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40화 (40/174)

40화

게이트가 열리고 괴수와 엽사가 지상에 등장한 지 백여 년.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세상은 별 대신 마도위성이 밤하늘을 뒤덮고 에고컴퓨터가 바둑을 두는 별천지로 변했다.

그러나 엽사와 각성자의 행동 양식은 백 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힘.’

엽사란 결국 괴수와 싸우는 존재.

싸우는 존재에게 힘은 곧 권력이다.

그 힘이 혈통에서, 자기 수련에서 비롯된다면 더더욱.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현대 국가를 이루는 수십, 수백 개의 법이 엽사와 각성자의 야만성을 족쇄처럼 얽매었음에도, 이 대전제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엽사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의 방법은 오직 하나뿐.

“나 서진혁은, 서가의 대표로서 윤가의 대표인 윤가람에게 대결을 청한다.”

“뭐, 뭐라고?”

“자, 받아들이겠나?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만.”

힘의 우열을 겨루는 것.

“……설마, 진심으로 얘기하는 거냐?”

윤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고작 사 품 엽사인 주제에, 날 상대하겠다고?”

그는 이미 삼 품에 오른 지 수년이 지난 베테랑 엽사.

이미 이 품에 오른 형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두 속성의 중급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정령사는 한국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는다.

‘저놈이 그 버러지들을 전멸시킨 건 맞는 것 같다만…….’

그게, 온전히 저 녀석의 실력일 리 없지 않은가.

보나 마나 온갖 함정을 미리 파 둔 다음 기습한 것일 터.

병급 괴수인 천둥비룡의 존재를 고려하더라도, 이미 삼 품에 이른 자신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설마, 날 미추홀의 잡놈들이랑 동급으로 보는 건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거부할 생각인가 보군.”

상대, 서진혁이 코웃음 치자 가람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까드득!

“……조건은?”

가람이 이를 갈며 묻자, 진혁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가문의 도움 없이, 서로가 가진 힘으로 싸울 것. 승리했을 경우, 서로의 조건을 지체 없이 이행할 것. 내 조건은 윤가가 서가에게 인천의 이권을 넘기는 거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너무나 멀쩡하지.”

윤가람이 붉어진 얼굴로 노려봤지만,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얻는 게 있다면, 그만한 위험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정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가문에 중재를 요청하지. 저들이 어느 쪽 편을 들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진혁의 눈이 가람과 마주쳤다.

그의 휘어진 눈꼬리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과연, 네가 거부할 수 있을까?’

답은 뻔했다.

‘……없어.’

이미 물러서기엔 늦어 버렸다.

이대로 물러나 치욕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승리해서, 영광을 찾을 것인가.’

선택은 오직 하나뿐.

“……받아들이겠다.”

윤가람이 제안을 승낙한 순간, 진혁은 고개를 돌려 다른 가문의 참관인들과 엽사회장, 최현을 바라봤다.

이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가에선 이 대결을 인정하겠어. 원한다면 공증도 서 주지.”

말을 마친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주가에서도 받아들이겠어요.”

“유가도 마찬가지다.”

설화가 먼저 나서자, 남은 두 가문의 대표가 그녀를 따라 찬성을 외쳤다.

다섯 엽사 가문이 만장일치를 이뤘으니, 엽사회장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면, 중재 결과에 따라 두 사람 간의 대결을 진행하겠습니다. 일시는 내일, 장소는 오늘 중으로 통보하지요. 그럼, 이상으로 폐회를 선언합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최현은 몸을 홱 하고 돌려 방을 나섰다.

“후회하게 해 주마, 풋내기.”

“기대하지.”

윤가람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진혁을 잠시 노려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팀장님.”

옆에서 주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온 것은 그때였다.

“괜찮겠습니까?”

“뭘 말하는 거지?”

진혁이 고개를 돌려 묻자, 주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대결은 오대가문 전체가 주목할 겁니다. 대결의 진행과 결과에 대한 정보 하나하나가 각 가문으로 들어가서 철저하게 분석당할 테죠.”

진혁이 부리는 망자들.

그리고 그의 능력에 대한 정보가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을 감수할 수 있겠냐는 의미.

대답은 짧았다.

“어차피,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다.”

이제, 드러낼 때가 됐을 뿐이야.

