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36화 (36/174)

36화

간석오거리역 근처에 위치한 간석길드.

소속된 엽사가 고작 두 명뿐인 작은 길드였지만, 십 년 넘게 간석동을 지켜 온 인천의 베테랑 길드 중 하나다.

하지만.

“형님.”

오늘따라, 간석길드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간석길드의 부길드장, 박범진.

등에 거대한 강철활을 멘 남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오늘도 다른 길드들이 연락했단 말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해요, 형님.”

정급의 괴수 정도는 화살 한 발로 끝장낼 수 있는 사 품의 엽사.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배신자예요, 배신자. 이제 십 년쯤 해 먹고 나니까, 슬슬 그만두고 싶기라도 한 겁니까? 형님은 몰라도 나는 식구가 있다고요.”

말을 마친 범진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 유리판에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범진아.”

간석길드의 마스터, 주강민은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내온 동생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네 생각엔, 세한이 어떻게 될 것 같냐?”

“어떻게 되긴요. 지금이야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한계가 오겠죠.”

엽사도 사람이다.

아무리 엽사들이 인간을 초월했다 해도, 그 상대 역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괴수들.

적절한 휴식과 수면, 식사 없이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이대로면, 조만간 사고가 날 겁니다. 그러면 세한도 멀쩡하진 못할 거고요. 그 전에 편을 못 고르면 우리 길드는 나가리예요, 나가리!”

말을 마친 범진은 답답한 표정으로 길드장을 바라봤다.

뭘 해야 할지 뻔히 보이는데, 길드장이라고 앉아 있는 사람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니 초조할 수밖에.

그러나 강민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얘기였다.

“범진이 너, 요즘 게이트 알림은 보고 있냐?”

“에이, 보나 마나 시뻘걸 거 아닙니까? 네 명이서 어떻게 남동구랑 연수구를 다 커버해요?”

“그럼, 한번 봐 봐.”

강민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을 동생에게 들이밀었다. 범진의 시선이 스마트폰 속 지도로 향했다.

이윽고.

“……이거, 언제 겁니까?”

순간, 범진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동생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강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 두 시. 이제 삼 분 전이야.”

“뭐라고요?”

범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도 위에 나타난 게이트의 모습이, 그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이거, 오류 아닙니까? 아니면 세한 애들이 조작이라도 했다거나…….”

“엽사회에서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을 조작한다고? 다른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럼, 이 많은 던전들을 진짜 넷이서 처리했단 거예요?”

화면 위의 지도는 깔끔했다.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녹색의 게이트가 한두 개쯤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

범진이 오류나 조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내 고민을 알겠니, 동생아?”

“세한에게…… 우리가 필요 없어질 수도 있겠군요.”

“거기다, 미추홀길드 놈들은 며칠 전부터 연락이 안 되잖아. 그게 무슨 의미겠어?”

배신한 길드들에 대한 본보기.

지금은 잠시 미루고 있지만, 혼란을 수습하면 세한은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민 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고민을 마친 강민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쩌실 건데요?”

“어쩌긴.”

범진이 묻자, 그는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세한으로 돌아가서, 빌어라도 봐야지.”

*    *    *

채챙!

도망치며 살아왔다.

서걱!

혈육의 유언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주연의 인생은 복수와 회피의 이중나선을 그렸다.

피나는 노력 끝에 삼 품의 엽사가 되고서도,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촤아악!

“끼이이이이!”

병급 괴수, 수정하늘소의 투명한 외피가 그녀의 오러에 잘려 나간다. 상처 위로 터지는 녹색 체액과 함께, 상처 입은 괴수의 포효가 던전을 진동시킨다.

“끼이이이!”

병급의 괴수는 마기를 내뿜을 수 있다.

분노한 수정하늘소의 기다란 뿔에서 솟아난 것은, 검게 물든 무형의 창날.

마치 검은 오러를 보는 듯한 저 창날에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그녀는 치명상을 입게 되리라.

하지만.

‘마지막이야.’

그녀가 던전 토벌에 적응하기에, 일주일은 너무나 충분한 시간.

“도와줘.”

