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인천의 지하 곳곳엔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벙커들이 존재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괴수가 출몰하는 지역이니만큼, 비상시에 대비한 대피소를 도시의 구석구석마다 박아 놓은 것.
그중 한 곳.
“아마, 여러분들도 이걸 받으셨을 겁니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원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스윽.
말을 마친 남자가 한 장의 종이를 원탁 가운데로 내밀었다.
[방문 안내]
첫머리에 굵은 글씨로 쓰여 있는 제목 아래로 적힌 것은, 방문 날짜와 장소 등의 세부 사항들.
서류의 말미에 그려진 북두칠성의 문양은, 이 안내서가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겁니다. 수십 년 동안 관심도 없더니, 이제 와서 찾아온다고?”
“이제 좀 살 만해 보이니까, 세한에서 인천에 직접 관여하려는 거 아닙니까?”
원탁 앞에 모인 자들은, 모두가 세한의 하청을 받아 온 인천의 길드장들.
“주워듣기론, 이번에 오는 건 서진혁이란 사람이라더군.”
“그, 십 년 전에 식물인간이 됐다는?”
“난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야. 인천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듣도 보도 못 한 사람을……!”
그들이 한마디씩을 덧붙일 때마다, 세한을 향한 불만도 점점 진해졌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한이 우리에게 꽤 큰 돈을 지원해 준 건 사실입니다. 방문 자체를 뭐라고 하기엔…….”
“세한에게 잘못 거슬렸다가, 길드 문 닫을 수도 있어요!”
세한과 비교적 우호적인 자들,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들 역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마찬가지.
“그딴 소리나 하고 있을 거면, 여긴 왜 앉아 있는 거야? 가서 서가 놈들 바짓가랑이나 붙잡을 것이지.”
“배신자 놈들!”
“뭐, 그럼 세한하고 한판 해 보기라도 하겠단 거야?”
“그건 자폭이지, 자폭! 다들 굶어 죽고 싶어?”
“뭐, 인마?”
자리에 모인 본래의 목적은 잊히고, 고성과 비난이 원탁 위를 수없이 오갔다. 붉게 달아오른 길드장들의 얼굴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욕설들이 속사포처럼 쏘아져 나갔다.
평소부터 쌓여 있던 길드 간의 불화가 완전히 터져 버릴 것 같던 그때.
끼기기기기긱!
신경을 긁는 불쾌한 쇳소리에,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던 길드장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모였다.
“그만, 그만.”
소리를 낸 것은 검(劍)이었다.
통짜 쇠로 만들어진 원탁 위로, 반쯤 박혀 있는 철검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검을 쥔 사내의 얼굴도.
“우리가 지금, 싸우자고 모인 겁니까?”
끼기기긱!
마치 맹수처럼 사나운 인상을 가진 사내는 원탁에 박혀 있던 검을 힘껏 뽑아내고는 길드장들을 바라봤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우리끼리 싸우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하지만 미추홀길드장. 사실이지 않나.”
미추홀길드장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대답한 것은, 조금 전 세한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던 회색 머리의 사내였다.
“이봐, 백선홍이. 우리가 아무리 뭉쳐 봤자, 오대가문을 상대할 수는 없어! 그놈들은 백 년 전부터 이 나라의 주인이었다고.”
“하.”
그 말에, 미추홀길드의 장인 백선홍은 코웃음 쳤다.
“백 년입니다, 백 년.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벌써 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선홍의 피처럼 붉은 머리칼이 슬쩍 흔들린 순간.
팟!
검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검을 감싼 홍염이 원탁의 정중앙을 가른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철로 만들어져 튼튼하기 그지없는 원탁이었지만, 반 토막이 났는데도 제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쿠우웅!
“이, 이건.”
원탁이 반으로 쪼개져 쓰러진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길드장들은 눈을 부릅떴다.
단숨에 원탁을 베어 버린 백선홍의 검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꽃.
“정령……?”
“아니, 자네가 어떻게.”
선홍은 웃음을 흘리며 불의 정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곧, 불꽃은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대가문에는, 서가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 자네, 설마.”
붉은 머리 남자의 말에, 자리에 모인 길드장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선홍은 태연한 표정으로 길드장들을 바라봤다.
손에 쥔 애검, 그믐불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배신이니 뭐니 하는 소리나 꺼낼 생각이라면, 그냥 짧고 굵게 붙읍시다. 자신 있습니까?”
초상 능력 중에서도 희귀하고 강력하다고 여겨지는 정령.
그리고 그 정령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보구.
삼 품의 벽조차 제대로 뚫지 못한 길드장들이 감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그럼, 없는 것으로 알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홍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세한을 무너트릴 계획을.
* * *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고속도로.
십삼 킬로미터 남짓한 길이의 대로 위를, 한 대의 세단이 달리고 있었다.
“처음 올 때부터 느낀 건데, 도대체 한국은 산이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클레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산, 터널, 산, 터널, 산, 터널…… 지루해.”
낯선 풍경도 처음 볼 때나 새롭고 신기한 것이지, 어딜 가나 똑같은 풍경만 보이는데 지겹지 않을 리 없다.
“그럼, 지금 내려서 돌아가면 되겠군.”
하지만 옆에 타고 있던 진혁의 대답은 차가웠다.
“어, 에?”