말을 마친 진혁의 눈이, 벽면에 걸린 대한엽사회의 로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결전의 장소가 정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미도.

과거엔 무인도였지만, 영종도에 대한엽사회관이 들어서면서 거대한 훈련장으로 탈바꿈한 곳.

모래사장이 있던 곳에 참관자를 위한 높은 탑이 서 있고, 탑을 중심으로 해변을 따라 세워진 콘크리트 장벽이 중심부의 얕은 구릉과 수풀을 감싸고 있다.

게이트 너머, 에피로나로 향할 엽사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모의훈련장.

그곳의 대기실에서.

“후우, 후우.”

윤가의 대표, 윤가람은 자리에 앉아 곧 시작할 대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가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거야…….”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윤가의 가풍이라지만, 더 많은 이권을 가져온다면 가문의 힘은 더욱 강해질 터.

‘정령술에서 밀릴지는 몰라도, 윤가를 더 잘 이끌 수 있는 건 나다.’

이번 승리로, 그 사실을 증명하리라.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또…… 시작이군.”

가람은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품속의 약통을 꺼냈다.

까득!

약통에서 꺼낸 검은 환약을 씹어 삼키고 나서야, 그의 손은 떨림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가람의 표정은 덤덤했다.

“정령을 부릴 수 있는 대가치고는 싸지.”

이 약이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이제 몇 알 안 남았군. 슬슬 녀석을 졸라야겠는데…….”

이 약을 건네준 상대를 떠올린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령을 부릴 수 없는 윤가의 핏줄이란, 무능력자에 불과할 뿐이니까.

치지직!

―곧,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준비가 되셨다면 지정된 시작 장소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대기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슬슬 가 볼까.”

영광을 위해서.

대기실을 나서는 그의 눈이, 서서히 검붉게 물들어 갔다.

등 뒤에서 망령 하나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    *    *

“확실히 정상은 아니군.”

윤가람이 머무는 대기실의 정반대 편.

망령을 통해 상대를 지켜보던 진혁은 턱을 슬쩍 쓰다듬었다.

먹는 순간 눈이 벌게지고 온몸에서 열기를 내뿜는 약.

물론, 이 대결은 스포츠가 아니다.

영약 한두 개쯤 챙겨 먹는 건 문제도 아닌 일.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영혼의 색이 탁하다.’

영안으로 보이는 윤가람의 영혼엔 때 묻은 흰 티처럼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져 있었다.

얼룩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카르마.’

원인은 윤가람이 방금 먹은 약.

그가 환약을 씹어 삼킬 때마다 영혼의 일부가 조금씩 어둡게 물든 것을 보면 확실했다.

‘어째서…….’

망령에나 붙어 있어야 할 카르마가 산 자의 영혼에 붙어 있단 말인가.

‘저딴 게 윤가의 비전일 리는 없으니, 다른 누군가가 개입한 거겠군.’

주의할 필요는 있었다.

산 자의 영혼에 붙은 카르마는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을 일으킬 테니까.

‘우선은 지켜봐야겠지만.’

생각을 마친 진혁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럼, 가지.”

그는 망자의 군대를 부리는 사령술사.

당연히, 그가 직접 일으킨 망자들 또한 그의 힘이다.

―네, 진혁 님.

―알았어요, 참. 보채기는.

―지금 바로 가겠소.

망령군주의 힘을 얻게 된 그가 직접 깨워 낸 망자.

은빛 투구의 식귀와 천둥비룡, 거대한 스켈레톤과 그를 따르는 수십의 해골들이 열을 맞추어 전진했다.

그들의 선두에서, 진혁은 망자들을 이끌고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오늘이 지나면, 내 힘이 드러나겠지.’

이전이라면 꺼려졌을 것이다.

사령술사가 제대로 된 가디언도, 병사도 없이 정체를 드러내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허나, 작게나마 망자의 군세를 이끌 수 있게 된 지금은 달랐다.

‘이제, 나를 세상에 선보인다.’

개인의 힘을 숭상했던 아스칸과는 달리, 지구의 권력은 힘만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명예, 유명세, 평판, 인지도, 브랜드.

그 모든 것들이 진혁의 부가 되고, 권력이 되고,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 책임은 무겁겠지만, 지금의 진혁이라면 그 짐을 짊어지기에 충분하리라.

