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사용하게 된다면 영혼이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지켜야겠지.’
미소 짓는 성녀를 바라보던 렌이 다시 한번 속으로 다짐한 그때.
“꺄아악!”
잠들어 있던 클레어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그녀의 눈은 놀란 토끼처럼 커져 있었다.
“성녀님!”
심상치 않은 성녀의 표정을 본 렌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마기, 마기예요.”
기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청난 마기가…… 저기에…….”
성녀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창밖 너머의 어딘가를 향했다.
토벌 작전 당시 지도를 열심히 봐 두었던 기사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이 어디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인천.’
그들이 쫓아야 할 대상.
서진혁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