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총 31층으로 구성된 대한엽사회관.
날카로운 검을 모티브로 제작된 회관의 가장 높은 곳엔 엽사회장을 위한 집무실이 마련되어 있다.
유리 창문 대신 투명한 결계로 사방을 감싼 집무실의 한가운데.
그곳의 책상에서, 중년의 사내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후우.”
피로한 눈으로 읽던 서류를 잠시 내려놓은 남자는, 책상 옆에 올려 둔 찻잔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쉴 시간조차 부족한 회장이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
남자는 아직 식지 않은 잔에서 피어오르는 차향을 잠시 음미하고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가 채 찻물을 입에 머금어 보기도 전.
쿵!
“회장님, 다음 분기 예산 계획이에요.”
“……이 좋은 시간을 꼭 망쳐야겠나?”
남자는 책상 위에 다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서류를 가져다준 비서의 태도는 당당했다.
“오늘 중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재무팀에서 사정사정하는 걸 어떡해요.”
“그럼, 내 시간은?”
“이거 오늘 중으로 결재 안 나면, 내일부터 위험지역 토벌지원 프로그램 중단인데요? 회.장.님.때.문.에.”
“……내가 왜 회장을 하겠다고 나서서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단 거, 아시죠?”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그녀의 말에, 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그녀가 건네준 서류를 뒤적였다.
그래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어느덧 삼 년 차에 접어든 회장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서류를 넘겼다.
“……문제는 없군. 이대로 결재 올리라고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힘 빠진 회장과는 달리 경쾌한 목소리로 답한 비서는 검토가 끝난 서류 더미를 품에 안아 들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그것도 잠시.
“아, 회장님.”
“음?”
멈춰 선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회장은 의문을 표했다.
“안 잊으셨죠? 오늘 분쟁조정실에 스케줄 잡힌 거.”
“아…….”
“역시. 그럴 줄 알고 책상 위에 관련 자료 올려 드렸으니까 꼭 챙겨 가세요. 시간은 이십 분 뒤!”
그녀는 한 손으로 서류 더미를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로 회장에게 손을 흔들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정말이지, 이놈의 자리는 쉴 틈이 없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회장은, 그녀가 말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내 임기 중엔 처음인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열린 것이 십 년 전이었으니,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
십 년 만에 열리는 행사였으니, 어느 정도는 숙지를 해 놓고 갈 필요가 있었다.
“흠.”
서류를 뒤적거리는 그의 손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칫했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
그 옆에,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서진혁이라, 그 친구인가? 식물인간이 됐다던.”
엽사가 되기도 전 던전에서 식물인간이 된 서가의 장남.
엽사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얼마 전에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벌써 사 품의 엽사가 되었을 줄은 몰랐군, 재능이 특출 났던 건가?”
흥미를 느낀 회장은 천천히 서류를 넘겨 나갔다.
대충대충 훑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의 눈이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음미했다.
곧.
텁!
“……오랜만에, 재미있겠어.”
서류를 덮은 회장의 지친 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 * *
흔히 청문회라 불리는 행사의 정식 명칭은 따로 있다.
‘분쟁조정위원회.’
엽사, 그중에서도 오대가문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차.
그렇기에, 진혁이 들어선 분쟁조정실 내부엔 다른 가문의 참관인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상징인 푸른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하나, 조그마한 도마뱀을 쓰다듬는 남자가 하나.
‘주가와 유가인가.’
아마도, 저들 역시 이설화처럼 가문을 대표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으리라.
‘그리고…….’
진혁의 시선이 맞은편에 선 주황 머리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린 남자는 매서운 눈빛으로 진혁을 노려봤다.
‘윤가람, 이라고 했던가.’
윤가의 차남이자 불과 물의 중급 정령을 다루는 삼 품의 엽사.
그리고.
‘미추홀길드가 세한을 배신하도록 사주한 배후.’
진혁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인천을 잃은 세한은 한동안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에, 미추홀길드를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겠지.’
생각을 굳힌 진혁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상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자 노려보던 상대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움찔했다.
누군가가 방 안을 향해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한 남자가 분쟁조정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엽사회의 정점에 선 자이자, 일 품의 엽사 중 유일하게 가문 출신이 아닌 자.
‘엽사회장, 최현.’
검은 스포츠머리의 흉터투성이 사내를 올려다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군.’
회색 정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근육의 윤곽과 굳은살투성이의 손으로 볼 때, 사내의 주 무기는 두 주먹임이 분명했다.
‘이 정도면……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은 되겠어.’
진혁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일 품 엽사, 서강진과의 우열을 가늠해 보던 그때.