이 대결은 그 시작일 뿐.

‘곧, 찾아가 주마.’

외눈박이.

자신의 십 년을 앗아 간 괴수를 떠올린 진혁의 눈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    *    *

서진혁과 윤가람.

둘이 벌이게 될 대결의 방식은 간단했다.

모의훈련장의 룰에 따라, 구릉과 초목으로 뒤덮인 훈련장의 중심에 세워진 모형 던전 핵을 일정 시간 동안 점령하고 지키는 것.

공격과 수비 양면을 전부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정을 떠나는 엽사들의 능력을 판단하기에 적합한 방법이었다.

“수비하는 쪽이 불리하겠군.”

시작 지점인 구릉 위에서, 훈련장의 지형을 살핀 진혁은 턱을 매만졌다.

수풀이 우거진 외곽과는 달리, 던전의 핵이 위치한 중심부는 원형의 텅 빈 공터.

그 말인즉, 수비하는 쪽은 수풀 속 공격자의 기습에 취약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주군, 상대는 정령사라 하지 않았소. 불의 중급 정령을 다룰 수 있다면 숲 자체가 위협이 될 게요. 한번 불이 붙으면 거대한 숯가마가 될 테니.

“그렇지.”

자이츠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은 아니니 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산불 속으로 뛰어들 순 없지 않은가.

승패를 가르진 못하더라도, 진혁의 발을 묶어 두기엔 충분하리라.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우리가 먼저 진입해서, 수비한다.”

―엥? 수비하는 쪽이 불리하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럼, 뭐 어쩌자고요? 저기서 다 같이 죽잔 거예요?

주인의 답을 들은 멜리나가 비룡의 거대한 머리를 갸웃했다.

허나 진혁은 그저 웃을 뿐.

“어차피, 너희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지 않느냐.”

말을 마친 진혁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    *    *

―지금부터,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삐이이이!

안내 음성과 함께 시작을 알리는 부저음이 섬을 뒤흔든다.

“……좋아.”

대결의 시작과 동시에, 윤가람은 자신의 전력을 내보이기로 결심했다.

동시에.

화르르륵! 촤아악!

그의 등 뒤에서 불과 물의 중급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독수리 이그니스와 물방울로 빚어낸 말 앤다이론.

본래라면 중급 정령 둘을 동시에 소환하는 것은 힘을 낭비할 뿐이지만.

“사급 엽사 따위한텐 굳이 힘을 아껴 줄 필요도 없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윤가람의 머릿속엔,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놈은 중앙으로 달려갈 게 뻔해.’

자신이 부리는 불의 중급 정령, 이그니스의 존재를 안다면 당연한 선택.

결국, 윤가람은 시작부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빠르게 달려가서, 방어 준비를 갖추기 전에 기습한다.’

“자, 가자!”

처음 생각했던 전략을 다시 한번 되새긴 가람은 앤다이론의 등에 올라탄 다음 명령을 내렸다.

―……!

―……!

투명한 말이 소리 없이 숲으로 내달린다. 그 뒤를 불꽃 새가 바짝 뒤쫓는다. 맞닿은 불과 물의 원소가 서로에게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내.

콰아앙!

폭음과 함께 물이 끓어오르면서 만들어진 증기가 물의 정령을 거세게 밀어낸다.

‘보인다.’

포탄처럼 쏘아진 앤다이론.

그 등에 매달린 가람의 눈에, 붉은색으로 물든 모의 던전 핵의 거체가 드러났다.

‘놈이 괴수를 부린다지만, 본체를 직접 노린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유가도 괴수를 부리는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의 피에 깃든 지배의 능력은 그 범위가 넓지 않다.

그것은, 천둥비룡을 부리는 서진혁 역시 마찬가지일 터.

‘단숨에 끝내 주마!’

증기의 힘으로 단숨에 섬의 중심까지 도달한 가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뭐야.”

훈련장의 중심에 들어선 가람은 당황했다.

“없잖아.”

던전 핵을 지키는 것은, 놈이 부리는 천둥비룡과 정체 모를 해골들.

하지만 정작, 그들을 통제하는 진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보지도 않고 괴수를 통제한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가 당황한 사이.

딱딱! 딱딱딱!

무기를 꼬나 쥔 해골의 파도가, 그를 향해 몰아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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