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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31화 (31/174)

31화

엽사는 괴수로부터 인류를 수호한다.

그것이, 이제 백 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엽사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이유.

한국의 오대엽사 가문 역시 마찬가지다.

제국을 무너뜨린 오대가문은 백 년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의 게이트와 괴수를 토벌하며 권력을 손에 넣어 왔으니까.

다시 말해.

엽사가 의무를 다하지 않는 순간, 엽사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팀장님, 세한보안에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 신주연은 심각했다.

세한을 대신해 인천의 게이트를 토벌하던 협력 길드들.

이들이 토벌에서 손을 떼는 순간, 인천의 게이트를 통제할 방법은 사라지니까.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임계점에 도달한 게이트들이 붕괴하면서 차원 저편에 자리한 괴수들을 토해 내리라.

그리고 그들이 인천을 파괴할 동안 또 다른 게이트가 붕괴해 다시 괴수를 쏟아 내는 연쇄반응이 시작될 터.

흔히 말하는 게이트 크러시(Gate Crush)다.

“게이트 크러시가 시작되면 막을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인천, 아니 수도권 전체를 봉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파국이다.

높은 확률로 한국은 멸망할 것이고, 만에 하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태의 원인인 세한그룹은 파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리라.

천문학적인 재산과 생명을 잃은 국민들이 세한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토벌 1팀과 2팀을 불러 지원을 요청한다면,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저들과 협상을 해야 합니다.”

주연이 보기에, 이미 일은 자신들의 손을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

파국을 막기 위해선, 어떻게든 행동해야 했다.

“아니, 소용없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토벌 1팀과 2팀은 서울과 경기도를 지키기도 벅찰 거다. 지원도 어렵겠지.”

두 팀에서 일부의 엽사만을 빌려 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빈틈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저희 교단에 연락해 볼게요.”

그러자 나선 것은 클레어였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쥔 그녀의 표정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에도 성전기사단의 분견대가 있으니까, 제가 부탁한다면 아마도 와 줄 거예요.”

“성녀님, 하지만.”

성녀의 말을 들은 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명교의 교세가 막강하다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세속과는 거리를 둔 종교 단체.

한국의 권력투쟁과 연관된 일에 사사로이 성전기사단을 보낸다면.

“……교단이 성녀님을 견제할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될 수 있단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클레어는 단호했다.

“그치만 당장 게이트를 막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잖아요. 그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게, 어떻게 성녀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까. 렌은 어서 성전기사단에 연락해요.”

말을 더듬는 그녀의 다리가 조금씩 떨려 왔지만, 그녀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이를 악물었다.

허나.

“그럴 필요도 없다.”

진혁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클레어가 고개를 홱 돌려 진혁을 쏘아봤다.

“그럼, 사람들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자는 거예요?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어쩌잔 건데요? 당신 가문에서 지원도 못 해 준다면서요!”

대책도 없이 무조건 고개만 젓는 진혁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이트 크러시가 일어나면, 이미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인류 전체의 문제라고요. 당신, 감당할 수 있어요?”

“감당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아니, 진짜. 무슨 벽에다 얘기하는 것 같네. 당신 사람 맞아? 그 가죽 벗겨 보면 고렘인 거 아냐?”

당장이라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답답함에 클레어는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하지만 진혁의 시선은 어느새 주연에게로 향했다.

“부팀장, 우리 관할구역에서 하루에 생성되는 게이트는 몇 개지?”

“평균 10.2개입니다. 그중 50%는 무급, 49%는 정급, 나머지는 병급 이상입니다.”

을급과 갑급의 던전이 열리는 경우는 십 년에 한 번꼴이니, 사실상 던전의 최대 등급은 병급.

하지만 그 숫자가 문제였다.

“여, 열 개요? 다섯 개도 아니고?”

“인천 지역은 에피로나행 게이트가 가깝기 때문에 차원의 불안정성이 더욱 큽니다. 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두 배 이상의 던전이 생성되는 곳이죠.”

“아니, 그럼 헌터가 못해도 서른 명은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주연의 설명을 들은 클레어는 입을 쩍 벌렸다.

무급의 평균 토벌 시간은 반나절이지만 정급은 하루, 병급은 사흘을 넘긴다.

거기에, 엽사도 인간이니 식사와 수면이 필요하다.

그 빈자리를 채울 것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예순 명의 엽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이 정도 규모라면 성전기사단의 지원을 받아도 해결이 어렵습니다. 열 개의 게이트라면…….”

“당연하죠! 어떻게 네 명이 던전을 하루에 열 개씩 막아요!”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렌까지 난처한 표정을 짓자, 클레어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진혁을 노려봤다.

삐비비비―!

주연에게서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팀장님, 잠시 전화를.”

진혁에게 양해를 구한 주연은 급히 스마트폰을 들었다.

통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던 사이.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주연의 시선이 진혁에게로 향했다.

“팀장님, 아라길드에서 초대 요청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라길드.

다섯 가문이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경, 인천에서 유일하게 오대가문과 접점이 없는 길드.

그들이, 진혁을 부르고 있었다.

“가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    *    *

“당신이군. 십 년 동안 쓰러져 있던 서가의 장남이라는 사람이.”

성유창.

이십 년이 넘게 아라길드를 이끄는 그의 시선이 진혁에게로 향했다.

“실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군.”

그가 씨익 웃자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흉터가 꿈틀거린다.