“지금부터, 분쟁조정위원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마나가 섞인 음성이 분쟁조정실을 무겁게 눌렀다. 회장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본 사건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의 입에서 세한보안과 그 산하의 길드, 그리고 윤가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곧.
“……그럼, 양측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십시오.”
설명을 마친 최현은 입을 다물고는 서진혁과 윤가람을 한 번씩 바라봤다.
“제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회장님.”
먼저 나선 것은 윤가의 대표, 윤가람이었다.
“먼저, 서가에서 인천에 직접 개입한 것은 분명히 인천협약의 규제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입에서, 서가와 세한보안의 토벌 3팀이 협약을 어떻게 위반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조목조목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인천에서 던전 게이트로 들어가는 사진 등의 물적증거도 함께.
윤가에서 들고 나온 자료들은 생각보다 자세하고 풍성했다.
“……부디, 참관인분들과 회장께서 현명한 판단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이야기를 마친 윤가람은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곤, 책상 옆의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 어떻게 할 테냐?’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은 가람이 맞은편의 진혁을 소리 없이 비웃었다.
하지만.
‘웃어……?’
진혁은 말없이 묘한 미소를 지을 뿐.
“잘 들었습니다. 그럼…….”
회장의 시선이 반대편에 선 진혁과 주연에게로 향했다.
“서가 쪽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그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건,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진혁은 윤가의 대표를 향해 코웃음 치고는, 중앙에 있던 최현을 바라봤다.
“엽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뭡니까, 회장님.”
그 물음에, 회장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괴수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것이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오대가문이건 아니건, 엽사의 길을 걷는 자라면 머리에 박힐 때까지 외우는 가장 중요한 내용.
“맞습니다. 가장 숭고한 의무기도 하지요.”
회장의 대답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선 주연을 향해 눈짓했다.
곧, 그녀는 가방에서 준비해 놓은 서류 더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가는 그 의무를 다하고자 부득이하게 나섰을 뿐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진혁이 말을 마치자, 주연은 미리 준비해 온 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일주일 전의 상황을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세한보안과 계약을 맺은 길드들이 일제히 토벌을 거부한 일.
게이트 크러시를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협약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과정.
그리고 토벌의 결과까지.
주연이 준비한 설명에 흠잡을 곳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이상입니다.”
“방금 들으신 대로, 서가에서는 엽사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부득이하게 협약을 어기게 된 점에 대해선, 각 가문과 엽사회에 양해를 구합니다.”
진혁이 말을 마친 순간.
장내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건…….’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된다.’
‘저 자식, 일부러 노린 건가?’
그가 엽사의 의무를 논했을 때부터, 이미 협약 위반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진혁……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군.’
침묵 속에서, 오직 가문에 얽매이지 않은 최현만이 진혁을 향해 눈을 빛낼 뿐.
‘엽사가 존재하는 이유를 걸고넘어졌으니, 함부로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오대가문이, 엽사가 한국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들이 괴수를 잡고,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때문.
이 대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오대가문이 존재하는 당위성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이제, 얼추 마무리가 되겠군.’
더 이상 이야기를 끌었다가는 모두에게 손해다.
어서 퇴근해 얼마 되지 않는 휴식을 즐길 시간에, 최현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협약을 위반한 것 자체는 문제입니다!”
침묵 속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
최현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엽사들의 의무가 어찌 되었건. 협약을 위반한 것, 그에 따라 윤가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상으로 서가에서는 인천의 이권을 양도해야 합니다!”
윤가의 대표, 윤가람.
그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고, 위험했으며, 뻔뻔했다.
“허어?”
“……저 사람,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미친 새끼.”
그 말을 들은 다른 가문의 참관인들은 어처구니없어했다.
어쩌면, 저 발언으로 윤가와 다른 가문들이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
‘별수 없어.’
허나 가람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밀려난다. 억지로라도 물어뜯어야 돼.’
그러지 않으면 가주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리라.
‘자, 어쩔 셈이냐?’
사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며, 가람은 이를 악문 채 서진혁을 노려봤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상대를 향해, 진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대가문의 방식대로 처리하지.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대가문의 방식.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 선 모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대가문의 방식?”
“……진심인가?”
백 년 전, 다섯 엽사의 첫 회합 날.
다섯 엽사 중의 수장을 뽑기 위해 치러졌던 절차.
진혁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참관인들과 회장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윤가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서진혁은, 서가의 대표로서 윤가의 대표인 윤가람에게 대결을 청한다.”
말을 마친 그의 차가운 눈이 윤가의 대표에게로 향했다.
“뭐, 뭐라고?”
여기까지는 예상 못 한 것일까.
윤가람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게 물들었다.
“자, 받아들이겠나?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만.”
당황한 그를 바라보며, 진혁은 입술을 뒤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