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가는 황실의 후예다.
한때 비운의 황족, 혹은 민족의 배신자라 불렸던 그들은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독립의 주역으로 변모했다.
그 대가로 이가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옛 황실이 한반도에 가지고 있던 궁궐과 재산의 소유권.
그녀, 이설화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경복궁의 근정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각 안은 백 년 전과 달리 온갖 보구와 마공학장비로 채워져 있었지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궁궐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히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
설화의 정면에 높이 세워진 용상에, 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고개를 들거라.”
“예, 아바마마.”
남자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용상 위의 남자를 바라봤다.
이정.
이가의 현 가주이자 그녀의 아비가, 푸른 머리를 짧게 자른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삼 품에 이르렀다더니, 뇌전의 기운이 한결 정갈해졌구나.”
“모든 것이 아바마마께서 소녀를 잘 보살펴 주신 덕분이옵니다.”
평상시와는 달리 가주의 말에 조곤조곤 답하는 설화의 태도는 사극 속에서 나오는 황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답답해 죽겠네.’
정작, 그녀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겸손하구나. 네 자질이라면 과인(寡人)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터.”
“망극하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이정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그래, 바쁘겠지만 네가 과인을 조금 도와줘야겠다.”
“말씀하시옵소서.”
“곧, 엽사회에서 청문회가 열릴 것이다.”
“청문회라 하셨사옵니까?”
설화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가의 장남이 일을 저질렀더구나.”
“서가의 장남이라면…….”
‘서진혁?’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윤가와 분쟁이 생긴 모양이다. 본래라면 두 가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거늘…… 쯔쯧.”
말을 마친 이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하여, 법도에 따라 우리 가문에서도 참관인을 보내야 할 터.”
“소녀가 가는 것이옵니까.”
“서가의 장남이라면 너와 좋은 인연은 아니다만, 과인은 이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구나.”
설화의 굳은 얼굴을 본 이정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깨어진 약혼 상대를 다시 마주쳐야 하는 일.
가주라면 모를까, 딸의 아버지로서는 시키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설화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니옵니다. 가문의 일에 어찌 사사로운 마음을 쓰겠사옵니까. 말씀을 거두시옵소서.”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과인도 마음이 편안하구나.”
딸의 대답을 들은 그는 죄책감을 조금 덜고는 표정을 폈다.
‘이거, 일이 쉬워졌는데? 익문사는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겠어.’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 * *
일주일 만에 본가로 돌아온 진혁은 꼬박 하루를 잠으로 보냈다.
멜리나의 등에서 조금씩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근 일주일 동안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
결국, 그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진혁 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잠든 진혁을 밤새 지키던 성준의 물음에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마당의 망자들로 향했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군.’
똬리를 틀고도 마당의 반을 차지한 천둥비룡과 식귀, 그리고 식귀와 비슷한 크기의 스켈레톤 하나와 그보다 작은 스켈레톤들이 서른여.
파슬란이 이끌던 망자 군단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의 진혁에겐 중요한 전력이었다.
―깨어나셨구려, 주군.
쿵. 쿵.
스켈레톤 중에서도 유독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한 녀석이 다가왔다.
그가 탐욕고에서 얻은 두 망령 중 하나, 자이츠였다.
―주군이 내준 이 몸, 너무나 맘에 드오. 덕분에 그 처자와 함께 괴수를 원 없이 쳐 죽일 수 있었지 뭐요!
분명 표정을 지을 수 없는 해골임에도, 진혁은 왠지 해골에게서 웃는 표정을 본 것 같았다.
“기회는 앞으로도 넘치도록 있을 거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소, 주군!
진혁의 말에 자이츠는 희희낙락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는 물러났다.
―부럽다, 부러워. 괴수 잡는 일만 아니었어도, 이런 몸뚱이엔 안 들어왔을 텐데.
―그럼, 그 몸뚱이를 나한테 넘기지 그러냐? 너처럼 게으른 자식에겐 아까운 몸뚱이 같은데.
―싫거든? 애초에, 너처럼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놈은 줘도 못 쓸 육체라고!
―뭐, 뭐라고?
자이츠와 멜리나가 서로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진혁은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막대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추홀길드의 길드장, 백선홍이 사용하던 검.
그 검의 손잡이였다.
‘흠.’
불에 타기라도 한 듯 군데군데 그을음이 묻은 데다 여기저기 녹아 있는 것이, 제 기능을 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물건.
허나.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손잡이가 아니었다.
딸깍!
진혁은 녹아내린 손잡이 사이로 난 틈을 손으로 벌렸다.
쩍 하고 갈라진 손잡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무지갯빛이 감도는 손톱만 한 보석.
녀석을 발견한 진혁의 눈이 빛났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정령석이 들어 있을 줄이야.’
말 그대로, 정령의 힘이 깃든 돌.
대한민국에서 오직 윤가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정령석을, 이런 곳에서 얻게 될 거라고는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만큼, 서가를 흔드는 데 공을 들였단 말이겠지만.’
덕분에, 함부로 얻을 수 없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내가 필요한 건 껍데기뿐이지만.’
두근! 두근!
두 손가락으로 정령석을 집어 든 진혁의 검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동시에, 심장에 고여 있던 흑마력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순수한 흑마력의 줄기가 향한 곳은, 진혁의 오른손에 쥐어진 정령석.
