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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32화 (32/174)

32화

성유창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여섯.

다섯 살에 마나를 각성하고, 열여덟에 엽사 일을 시작했다.

가문도, 스승도 없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이 품의 엽사로 성장한 그의 눈에.

“미련하기는.”

이틀 전 자신을 찾아왔던 서가의 장남, 서진혁은 자존심만 센 철부지일 뿐이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인천에 생성되는 게이트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 생성 빈도가 다른 곳의 두 배를 넘는 것은 물론이요, 던전의 토벌 난이도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

다른 지역에선 일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병급의 게이트가 한 달에 한 번 이상 열리는 마경이다.

자존심 따위를 지키려 했다면, 애당초 이 저주받은 땅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됐다.

“뭐, 조금만 지나면 녀석도 깨닫겠지.”

그때가 된다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와 도움을 청하게 되리라.

“……그래도, 제법 배짱은 있는 놈이던데.”

설마, 자신이 건넨 마나계약서를 그대로 되돌려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이야기해 보지.’

“하, 정말 웃기는 놈이야.”

서가의 장남이라지만, 고작 사 품인 풋내기.

조카 같은 주연의 부탁과 서가라는 배경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터다.

“이제 이틀이 지났으니, 슬슬 현실을 깨달았겠지.”

어디, 확인해 볼까.

스마트폰을 꺼내 든 유창은 앱 하나를 켰다.

[게이트 알림]

국내에 생성된 던전 게이트의 등급과 위치를 실시간으로 제공해 주는, 엽사들의 필수 어플.

그가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세한의 관할구역인 남동구와 연수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마, 게이트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겠지.’

그중 태반은 붕괴가 머지않은 붉은색의 위험 게이트일 터.

지도가 화면 위로 떠오르길 기다리며, 유창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니?”

지도를 확인한 그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가…….”

없어?

붉은색도, 노란색도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하게 정리된 지도 앞에서, 유창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멈춰 섰다.

*    *    *

던전 너머는 에피로나가 아니다.

던전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에피로나의 일정한 영역을 임의로 복사한 일종의 아공간.

그렇기에, 던전의 내부는 지형과 기후부터 식생과 괴수의 종류까지 천차만별일 수밖에.

클레어와 렌이 밟고 있는 눈보라투성이의 설산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이름 없는 신이시여, 얼음조차 타오르는 당신의 열정을 찬미합니다…….”

산을 통째로 파묻을 것처럼 내리는 눈보라 속, 신성력을 가득 담은 성가(聖歌)가 울려 퍼진다. 따뜻한 불의 기운을 담은 목소리가 눈을 녹이고 바람을 가라앉힌다.

동시에.

“크으으으…….”

정급 던전의 핵을 지키는 수호 괴수, 식귀 둘이 신성력에 신음한다.

드넓은 공간에 옅게 퍼진 신성력이 괴수들의 육체 능력을 좀먹던 사이.

타타타탓!

“이름 없는 신이시여.”

이 미터가 넘는 태도를 쥔 소녀가 신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 나간다.

그녀의 전신에 깃든 금빛 광채는, 성기사의 육체를 강화하는 수호의 권능.

신의 검으로 살아가겠다 맹세한 성기사의 눈에, 괴수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걱!

검이 두 식귀의 목을 가른다. 괴수의 머리통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 아래 절벽으로 굴러떨어진다.

‘이제 남은 건.’

단숨에 식귀를 베어 버린 성기사, 렌은 쓰러진 시체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보석을 확인했다.

던전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던전의 핵.

놈을 부수면, 던전 게이트는 활동을 멈추게 되리라.

‘단숨에 베어 버린다.’

지난 이틀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 온 일.

몸은 피곤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언제나처럼 핵을 가르기 위해 들어 올려졌다.

쿠르르릉!

산이 난데없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전까진.

“크읏.”

렌은 순간 쓰러질 뻔했지만, 곧 능숙하게 자세를 고쳐 균형을 잡고는 주변을 살폈다.

‘이건, 지진이 아냐.’

