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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25화 (25/174)

25화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우와아…….”

인천으로 향하는 여객기의 퍼스트클래스.

좌석이 아니라 객실이라고 해야 할 크기의 드넓은 공간에서, 금발머리 소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감탄사를 외쳤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회색 계통의 천에 금색으로 포인트를 준 신관복을 걸친 소녀의 눈은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렌! 저거 봐요, 저거! 엄청 높은 건물이 진짜 많아요!”

소녀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회색 정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또래의 소녀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녀님, 이곳은 교단이 아닙니다. 교단의 품위를 위해서라도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치만, 그치만! 너무 신기하잖아요!”

“이 지구 전체에서 한국은 작은 나라일 뿐입니다. 벌써부터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흥! 그러는 렌도 이번이 처음 나오는 거면서!”

“저는 이름 없는 신의 검으로써 그리고 성녀님을 지키는 방패로써 바깥세상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익혀 두었습니다.”

“으으…… 하여간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한다니깐.”

렌이라 불린 은발머리 소녀의 말에 성녀, 클레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도 잠시.

“성녀님, 대신 이번 임무가 끝나면 시간이 남을 테니, 그동안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구, 구경이요?”

그 말에, 풀죽어 있던 클레어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이제부터는 교단 밖으로 자주 나오셔야 할 테니, 미리 적응해 두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교단에는 제가 허가를 받아 보겠습니다.”

“지, 진짜죠?”

“대신, 이제부터는 항상 기품 있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무명교의 성녀답게.”

“제가 얼마나 기품 있고 교양 넘치는 성년데요! 이름 없는 신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걸요?”

렌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문 클레어는, 언제 시무룩해 있었냐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에헴, 에헴. 렌?”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곧 경건한 표정으로 호위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성녀님.”

“내리기 전에 라면 하나만 먹고 내려도 될까요?”

“안 됩니다.”

*    *    *

‘성녀라.’

진혁은 성녀, 정확히는 신을 섬기는 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아스칸의 사령군주, 파슬란이었던 시절.

‘죽어라, 악마여.’

그의 목을 날려 버렸던 것이, 다름 아닌 성검을 든 용사였으니까.

“성녀라면…….”

“무명교 말야.”

탐탁잖아 하는 진혁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글리펜은 흥분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번 성녀가 처음으로 외부활동을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 일정이 여기란 정보가 들어왔다고.”

“그래서, 굳이 저와 식귀를 데려오신 겁니까?”

“야, 인마. 죽어서 네 증조할애비한테 욕 안 먹으려면 회사는 살려 놔야 할 거 아냐?”

그 물음에 글리펜은 한심하단 눈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무명교에 납품만 할 수 있다면 세한금속은 앞으로도 백 년은 끄떡없다고. 그러면 나도 과금…… 큼큼, 질 좋은 장비를 만들 수 있고 말야, 엉?”

말을 마친 글리펜은 헛기침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허나 진혁은 여전히 썩 내키지 않았다.

‘신성력을 마주하기엔 아직 이르다.’

상극까지는 아니지만, 신성력이 흑마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사령술사에게 흑마력이란 힘의 근원이었으니, 신성력을 부리는 성녀를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가능하면, 접촉을 피해야겠군.‘

경지가 좀 더 높아졌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진혁에겐 내키지 않는 만남이었다.

“욘석아, 그래도 내가 너 쓰라고 식귀용 무구도 따로 만들어 줬잖아! 며칠만 도와주면 원하는 괴수 뼈도 넉넉하게 넘겨줄 테니까, 이 늙은이 좀 도와줘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진혁의 표정이 심상찮다는 걸 눈치챈 글리펜은 그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진혁은 굳은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르신. 저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은 지켜질 것입니다.”

“좋아, 좋아. 좋은 자세야. 역시 문휘 놈 핏줄이라니깐?”

진혁의 말에 글리펜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짝! 짝!

“음, 이제 올 시간이군. 자자, 슬슬 준비하자고!”

“예, 사장님!”

글리펜의 박수 소리와 함께 부스를 정리하던 세한금속의 직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 흐름에 맞추어, 진혁 역시 부스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무대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진혁의 가디언인 식귀, 성준이 번쩍거리는 갑옷과 무기를 온몸에 두른 채 서 있었다.

‘신형이라더니, 무장이 제법 괜찮군.’

―네, 진혁 님. 지난번에 받은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 녀석은 더 좋아 보입니다. 무게도 가볍고, 날도 제법 서 있고…….

“크으으으.”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는지, 성준은 손에 쥔 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다만…….

‘다만?’

―힘 조절에 실패할까 걱정입니다. 지난번 서상혁 전무와의 대결 이후로는 사람을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그건 상관없다.’

걱정하는 성준을 향해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네게 질 정도로 약한 엽사라면, 감히 세한의 이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테니까.’

진짜로 죽이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치료할 수는 있을 테니, 적절한 보상금과 함께 상품을 내준다면 조용히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소인도 어서 육체를 얻어 시험해 보고 싶구려. 다른 자들과 대련까지 할 수 있다니, 그저 그대가 부러울 따름이오.’

그 옆에서 혼자만 육체를 얻지 못한 망령, 자이츠가 입맛을 다시며 부러워하고 있을 때.

“이야, 식귀잖아!”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진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잡힌 것은, 세 명의 엽사였다.

