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미추홀길드는 인천의 중심인 남동구를 영역으로 삼는다.
몇 년 전 새로운 길드장이 된 백선홍과 길드원들의 노력, 그리고 세한의 지원이 더해져 일어난 기적.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물거품처럼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미추홀 길드의 길드장실.
푹신한 중역 의자에 앉아 전화를 받는 길드장, 백선홍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 일이 끝나면, 미추홀길드를 윤가의 자회사로 만들겠다고요.”
평소의 그와는 달리 극도로 정중한 어조.
허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 자네에게 우리 가문의 상징인 정령까지 쥐여 주지 않았나.
반면,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 아니야. 단지,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지.
“상황은 똑같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세한은 알아서 무너질 거란 말입니다!”
결국,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선홍은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윤가에 들어갈 수 있는데!’
오대엽사 가문은 과거의 귀족, 혹은 왕족에 준하는 위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 거대한 이권에 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 것이 오대가문의 힘이다.
‘서가 놈들이 문을 열어 줄 생각을 안 해서 문제였지.’
그런 상황에서 들어온 윤가의 제안은, 선홍에게 달콤한 독과도 같았다.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그 풋내기에게도 한계가 올 것은 뻔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
쾅!
그때였다.
“기, 길드장님!”
길드원 하나가 노크도 없이 길드장실로 난입한 것은.
“뭐야, 노크도 없이? 지금 전화하는 거 안 보여?”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막내다.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선홍은 스마트폰을 손으로 가리고는, 막내 길드원을 향해 표정을 구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막내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크, 큰일입니다! 세한에서…….”
“……세한?”
순간,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려 보십시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선홍은 막내를 향해 손짓했다.
부욱!
곧, 막내에게서 누런 서류 봉투를 받아 든 그는 봉투를 찢어 버리곤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이 자식들이…….”
서류의 앞머리를 확인한 선홍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용증명]
[계약해제 및 손해배상 청구]
그 아래로 적힌 것은, 미추홀길드가 세한보안에 끼친 피해의 내역과 위반한 계약 조항에 대한 설명.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문장 자체는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더 이상 자신들의 배신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
선홍은 붉어진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분위기를 보니, 세한이 고소장이라도 보낸 모양이군.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평온한 목소리에, 선홍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누구 놀리는 겁니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홍은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자네, 말이 좀 과하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가라앉는 순간, 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상대는 윤가, 그중에서도 실세.
자신이 잡고 올라갈 동아줄을 쥔 사람이다.
“……죄송합니다.”
―조심하게.
선홍이 급히 사과하자, 싸늘했던 사내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래성은 파도를 맞으면 무너지는 법이지. 하지만 파도를 맞고도 버티는 모래성은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겠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만히 내버려 둬서 무너지지 않는다면, 직접 발로 차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야.
“그, 그 말은!”
상대의 말뜻을 깨달은 선홍의 눈이 커졌다.
“……잘못되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모든 일엔 위험이 따르는 법이야. 자네가 지금까지 길드를 키워 왔던 방식처럼 말이지. 이번 일이 조금 더 위험할 뿐이네.
“하지만.”
―그리고 위험에는 언제나 그만한 대가가 따르지. 안 그런가, ‘윤선홍’ 길드장?
악마의 속삭임이 뱀의 혀처럼 파고든다.
윤선홍.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세 글자 앞에서, 백선홍은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놈은 천둥비룡을 다룬다고 합니다. 병급의 괴수를 상대하기엔 아직 부족합니다만.”
―조만간 해결책을 보내 주지. 다른 건?
“충분합니다.”
―그럼, 다음 연락 땐 좋은 소식이 오길 바라지.
삑!
전화가 끊겼지만, 선홍은 한동안 굳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그의 뒤엉킨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끼이익!
선홍은 길드장실을 나섰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평소와는 다른,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분위기.
엽사들의 시선이 길드장에게로 모였다.
“후우.”
선홍은 잠시 거친 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 출동 준비해라.”
“출동이라면.”
“세한의 서진혁.”
놈을 친다.
결심을 굳힌 선홍의 눈이, 진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익문사에서 보고.]
누군가, 자신의 말을 받아 적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 * *
“……그렇단 말이지.”
이가의 최정예 엽사들이 모인 착호갑사대.
“후우.”
그들을 통솔하는 착호갑사대의 장, 이설화는 손바닥만 한 종이를 들여다보며 푸른색 연기를 입으로 뿜었다.
오직 이가가 다루는 뇌전의 마나를 불어 넣어야만 내용을 볼 수 있는 마법 문서.
은빛으로 [긴급]이라 적힌 첫머리 아래로, 이가의 정보부서인 익문사의 요원이 보내온 정보가 짧게 적혀 있었다.
“익문사에서 보고. 미추홀길드, 서진혁 암살 시도. 한 시간 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비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금테 안경 너머, 비문을 읽는 그녀의 동공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진혁.’
오래전 깨어진 약혼의 상대다.
그 이후로 서가와 이가의 사이는 앙숙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가 죽거나 실종된다면 분명 이가에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아바마마라면 오히려 좋아하시겠지.’
이대로 무시하면, 그것으로 끝일 뿐이다.