“굳이 올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원한다면 여기서 내려 주지.”
“아, 아니, 내가 언제 돌아간다고 했어요? 난 당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거든요?”
“그러면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와라.”
클레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진혁은 다시금 읽다 만 서류를 들여다봤다.
[……미추홀길드는 세한과 협력하고 있는 인천의 중소길드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세한에 소속된 자유길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운전 중인 주연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둔, 인천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
진혁은 사전만 한 두께의 묵직한 서류철을 빠르게 넘기며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물론, 이 보고서만으로 모든 내용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은, 만나 봐야겠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해 본다면, 그들이 숨기고 있는 속내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소통의 문제인지, 단순한 불만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서가를 배신하려는 걸지도.’
쉴 새 없이 서류를 넘기는 진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진혁 님, 이제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의 상념을 깬 것은 운전을 맡은 토벌 3팀의 부팀장, 신주연이었다.
두꺼운 서류철을 내려놓은 진혁의 눈이, 세단의 창밖으로 향했다.
[인천대공원]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공원의 입구.
이곳이, 오늘 서가의 협력 길드들과 만남을 가질 장소였다.
“와, 꽃이 잔뜩 폈네?”
조금 전까지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만 해 대던 그녀였지만, 공원을 물들인 꽃들을 마주하자 눈이 반짝거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렌 역시 내색하진 않았지만 은근슬쩍 꽃들을 곁눈질하는 건 마찬가지.
“진혁 님, 왜 이런 곳을 모임 장소로 정하신 겁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은 주연뿐이었다.
길드장들과의 모임을 회의실도 아니고, 굳이 야외의 공원을 빌려 진행한다는 게 그녀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우리 팀장님이 생각보다 꽃을 좋아하시나 보죠! 생긴 거랑은 완전 딴판…… 으으.”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클레어가 입을 열었지만, 서늘한 눈빛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눈빛을 거둔 진혁은 짧게 입을 열었다.
“필요하니까, 그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다들, 모여 있군.’
차에서 내린 진혁은 저 멀리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공원과는 어울리지 않게 검이나 엽사용 보호구 따위를 입고 자신을 쏘아보는 자들.
인천의 길드 중, 세한과 협력을 맺은 곳의 길드장들이었다.
‘기선 제압이라도 할 모양이지.’
피부를 찌르는 기세에 진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나하나가 마나를 제 몸처럼 다룰 수 있는 베테랑 엽사들.
일반인이라면 그들이 쏘아 내는 기세만으로 혼절해 버리리라.
“뭐, 뭐야.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예요?”
“진혁 님,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클레어와 주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진혁은 손을 내저으며 태연히 걸음을 내디뎠다.
전 세계와의 혈전도 웃으며 즐겼던 망령군주의 자아가, 고작 이 정도 압박에 흔들릴 리 만무하다.
진혁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오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길드장들이었다.
차마 말은 꺼내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는 엽사들 앞에서, 진혁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다.”
상대를 내리까는 오만한 눈빛.
“세한보안 토벌 3팀의 서진혁 팀장이다.”
좌중을 짓누르는 차가운 목소리.
한 길드의 장에게 건네는 인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혁의 태도는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우린 안 반가운데.”
얼빠진 엽사들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붉은 머리의 사내.
미추홀길드의 주인 백선홍이었다.
“그동안은 신경도 안 쓰더니, 그 잘난 세한이 인천엔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온 거요?”
어깨에 두툼한 태도를 짊어진 사내는 진혁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봐도 뻔한 도발.
“그동안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 서로가 서로의 할 일을 다 했으니.”
하지만 진혁의 태도는 여전히 차분했다.
“누군가가 딴마음을 먹기 전까진.”
그가 이 자리에 왜 찾아온 것인지 분명히 밝혀진 순간, 몇몇 길드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예전에야 세한이랑 해 볼 만했지. 근데 그거야 옛날 일이고.”
하지만 선홍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건들거리며 피식 웃었다.
“명색이 우리가 세한의 자회사도 아니고 자유길드인데, 살다 보면 편을 좀 바꿀 수 있는 거 아뇨?”
말을 마친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태도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화르르륵!
시퍼렇게 빛나던 검신이, 화염으로 붉게 타올랐다.
“그, 팀장. 그래도 서가 사람이니, 이게 뭔지 정돈 알고 있죠?”
“불의 정령이군. 윤가 놈들과 손을 잡은 건가?”
“우리 팀장님, 역시 똑똑해. 긴말할 필요 없어서 좋네.”
고개를 끄덕인 선홍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우리는 윤가의 후원을 받기로 마음먹었으니, 이만 가 보쇼. 당신들은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척!
타오르는 태도의 끝이 서진혁을 향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토벌 활동을 중단할 거요. 그러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겠지?”
알고 있었다.
인천이 지금은 중립구역이라지만, 본래는 세한의 영역.
토벌 활동을 중단하면 던전이 붕괴할 것이고, 쏟아져 나온 괴수가 인천을 파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한이 위태로워지겠지.’
괴수에게건, 다른 가문에게건,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의 여론에 의해서건.
세한은 분명 화를 입게 될 터.
하지만.
“원한다면, 마음대로 해라.”
진혁의 대답은 상식을 벗어났다.
“……뭐라고?”
“귓구멍이 막혔나 보군. 원하는 대로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 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