지표 일부만을 복제하는 던전에서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던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진이 아니라 다른 이유일 수밖에 없다.

‘지하에 있군.’

타앗!

땅 아래에서 기척을 느낀 렌은 재빨리 몸을 튕겼다.

곧.

쿠구구궁!

조금 전까지 그녀가 밟고 있던 땅이 파먹힌 것처럼 동그랗게 무너져 구멍을 만들어 낸다.

그와 동시에.

“크에에에에.”

어두컴컴한 구멍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지렁이였다.

그 지름이 못해도 이 미터에 보이는 부분만 오 미터가 넘는 길이를 가진, 이것을 지렁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은 거대한 존재.

렌은 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땅굴벌레.’

던전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정급의 괴수.

녀석이 이제야 나타났단 건, 이 던전의 진정한 수호 괴수가 땅굴벌레라는 의미와 같았다.

‘어려운 상대는 아냐.’

위험하긴 하지만, 첫 기습을 피하기만 하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괴수.

다만, 문제라면.

‘권능이, 약해지고 있다.’

렌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신녀의 성법이 도움을 주긴 했지만, 지난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로 그녀의 몸은 지쳐 있는 상태.

신의 권능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레엔.”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달은 클레어가 성가를 멈추고 비명을 질렀다.

“키이이이이.”

‘피하긴 힘들어.’

허공에 뜬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아가는 땅굴벌레.

렌은 손에 쥔 태도를 힘들게 들어 올려 놈을 막아 보려 했다.

들어 올리기는커녕 쥐고 있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때였다.

‘……음?’

파파팟!

“크으으으.”

우렁찬 포효와 함께, 하늘로 솟아오르던 땅굴벌레의 기다란 몸통이 동강동강 조각난 것은.

콰아앙!

그중 하나가 던전의 핵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 부딪친 순간.

우우웅!

시간이 멈추는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과 하얀 설산이, 서서히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핵이 파괴되어, 던전이 제 기능을 잃었다는 신호였다.

“……감사합니다.”

회색으로 물든 눈을 밟고 착지한 그녀는, 자신을 도와준 상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박람회장에서 처음 마주친 이후, 수도 없이 함께 대련해 온 은빛 투구의 식귀.

“크으으.”

‘……착각인가?’

왠지 모르게, 그녀는 식귀가 인사를 받아 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무급의 괴수는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움직인다.

정급의 괴수는 마기를 사용해 육체를 강화한다.

그리고.

“우어어엉.”

병급의 괴수는, 마기를 내뿜어 특수한 능력을 사용한다.

채채챙!

‘제법.’

가시불곰의 발톱에 서린 검은 기운을 오러로 맞받아치며, 신주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물론,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채챙!

병급의 괴수가 사용하는 기술은, 인류의 초상 능력과 유사하다.

그중, 가시불곰의 발톱에 서린 검은 기운은 오러와 비슷한 절삭력을 가진 능력.

저 칼날에 잘못 당했다간, 단숨에 몸이 두 조각 날 것이다.

채채챙!

그럼에도, 그녀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가시불곰의 공격을 피하며 아슬아슬한 공방을 이어 나갔다.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토벌 3팀이 던전 토벌에 들어선 지도 벌써 이틀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전을 위해선,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주연은 적의 공격을 최대한 적은 힘으로 막고 피하며 때를 기다렸다.

“지금.”

자신과 함께 온 동료가 괴수의 등 뒤를 노리기만을.

파팟!

발톱을 막아 낸 그녀가 순간 왼손을 뻗어 단검을 쏘아 낸다.

푸른 오러가 두껍게 서린 단검이 향하는 곳은, 붉은 털로 덮여 있는 가시불곰의 복부.

푸른 오러가 두껍게 서린 단검 몇 개가 놈의 부드러운 뱃가죽을 순식간에 파고든다.

푸푸욱!

“우어어어.”

의표를 찔린 가시불곰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

단검의 길이도 짧거니와, 마기로 보호되고 있는 가시불곰의 두꺼운 피부는 쉽게 관통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괴수의 화를 돋우기엔 충분한 고통.

