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신법은 무명교의 진정한 힘이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물질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신, 이름 없는 신.
그가 내려 준 신성력을 믿음으로 가공한 기적, 신법은 무명교가 고작 백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지구 최대의 종교로 성장한 이유 그 자체였으니까.
쾅! 콰광!
그중, 은발 소녀의 전신에서 횃불처럼 타오르는 성화(聖火)는, 이름 없는 신의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상위에 들어가는 고위 신법이다.
‘성화 강림.’
이름 없는 신의 불, 성화를 몸에 받아들여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성전기사단의 신법.
무명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어쩌면 무명교보다도 더 유명할지도 모르는, 무명교의 상징과도 같은 심법이었지만.
‘실전도 아닌 대련에서, 저걸 쓸 줄이야.’
그걸 지켜보는 진혁은 저 성기사의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의 불을 받아들이는 대가는 인간의 자유의지.
이성 대신 광신으로 움직이는 광전사가, 생사결도 아닌 평범한 대련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쾅! 콰광!
그를 증명하듯, 이미 오 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녀와 성준의 검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성화의 힘을 받아들인 소녀는 식귀와 검을 맞대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기세가 식귀를 압도할 정도.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점점, 성화가 강해지고 있다.’
성화를 받아들인 자가 성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성화는 시전자의 육체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리리라.
최악의 경우엔.
‘체르노빌처럼 될지도 모르지.’
체르노빌.
게이트 밖으로 나온 갑급 괴수를 토벌하던 성전기사단의 성화가 폭주하면서, 꺼지지 않는 불이 수십 년째 타오르고 있는 마경(魔境).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송도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될지도 모른다.
“어, 엄청 강하네. 역시 성전기사단인가?”
“근데 저 성화는 왜 자꾸 커지는 거야?”
“마나 흐름이 뭔가 이상한데…….”
성기사와 괴수의 대결을 지켜보던 엽사들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웅성댔다. 글리펜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진혁에게 다가왔다.
“꼬맹아, 저거 설마…….”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젠장.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돼. 재수 없으면 성역 안에서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다고.”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글리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다른 세계, 에피로나에서부터 수백 년을 살아온 난쟁이는, 소녀의 몸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뇨,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체르노빌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대피한다고 해도 이미 늦을 겁니다. 차라리 여기서 막아야 합니다.”
“말은 쉽지, 성화가 활활 타오르는 성기사를 어떻게 막으려고!”
이름 없는 신이 내려 준 불, 성화는 품고 있는 신성력만으로 시전자를 위협하는 대부분의 요소를 태워 버린다.
엽사 몇 명의 공격 정도로 꺼트릴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진혁을 제외하면.
말을 마친 진혁은 입고 있던 정장의 속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주 작은 아공간과 연결된 속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푸른색의 수정구슬.
‘이거라면.’
가능하다.
“어르신.”
구슬 안을 떠돌아다니는 망령들을 잠시 바라보던 진혁은, 고개를 돌려 난쟁이를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뻗었다.
“혹시, 저것들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부스의 벽에 장식된 세한금속의 수많은 제품 중, 괴수 뼈로 만들어진 서브 브랜드.
[skeleton]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힌 로고 아래, 뼈로 만들어진 것을 증명하듯 온통 새하얀 빛이 도는 병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아니, 빌려주는 거야 문제가 없는데…… 정말로 가능하다고?”
“가능합니다. 효율이 조금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두근! 두근!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친다. 검게 물든 대동맥을 타고 진한 흑마력이 혈류와 함께 전신으로 뻗어 나간다.
“망령이여.”
명계의 계약자인 그의 입에서, 죽음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언령이 흑마력과 함께 쏟아져 나온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육신에 깃들어라.”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괴수의 뼈로 만들어진 수많은 흉기.
언령을 담은 흑마력과 무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연결된 순간.
―육체, 육체다!
―육체에!
―내가, 내가 먼저야!
언령을 받아들인 수정구슬 속의 망령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흑마력의 실을 타고 무구로 달려든다.
이윽고.
스으으―!
망령을 받아들인 병기들이 하나둘, 진혁의 의지에 따라 공중으로 떠오른 순간.
‘저, 저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패닉에 빠져 있던 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계시 속의……?’
그녀가 놀란 눈으로 떠다니는 무구들을 바라보던 사이.
쐐애애액!
영혼이 깃든 무구들.
수많은 리빙 웨폰(Living Weapon)들이 일제히 목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어떤 녀석은 곧게, 어떤 녀석은 곡선으로, 어떤 녀석은 비틀비틀 구부러지면서.
제각기 다른 경로를 그리며 날아가는 수십의 창칼이 향하는 곳은, 태양처럼 밝게 타오르고 있는 거검과 소녀.
“…….”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위협을 느낀 걸까.
식귀를 향해 달려들던 그녀의 시선이 순간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하얀 병기들을 확인한 그녀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챙! 채챙!
검신만 이 미터를 넘는 참마검, 클레이모어는 불규칙적으로 날아드는 리빙 웨폰을 압도적인 길이를 활용해 막아 냈다.
챙그랑!