스으으으!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정령석이 서서히 검게 물든다. 보석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명의 힘은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윽고.
‘되었군.’
완전히 검게 물든 보석을 바라보며, 진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혼석을 이렇게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을 줄이야.’
영혼이 머물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지닌 보금자리.
지금은 비어 있지만, 이 보석 안에 영혼이 깃드는 순간 영혼석은 제 역할을 다하게 되리라.
그때였다.
“진혁 님.”
누군가가 진혁의 거처에 찾아온 것은.
“그…….”
정장을 입은 세한보안의 직원.
그가 마당에 늘어선 해골과 괴수들을 보고 놀라 말을 잊은 그때.
“엽사회에서 온 거겠지?”
“어, 네, 맞습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진혁의 말에, 당황한 직원은 쭈뼛거리며 진혁에게 한 장의 편지를 넘겼다.
[청문회 출석요구서]
‘예상한 대로군.’
편지 봉투를 확인한 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청문회라, 나름 머리를 쓰긴 했군.’
진혁은 윤가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리산에 위치한 윤가에 붙여 둔 망령.
녀석이 보고 들은 내용 하나하나가 그대로 진혁에게 전달되었으니까.
백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망령으로부터 읽어 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윤가의 동태를 살피기엔 충분했다.
‘인천협약을 걸고넘어진다라.’
안내장을 죽 읽던 진혁은 눈을 빛냈다.
약 삼십 년 전, 다섯 가문이 인천에 직접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한 협약.
‘걸고넘어지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는 하지.’
엄밀히 말해, 진혁과 토벌 3팀이 인천에서 벌인 일은 협약을 위반한 것이 맞았으니까.
평소라면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 뒷교섭으로 처리했을 일이지만, 이번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이미 어떻게든 서가를 물어뜯어 볼 생각이었던 것인지, 윤가로 보낸 경고장은 그대로 청문회가 되어 돌아와 버렸다.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겠지.
진혁은 찾아온 직원을 돌려보낸 다음, 손에 쥔 영혼석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마당 한쪽에 앉아 있는 식귀, 성준에게로 향했다.
“성준.”
―네, 진혁 님.
성준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그는 고개 숙인 그의 투구를 향해 영혼석을 들이밀었다.
“네게, 새로운 힘을 주마.”
진혁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스으으!
그가 들고 있던 영혼석이, 검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 *
대한엽사회는 한국의 엽사를 관리, 감독한다.
엽사의 자격을 부여하고, 엽사 간의 품(品)을 구분하며, 엽사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것이 그 임무.
실제로는 오대엽사 가문의 꼭두각시일 뿐이라지만, 대외적으로는 오대가문도 엽사회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다.
서가의 장남인 진혁이 엽사회의 출석요구를 받아들인 것 역시 그런 까닭.
‘흠.’
인천 영종도.
에피로나행 게이트와 인천공항 사이에 위치한 대한엽사회의 빌딩.
진혁은 검과 지팡이가 X자로 교차한 엽사회의 마크를 흘깃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엽사회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군.’
보통의 엽사라면 엽사 면허를 얻기 위해 한 번쯤은 들러야 하는 곳.
하지만 서가의 적자인 진혁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으니, 실제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었지만, 앞으로 팀장님께서 직접 오실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옆에서 진혁을 수행하던 주연이 입을 열었다.
피로를 제법 회복한 듯, 지쳐 있던 그녀의 얼굴엔 다시 활기가 차 있었다.
주연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살폈다.
일렬로 늘어선 부스와 번호판들, 그리고 번호표를 발급하는 조그마한 기계.
몸에 보구나 무기를 걸친 엽사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흡사 은행이나 관공서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진혁과 주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던 그때.
“뭐야, 이제 오는 거야?”
쪽빛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채 길쭉한 곰방대를 쥔 푸른 머리의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설화였다.
“청문회에 불려 오는 주제에, 여유가 아주 넘치셔?”
곰방대를 문 그녀의 눈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휘어졌다. 진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가의 참관인으로 왔나 보군.”
“딱히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냐, 아바마마의 명 때문에 온 거지.”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금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눈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곧, 설화는 푸른 연기를 내뿜고는 고양이처럼 우아한 발걸음으로 진혁에게 다가왔다.
“조심해, 윤가에선 제법 벼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벼르고 있다?”
“그쪽에선 조약 위반을 빌미로 인천의 이권을 요구할 거야. 아마 쉽게 놔주진 않겠지.”
“내게 굳이 말해 주는 이유는?”
“빚을 갚아야 하니까.”
말을 마친 설화는 다시 뒤로 슬그머니 물러선 다음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피식.
하지만 진혁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대신, 그저 웃을 뿐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뭐?”
이미 윤가에 보내 둔 망령을 이용해 정보를 모아 둔 그에게, 설화가 준 정보는 좋게 말해도 뒷북일 뿐.
“그럼, 먼저 올라가지.”
진혁과 주연은 그대로 설화를 지나치고는 뒤쪽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 재수 없는 자식이.”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설화는 사라지는 진혁의 뒷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잠깐, 나도 올라가야 하잖아?”
멈춰 있던 그녀의 사고가 다시 움직인 순간.
“야, 같이 가!”
설화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윽고.
“……이 자식이 진짜.”
뿌드득!
닫히는 문틈 새로 보이는 서진혁의 미소 앞에서, 그녀는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