서가는 장남을 잃고, 이가는 그만큼 이득을 보게 되리라.
허나.
후우!
“……구려.”
연기를 뿜어낸 설화는 표정을 찡그렸다.
연기의 맛 때문은 아니었다.
이대로 끝내기엔, 뒷맛이 너무나 찝찝했다.
‘……생명의 빚을 졌지.’
그가 부리는 천둥비룡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아르카나에서 죽거나 마인이 되었으리라.
‘그래도, 재수 없는 놈인 건 똑같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아르카나에서 멋대로 지껄이던 진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니 아직도 가문에 얽매여 있는 것이겠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군.’
십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만해진 성격은, 그녀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재수 없는 새끼.”
설화는 진혁을 향해 욕을 퍼붓고는 다시금 곰방대를 빨아들였다.
온갖 종류의 약초를 배합해 태운 연기가 그녀의 분노를 서서히 가라앉히고, 머리를 맑게 해 준다.
‘그래도, 빚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생각을 마친 설화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곰방대의 연통에 들고 있던 마법 종이를 올렸다.
화르륵!
순식간에 피어오른 불꽃이 종이를 잿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린다.
익문사의 비밀문서를 처리한 그녀는, 책상 오른쪽에 놓인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전칠기로 장식된, 다이얼을 돌리는 방식의 구식 전화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게이트 너머의 원하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정급의 보구다.
끼릭끼릭.
그녀는 마나를 담은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몇 번 돌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추홀길드가 갈 거야. 이거로 빚은 갚았어.”
그녀가 내뱉은 말은 고작 두 마디.
‘그래도, 그 자식이라면 알아듣겠지.’
할 말을 끝낸 설화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
―걱정은 고맙다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이 재수 없는 새끼가.”
빠각!
두 동강 난 곰방대를 손에 쥔 그녀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 * *
“끊어졌군.”
자신을 휘감은 마나가 흩어지자, 초원 위에 서 있던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하니, 도와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아마도, 아르카나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녀 나름대로는 생명의 빚을 졌으니,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뭐, 쓸모없는 걱정이긴 하다만.’
생각을 마친 진혁은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린 차원문을 바라봤다.
추정 등급 정급의, 진혁이 인천에서 마주친 열세 번째 던전.
난이도 자체는 지금까지와 같이 어렵지 않게 토벌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이곳에서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가자, 멜리나.”
―네에―!
진혁이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천둥비룡이 날개를 펴고 게이트를 향해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순식간에 게이트를 통과한 진혁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는 숲의 바다.
나무 사이사이에 수많은 괴수들이 숨어 있는 것이 진혁의 눈에 보였지만, 그도 잠시였다.
키이이이익―!
이 던전에서 볼 수 있는 괴수는 기껏해야 정급.
진혁과 천둥비룡이 던전에 들어서기 무섭게, 병급 괴수를 알아본 괴수들은 재빨리 등을 돌려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은 명령을 내렸다.
“멜리나, 슬슬 준비해라.”
―어, 뭐부터 할까요?
“우선은, 길부터 내야겠지.”
―알았어요. 이거 은근히 힘든데, 참.
진혁의 말뜻을 알아들은 천둥비룡이 고도를 높였다.
곧, 던전 전체가 내려다보일 만큼 높이 날아오른 그녀의 아가리가 크게 열렸다.
이윽고.
콰르르르릉!
그녀의 입에서 굵은 번개가 지상으로 쏟아져 나갔다.
번개는 그대로 지상을 긁고 지나가며 직선상의 나무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넘어트렸다.
곧, 말 그대로 반 토막이 난 숲의 모습이 진혁의 눈에 들어왔다.
“나쁘지 않군.”
무덤으로 쓰기에는.
붉게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며, 진혁은 입술을 뒤틀었다.
* * *
미추홀길드가 진혁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혁과 토벌 3팀이 활동하는 지역은 그들이 수십 년간 지켜 온 땅.
긴 세월 동안 쌓아 온 인맥을 동원하면, 천둥비룡을 끌고 다니는 사람 하나쯤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여기군.”
예술회관 옆의 버려진 백화점 건물.
그 앞에서 일렁이는 게이트를 앞에 둔 백선홍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여기만 넘어서면.’
윤가의 성을 받을 수 있다.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21세기의 신귀족이 될 수 있다.
고작, 한 사람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만으로.
‘그래, 그러면 끝나는 일이야.’
이미, 실패라는 가능성은 그의 머릿속에 사라져 있었다.
“자.”
자신의 뒤에 도열한 서른의 엽사들.
이들과 함께라면, 사 품의 엽사쯤은 손쉽게 제거할 수 있으리라.
“가자!”
손을 흔든 선홍을 선두로, 미추홀의 엽사들이 게이트를 향해 전진했다.
신분을 위해, 돈을 위해, 이권을 위해.
각자의 욕망을 품은 엽사들이 차원문을 넘어 던전에 들어선 순간.
―진혁 님, 들어왔어요.
던전 위로 깔린 푸른 하늘.
그 중간중간에 떠 있는 하얀 구름 위에서.
“보인다.”
게이트를 내려다보던 진혁의 눈에, 푸른 귀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