그녀의 검격과 부딪친 서너 개의 리빙 웨폰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무구에 담긴 흑마력과 망령의 카르마가 신성력과 부딪쳐 그대로 소모된 탓.
하지만 고작 서너 개의 창칼을 막아 낸 것으로는 부족했다.
“크으으으!”
쐐애액!
틈을 놓치지 않고 식귀가 검을 휘둘러 온다.
챙!
기사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상대의 공격을 흘려 냈지만, 이번에는 리빙 웨폰들이 그녀의 등 뒤를 찔러 온다.
채채챙!
성화가 깃든 검과 맞닿을 때마다 흑마력을 모조리 써 버린 리빙 웨폰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안에 깃든 망령들이 카르마를 잃은 채 하늘로 올라간다.
쐐애액!
그럼에도, 남아 있던 수십의 창칼이 다시금 메뚜기 떼처럼 달려든다.
채채챙!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죽일 때마다 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성화가 점점 기세를 잃어 간다.
마치 물을 끼얹은 것처럼 리빙 웨폰에 담긴 흑마력이 이름 없는 신의 불꽃을 조금씩 진화한다.
광신으로 달아올랐던 그녀의 몸이 망령들의 원한과 맞닿으며 서서히 식어 간다.
결국.
푸푸푸푹!
“아, 안 돼!”
힘이 꺾여 버린 기사의 사지에 순백의 창칼이 박히자, 클레어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듯, 기사의 검에서 힘겹게 타오르고 있던 잔불이 죽은 듯이 사그라들었다.
챙그랑!
검을 쥘 힘조차 사라진 기사는, 쥐고 있던 검과 함께 하얀 바닥에 몸을 뉘었다.
“나, 나 때문에……! 이름 없는 신이시여……!”
기사를 향해 달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성녀의 표정은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 어서 구급차 안 부르고!”
글리펜의 호통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그리고 구경하던 엽사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막아…… 냈군.’
흑마력을 전부 소진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서진혁은.
털썩!
전신의 탈력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야, 꼬맹이! 넌 또 왜 그래? 젠장, 구급차는 언제 오는 거야?”
* * *
짹짹짹!
새들의 지저귐이 고요한 어둠을 찢어발긴다.
그와 동시에, 렌 슈미트는 눈을 떴다.
‘……여긴.’
여전히 욱신거리는 몸을 서서히 일으키는 렌의 눈에, 창문 너머 햇살 사이로 새들이 날아가는 게 보인다.
‘……병원인가.’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자신이 병실, 그것도 1인실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병원에 누워 있는지도.
‘오우거와 싸웠지. 그리고 성화……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렌은 병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미친년, 차라리 그냥 죽었어야지!’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깨달은 순간,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
고작 대련일 뿐인 자리였다.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인 자리에서 분을 참지 못하고 성화를 불러들이다니.
‘사람들은, 괜찮은 건가?’
성전기사단의 정식 기사들조차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성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성이 사라진 검은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니까.
그녀가 그 자리에서 엽사들을 전부 베어 버렸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 성녀님은…….”
무사한 걸까.
어쩌면 자신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대죄를 저지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레, 렌?”
충격을 받은 귓가에 누군가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녀가 긴장으로 굳어 버린 목을 힘겹게 돌리자, 금발을 뒤로 묶은 눈물투성이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지켜야 할 성녀, 클레어였다.
“깨, 깨어났군요!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자신의 호위기사가 깨어났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울먹이던 성녀가 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 성녀님…….”
“미안, 미안해요…… 미안…… 나 때문에…… 으아앙!”
클레어가 품속에서 울음을 터뜨리자, 렌은 어쩔 줄 몰라 들어 올린 손을 움찔거렸다.
차마 하지 말란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젖어 가는 옷의 감촉을 느끼고만 있을 뿐.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셨군.’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차올랐다.
끼이익.
병실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그때였다.
“깨어났군.”
“……당신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렌은, 그녀가 이성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오우거 옆에 있던.”
“세한보안의 토벌 3팀장, 서진혁이다.”
정장 차림의 사내, 진혁은 명함을 던지듯이 내밀고는 병상 위의 렌과 그녀 위에 엎어진 성녀를 번갈아 가며 훑어봤다.
“아무래도, 내가 방해한 모양이군.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아, 아뇨, 훌쩍!”
진혁이 방을 나서려 하자, 렌에게 안겨 있던 클레어가 몸을 돌려 진혁을 바라봤다.
“이름 없는 신의 대리자로서, 훌쩍! 그대의 도움에 감사, 훌쩍! 드립니다.”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코를 훌쩍이는 꼴이 성녀보다는 울보에 가까웠지만, 애써 자세를 갖추어 감사를 표하는 모습만은 분명 진심이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이라, 뭐지?”
“계시와 관련된 거예요.”
계시.
역시나, 진혁과는 썩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단어다.
파슬란의 목이 날아간 근본적인 원인이 다름 아닌 신의 계시 때문이었으니까.
그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계시지?”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잠시 심호흡하며 흐트러진 감정을 진정시킨 성녀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서진혁 팀장님, 당분간 당신의 옆에 머물고 싶어요.”
“싫다.”
진혁은 일 초도 망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