“크어어어.”

흥분한 가시불곰이 붉어진 눈으로 달려든다. 육체를 보호하고 있던 최소한의 마기까지 쥐어짠 놈의 묵빛 손톱이 일 미터 넘게 솟아나 주연을 노린다.

허나.

놈이 채 그녀에게 앞발을 휘두르기도 전.

푸우욱!

“우, 우어?”

목덜미를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

눈앞의 인간을 찢어발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가시불곰의 눈이 부릅떠진다.

곧.

쿵!

생명을 잃은 가시불곰의 거대한 육체가, 대지 위에 미끄러지듯 쓰러진다.

“후.”

자신의 코앞에서 멈춘 가시불곰의 엎드린 시체를 바라보며, 주연은 쥐고 있던 장검을 등 뒤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괴수의 숨통을 끊어 버린 동료를 바라봤다.

“수고했어.”

딱딱딱!

그녀의 인사를 받은 것은, 사람이 아닌 해골이었다.

쑤욱!

해골은 괴수의 목덜미에 틀어박힌 검을 뽑아내고는, 주연을 향해 푸르스름한 안광을 뿜어냈다.

언뜻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지만, 주연은 개의치 않았다.

“그럼, 다음 던전으로 가자.”

딱딱딱!

웬만한 엽사보다 뛰어난 검술을 가진 해골과 이틀 동안 합을 맞춰 온 그녀의 눈엔 믿음직스러운 동료로 보일 뿐.

여자와 해골은, 무채색으로 물든 세계를 나란히 빠져나갔다.

*    *    *

지평선 아래를 가득 채워 놓은 대수림(大樹林).

녹색의 바다 위를, 푸른 비늘의 비룡과 사람이 날고 있었다.

―주군, 던전 토벌을 완료했소. 주연이라는 처자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구려.

‘수고했다. 다음 던전으로 가도록.’

새롭게 육체를 얻은 자이츠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을 태우고 있던 멜리나가 투덜거렸다.

―으으, 지겨워.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적어도 일주일.”

―일주일이라고요?

“끼이이이!”

사령술사의 말에 천둥비룡, 멜리나가 놀라 소리쳤다.

“그 정도는 돼야, 의미가 있겠지.”

하지만 진혁은 이미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토벌은 순조롭다.’

예상대로, 남동구와 연수구의 게이트는 토벌 3팀의 힘만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숫자였다.

구성원은 진혁을 포함해 단 넷.

허나 진혁의 손엔 죽지도, 지치지도 않는 망자 군단이 있었다.

‘무급 던전쯤은 해골병사들만으로도 토벌할 수 있으니, 버티는 건 어렵지 않아.’

중요한 것은, 세한이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인천이 여전히 평화를 유지한다면, 세한을 배신한 엽사들은 서서히 그 쓸모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이용 가치가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행동을 시작하겠지.

생각을 마친 진혁은 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숲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멜리나.”

―네에…….

진혁의 명령을 받은 멜리나는 귀찮은 투로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렸다.

하지만 비룡의 아가리에 깃든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파직! 파지직!

마기 대신 천둥비룡의 몸을 가득 채운 흑마력이 한데 뭉쳐 검은 스파크를 튀긴다.

그녀, 멜리나가 천둥비룡의 몸에 적응을 마친 것은 오래전의 일.

생전에도 뛰어난 마법사였던 그녀에게, 거대한 힘을 제어하고 방출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윽고, 비룡의 아가리에 응축된 흑마력이 임계점을 넘겼을 때.

콰아아아아!

비룡은 입에서 검은 번개를 토해 냈다.

소리보다 한발 앞서, 묵빛의 전광이 녹색 바다를 반으로 가른다.

콰르르릉!

뒤늦게 들려온 천둥소리와 함께, 녹색의 바다가 점차 그 빛을 잃어 간다.

핵을 잃어버린 던전이 기능을 잃으면서, 세계를 물들인 색채가 회색으로 녹아내린다.

‘어디, 버틸 수 있다면 버텨 봐라.’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

서서히 붕괴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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