중무장한 식귀, 성준을 발견한 엽사들의 얼굴엔 진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이게 뭐야, 식귀가 검을 들고 있잖아!”

“까딱 잘못하면 잡아먹히는 거 아냐?”

“어허, 무슨 말씀을! 세한의 엽사가 직접 통제하는 괴수입니다.”

부스에 손님이 왔다는 사실을 언제 알아챘는지, 엽사들에게 다가간 글리펜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만사 귀찮은 표정으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공장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

“저희 식귀와 대련을 벌여 오 분 안에 승리하시면 세한금속의 신제품을 증정하고 있는데, 혹시 도전할 생각이 있습니까?”

“세한금속의 신제품이라고요?”

“오, 재밌겠는데?”

식귀와의 대련, 그리고 증정이란 매력적인 조건이 세 엽사 중 둘의 마음을 붙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에이, 식귀라면 던전에서 질리도록 봤잖아. 마정석을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무기를 든 식귀라면 얘기가 좀 다르지. 겸사겸사 신제품도 얻고 말야. 난 할래.”

“나도. 세한의 신제품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거 아냐?”

이윽고, 글리펜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문 둘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하하핫, 그럼 이쪽으로 오십쇼. 대련이니까 너무 힘쓰지는 말고요.”

“우리도 사 품인데, 설마 힘 조절 하나 못 할까요. 걱정하지 마쇼.”

두 엽사는 자신만만한 대답과 함께 준비되어 있는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사이 글리펜은 짧은 다리를 움직여 진혁에게 다가가서는, 허리를 숙이라며 손짓했다.

‘이거, 비싼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이윽고, 진혁의 귓가를 파고드는 의미심장한 속삭임.

진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성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준, 사정 봐줄 필요 없다.’

―정말입니까?

‘죽이지만 않는다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렇다면, 뜻대로.

그와 함께.

“크으으으.”

무대 위로 올라온 엽사들을 내려다보는 식귀의 목구멍에서, 음침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매년 인천에서 열리는 엽사 박람회를 주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대한엽사회다.

박람회는 엽사회 내에서도 제법 중요한 행사이다 보니, 행사를 진행하는 실무자 역시 엽사회의 실세가 맡는 편.

머리가 반쯤 벗겨진 정장 차림의 남자 역시, 보기와는 달리 삼 품의 경지에 이른 노련한 엽사였다.

“무명교의 성녀께서 이런 곳까지 찾아와 주시다니, 정말로 영광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흥 종교, 무명교의 성녀 앞에선 그도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이름 없는 신의 뜻일 뿐이랍니다.”

기초적인 신법 중 하나, 소통의 권능으로 한국어를 알아들은 클레어는 자못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품 어린 행동과 선한 인상 그리고 그녀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신성력의 아우라는, 그녀가 이름 없는 신의 선택을 받은 성녀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큽, 크흐흡. 아, 안돼. 이름 없는 신이시여…….’

정작, 클레어가 반짝이는 대머리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은, 자리에 모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안내가 필요하시겠군요.”

“아닙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벅차실 텐데,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는 없죠.”

“허허, 그래도…….”

클레어는 기품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몸이 달아 있던 간부는 어떻게든 성녀에게 편의를 제공하려 안달이었다.

정확히는, 거대집단인 무명교와 연줄을 만들기 위함이었지만.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성녀님께서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십니다.”

대머리 간부의 말을 도중에 끊은 것은 성녀를 호위하는 성기사, 렌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할 수밖에 없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과는 달리, 간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보아하니 사 품이나 될까 말까 한 햇병아리 주제에, 건방지게…….’

렌의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한 간부는 가소로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무명교의 성기사.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교단의 실세였으니까.

“험험,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그럼, 즐거운 관람 되시길.”

결국, 대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요? 그래도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던데.”

“저는 이름 없는 신의 검이니, 신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으으,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네.”

클레어가 입을 삐죽였지만, 렌은 여전히 냉한 얼굴로 성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는 성녀님의 차례죠.”

“걱정 말라고요. 나도 배울 만큼은 배웠으니까. 그것보다, 약속은 지킬 거죠?”

“성녀님께서 신의 뜻에 얼마나 잘 따르느냐에 따라 달린 일입니다.”

“칫, 렌은 너무 차가워. 알았으니까 어서 가요.”

볼을 부풀리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기사를 바라보던 클레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젓고는 렌과 함께 박람회장으로 향했다.

“뭐야, 사제잖아.”

“무명교에서 여긴 웬일이야?”

“새 원정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회색 정복을 입은 클레어와 렌이 박람회에 모습을 드러내자, 자리를 채운 엽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름 없는 신이시여…….”

마치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클레어는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는 중간중간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우길 반복했다.

그렇게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즈음.

“렌.”

클레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기사를 불렀다.

“네, 성녀님. 찾으셨습니까?”

하지만 클레어는 작게 고개를 젓고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향해 조심스럽게 가는 손가락을 뻗었다.

“저런 거 본 적 있어요?”

그 말에 렌의 시선이 성녀의 손가락 방향으로 향했다.

곧.

챙! 채챙!

‘……저건.’

그녀는 성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채챙! 깡!

키가 오 미터를 넘는 거대한 정급의 괴수, 식귀.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투구를 뒤집어쓰곤 나무 몽둥이 대신 식귀의 크기에 맞춰 제작된 대검을 휘두르는,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

“……아니요, 저도 처음 봅니다.”

이름 없는 신의 검이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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