포효하는 괴수 앞에서 주연은 짧게 속삭였다.

그 순간.

타앗!

주연의 등 뒤에서, 거대한 해골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양손에 족히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검을 쥔 해골이 달려 나간 곳은, 수정하늘소의 정면.

“끼이이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에게, 괴수는 본능적으로 시커먼 창날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따따딱!

해골은 비웃는 듯이 이빨을 몇 번 부딪치고는 놈의 뿔을 피해 낸다. 검은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해골의 갈비뼈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그대로 놈의 길게 뻗은 뿔을 무시해 버린 해골의 의도는 뻔했다.

조금 전 잘려 나간 외피가 붙어 있던, 놈의 녹색 피로 물든 상처.

푸욱!

“끼이이이이!”

거대한 대검이 놈의 상처를 깊숙하게 후볐다.

마기를 다룰 수 있는 병급의 괴수라 해도, 전신으로 퍼지는 극통 앞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딱딱!

수정하늘소가 주저앉은 순간, 맡은 역할을 다한 해골은 뒤로 물러섰다.

병급 괴수인 놈의 숨통을 끊기 위해선, 극한의 절삭력이 필요하다.

스릉!

삼 품에 오른 엽사가 뿜어낼 수 있는 마나의 응집체.

오러와 같은 것이.

칠성무(七星武).

일섬(一閃).

파아앗!

등에 멘 장검을 번개처럼 뽑아 든 주연의 검이 횡으로 그어진다. 빛나는 오러의 잔상이 순간 한 줄기의 빛을 남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쿠우웅!

병급의 괴수라지만, 몸이 두 동강 나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다.

생명을 잃은 수정하늘소의 몸통이 두 동강 나 미끄러지는 것을 보며, 주연은 검에 묻은 녹색 피를 털어 냈다.

“잘했어.”

딱딱딱!

주연의 칭찬에 해골이 고맙다는 듯 이빨을 부딪쳤다.

‘이제, 일주일은 안심이네.’

스릉!

검을 등 뒤에 멘 그녀는 지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 던전을 공략하는 데 나흘이 넘게 걸리긴 했지만, 그 대가로 당분간은 병급 던전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잠깐 쉬는 동안, 다른 곳을 좀 더 도와야겠는데.’

자신이 이 정도라면, 서진혁 팀장은 몰라도 성녀 일행의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으리라.

조금이라도 오래 견디기 위해선, 그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삐비빅!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통신구슬이 신호를 보낸 것은 그때였다.

‘팀장님인가.’

달리 연락이 올 만한 사람은 없다.

그녀는 주먹만 한 수정구슬을 손에 쥐고는 마나를 불어 넣었다.

곧.

―들리나?

빛을 뿜는 수정구슬을 통해, 서진혁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현 시간부로 토벌을 종료한다.

그 순간.

“……성공하셨군요.”

지쳐 있던 주연의 얼굴에, 한 줄기의 활력이 돋아났다.

*    *    *

던전을 토벌하는 것은 베테랑 엽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작위로 등장하는 기후와 지형만으로도 충분히 악조건인데, 그 안에 서식하고 있는 괴수의 종류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거기에 작정하고 걸어도 수 시간, 길면 수일은 걸리는 광활한 면적까지.

던전의 난이도를 떠나, 던전을 토벌한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체력과 피로도를 심하게 소모하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죽……겠네, 정말…….”

일주일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던전과 지구를 왕복한 클레어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이름 없는 신에게 선택받은 성녀답게 신법으로 체력을 보충해 왔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아으으…….”

정신력과 체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그녀의 동공은 동태처럼 풀려 있었다. 다 죽어 가는 신음을 내는 성녀의 수척한 얼굴엔 하얗다 못해 퍼런 기가 돌았다.

“성녀님, 이만 쉬셔야 합니다.”

렌은 옆에서 비틀거리는 클레어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신법을 쓰셨다간,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클레어를 부축해 주는 그녀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쌓아 온 성전기사로서의 체력, 그리고 중간중간 체력을 회복해 준 성녀의 신법이 아니었다면 쓰러지는 건 클레어가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아, 안 돼요, 아직은…….”