사내의 빛바랜 회색 머리가 살아온 세월을 짐작게 했지만, 노쇠한 육체 위로 풍겨 오는 기세만큼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이 품 엽사라고 했던가.’

홀로 을급의 괴수와 맞설 수 있는, 지구 전체에서도 삼백 명이 넘지 않는 존재.

아라길드가 오대가문들과 연을 맺지 않고도 수십 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쓸데없는 말만 할 거라면, 이만 가 보지.”

하지만 진혁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창은 피식 웃었다.

“그래, 싸가지라곤 밥 말아 먹었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군. 그렇지 않냐, 주연아?”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요, 삼촌.”

“삼촌?”

주연에게 가족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진혁은 의문을 표했다.

유창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주연이 애비 친구일 뿐이야. 같은 길드 동료였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말을 마친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다 옛날얘기일 뿐이지만. 그보다, 서진혁 팀장이라고 했지?”

유창은 무거운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 세한 쪽 애들이 토벌을 중단했다지? 그런 자식들은 자격증을 찢어 버려야 하는데 말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우리가 도와주지. 삼 품 엽사 여덟에, 이 품 하나. 이 정도면 괜찮은 전력이지 않나?”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수백 명의 엽사를 휘하에 둔 세한보안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였지만, 그들이 가진 실력은 그 격차를 메우고도 남는다.

분명, 저들이 합류한다면 빈 공백을 메우는 건 일도 아니리라.

물론, 대가가 없을 리는 없다.

“조건은?”

“자네 이름과 서명. 그거면 돼.”

씨익 웃은 유창이 내민 것은 한 장의 계약서였다.

평범한 계약서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건 아니겠지?”

“마나계약서군. 그것도 백지.”

서로의 마나를 담보로 맹약을 매개하는 무급 보구.

거기에, 계약서라면 당연히 쓰여 있어야 할 계약 조항은 하나도 없이, 오직 서명하는 공간만이 있는 기묘한 형태.

무슨 의미인지는 뻔했다.

“내 미래를 팔라는 거군.”

이 계약서에 이름을 적는 순간, 진혁은 유창이 적은 계약 조항에 노예처럼 끌려다닐 수밖에 없으리라.

“기회를 얻고 싶을 뿐이야. 오대가문, 그것도 후계자 후보에게 빚을 지울 일이 많은 건 아니니까.”

진혁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도 유창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오대엽사 가문, 그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서가의 힘을 빌릴 기회다.

분명, 그 힘은 게이트 너머에서도 도움이 될 터.

‘서가라면, 놈을 잡는 데 분명 도움이 되겠지.’

유창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진혁의 선택을 기다렸다.

허나.

“받아들이지 않겠다.”

“……호오?”

진혁의 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유창의 흉터가 미세하게 꿈틀했다.

“곧장 달려오길래 급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여유로운 모양이지?”

그 말에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애당초, 내가 여기 온 건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

“도움을 주기 위해서지.”

말을 마친 진혁은 책상 위에 놓인 마나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턱!

“그럼, 이야기를 다시 해 보지.”

계약서를 뒤집어 도로 내민 진혁은 입꼬리를 슬쩍 비틀었다.

*    *    *

세한보안 인천지사는 인천시청 바로 앞, 구 교육도서관 앞에 위치한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만 지사일 뿐 실제로는 텅 빈 건물.

그곳의 3층에 있는 회의실에 모인 것은, 진혁이 이끄는 토벌 3팀이었다.

“게이트 현황에 따르면, 현재 남동구와 연수구 일대에 생성된 던전 게이트는 무급 4개, 정급 2개입니다. 이 중 절반이 이틀 내에 붕괴할 예정입니다.”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주연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틀도 지나지 않아 대재앙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팀장님, 더는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어서 결정을.”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상사인 팀장을 바라봤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계획을 설명하지.”

앞으로 나선 진혁은 벽면에 띄워 둔 인천광역시 전도, 그중에서도 남동구와 연수구를 확대하고는 손으로 가리켰다.

“토벌 3팀은 지금부터 셋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렌과 클레어가 한 조, 그리고 나와 부팀장이 각각 한 조씩.”

“……잠깐, 잠깐만요. 지금 농담하는 거죠?”

잠자코 듣고 있던 클레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진혁을 쏘아봤다.

“정말로, 여기 네 명이 저 많은 던전들을 처리하잔 소리예요? 그게 말이 돼?”

적어도 예순 명의 엽사가 투입되어야 할 일이다.

그들 모두가 일 품의 엽사가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저 많은 던전 게이트를 단 넷이서 막아 낸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이건 정말 미친 짓이잖아요!”

성녀의 눈에, 진혁의 이야기는 성공 가능성이라고는 일 퍼센트도 보이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진혁은 대답 대신 얼굴이 붉어진 클레어를 말없이 바라봤다.

“왜, 왜요?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순간 움찔한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틀렸다.”

진혁은 화를 내는 대신 손가락을 뻗어 창문 바깥을 가리켰다. 클레어와 다른 둘의 시선이, 저절로 창문을 향했다.

곧, 클레어의 눈에 창문 너머의 풍경이 들어왔다.

“크으으으으!”

“……식귀?”

창문 너머 광장으로 보이는 것은, 그녀의 호위인 렌을 다치게 했던 식귀.

그리고.

“키이이이!”

식귀를 등에 태운 채, 배 아래에 곤돌라처럼 생긴 정육면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천둥비룡.

“이 정도면, 숫자는 충분하겠지.”

그녀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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