그러나 클레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는 제대로 서 있을 기력조차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 그만두면, 사람들이, 죽는단 말이에요…….”

탈진한 성녀를 지탱하는 것은 선의와 의무감.

허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셋째, 내 업무에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오기.

“내가…… 못 할 줄 알고?”

서진혁의 말을 떠올린 순간, 클레어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려 애를 썼다.

삐비비비―.

렌이 가지고 있던 통신구슬이 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성녀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왜 그래요?”

“팀장입니다.”

축 늘어진 성녀의 몸을 받쳐 안으며, 그녀는 통신구슬을 작동시켰다.

곧.

―들리나?

주먹만 한 수정구슬에서, 서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시간부로 토벌을 종료한다.

“……아?”

종료라는 말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던 클레어가 귀를 쫑긋했다.

―반복한다. 현 시간부로 토벌을 종료한다. 이상.

삑!

그것으로 끝이었다.

연결이 끊김과 동시에, 통신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끄, 끝이야? 정말로?”

클레어가 풀린 눈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진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네, 끝입니다.”

“그래…… 끝났구나…….”

툭.

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긴장이 풀린 성녀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떨궜다.

“서, 성녀님…….”

놀란 렌이 클레어를 깨워 보려 했지만, 긴장이 풀린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

풀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탈진한 두 소녀는 길바닥 위에 풀썩 쓰러졌다.

“크으……?”

쓰러진 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식귀, 성준은.

“크으으.”

성녀와 기사를 어깨에 들쳐 메곤 걸음을 옮겼다.

*    *    *

던전을 유지하는 것은 던전의 핵, 코어다.

핵이 파괴되는 순간, 던전을 이루고 있던 공간은 서서히 빛을 잃고 소멸해 무로 돌아간다.

게이트 너머에서 들어온 ‘진짜’ 세계의 것들을 제외하고는.

“끝났군.”

통신구슬을 끈 진혁은 고개를 내려 회색의 대지를 바라봤다.

드넓은 숲을 가르는 대로 위로 굴러다니는 것은, 한때 미추홀길드 소속이었던 엽사들의 시신.

“그럼…….”

뒤처리를 해야겠지.

진혁은 검게 그을린 대지로 나아갔다.

찔리고, 베이고, 번개에 맞아 타오른 시신들을 지나 도착한 곳은, 길드장 백선홍의 시체 앞.

‘정령은 사라졌나.’

녹아 버린 검의 손잡이만을 쥔 채 새까맣게 타 버린 시신의 모습은 처참했다.

허나, 진혁의 표정은 덤덤했다.

파슬란이던 시절, 그는 아스칸에서 더욱 끔찍한 광경을 밥 먹듯이 봐 왔으니까.

‘어차피, 던전과 함께 사라질 테지.’

동시에, 자신이 미추홀길드를 전멸시켰다는 증거도 함께 모습을 감출 것이다.

미추홀길드가 진혁을 ‘실종’시키기 위해 던전으로 찾아왔듯, 이들 역시 의문의 ‘실종’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리라.

물론.

‘그 전에, 할 일이 있지만.’

배후를 캐는 일.

자신을 죽이고, 세한을 흔들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

진혁은 선홍의 시체가 쥔 검 손잡이를 챙긴 다음,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곧.

스으으!

진혁의 눈이 푸르게 물들었다.

흑마력을 듬뿍 빨아들인 영안이 귀기로 타오르면서, 던전을 떠도는 미추홀길드의 망령들이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진혁의 바로 앞에 둥둥 떠 있는 백선홍의 망령도 그중 하나.

“망령이여.”

진혁은 그를 향해 왼손을 내뻗었다.

스으으!

왼손에 깃든 흑마력이 무력한 망령을 향해 쏘아진다. 발버둥 치는 망령을 포박한 검은 사슬이 팽팽하게 조여진다.

“네 기억을 보여라.”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망령을 향해, 진혁은 사령술사의 언령을 발동했다.

이윽고.

스으으으!

망령의 기억을 읽어 내는 진혁의 눈이, 시퍼런 귀기로 번뜩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